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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37회] 멋진 바다, 멋진 사람들이 있는 부산 수영구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9. 2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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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바다의 도시다. 부산항은 제1위 항구고 여전히 그곳을 통해 수많은 물자들이 오가고 있다. 6.25 한국 우리의 급속한 산업화 당시 부산은 수출 항구로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 부산은 멋진 바다 풍경이 함께 하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해마다 여름이면 부산의 해수욕장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부산의 바다 풍경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바다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산은 많은 자치구들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 중 수영구는 조선시대 수군의 주둔지였던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이 위치했다. 해안선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지형으로 수영만이라는 이름이 붙는 이곳은 수군의 물 수자와 절도사영의 영자를 합해 수영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바다의 도시 부산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수영구에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요트경기가 열렸던 요트 경기장이 위치하고 있고 부산의 중요한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광안대교와 그 광안대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안리 해수욕장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 영행의 중심지이기도 한 수영구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37회에서는 이 수영구를 찾아 이모저모를 살피고 우리 이웃들과 만났다.

광안리 해수욕장의 모래사장과 멀리 보이는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바닷가 한편에서 과거 태풍마이삭이 이 지역을 지날 때 발생한 폭풍이 거대한 바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이삭 바위라 명령된 이 바위는 자연이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 바위를 지나 광안리 해수욕장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제 피서철이 지난 바닷가는 한적했지만, 잔잔한 바다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 모래사장에서 조개껍데기 줍기에 열중인 시민을 만났다. 그는 이곳의 조개껍데기를 모아 작품을 만든다고 했다. 그는 인근 선물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그를 따라 인근 선물가게를 찾았다. 이 선물가게는 지역민들은 물론이고 여행자들도 방문해 함께 작품을 만드는데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참여형 여행이라는 최근 트렌드를 잘 반영한 곳이었다. 

 



사장님은 과거 네일숍을 운영했다. 하지만 개인사업은 큰 실패로 끝났고 그는 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그에게 부산의 바다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바닷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개껍데기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제2의 인생을 열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그는 희망을 발견했다. 

수영구 원도심 길을 걸었다. 그 길에 오래된 레코드점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 가득한 내부와 80, 90년대 음반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최근 다시 붐이 일기 시작한 LP 판 외에 다수의 카세트테이프가 눈길을 끌었다. LP나 CD 음반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의 카세트테이프는 서민들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소위 말하는 길거리 음악을 파는 곳에서도 카세트테이프는 인기가 있었다. LP와 CD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카세트테이프는 그 모습을 보기 어렵다. 과거 워크맨이라 불리던 휴대용 카세트 레코더도 추억의 기기가 됐다. 그 자리는 음원을 재생하는 MP3 플레이어를 거쳐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다. 이제는 음반을 사는 것보다 음원을 구입하거나 음악 사이트에서 수시로 스트리밍 하는 세상이 됐다. 

수영구에서 만난 레코드점은 잊혀가는 과거의 장면을 다시 재현해 주고 있었다. 이 레코드점의 사장님은 레코드점을 40여 년 전 시작했고 이곳에서 노년의 나이가 됐다. 그와 함께 이 가게도 함께 늙었다. 사장님은 수년 후 이 레코드점을 정리하고 귀향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했다. 앞으로 얼마 안 가 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아쉽게 다가왔다. 

레코드점의 음악을 뒤로하고 또 다른 동네의 골목을 걸었다. 그 골목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음식인 완당을 파는 식당이 보였다. 완당은 중국이 그 원조로 일본을 거쳐 부산에 들어와 부산만의 음식이 됐다. 만두피를 엄지손가락 크기로 잘게 빚어 맑은 탕국으로 끓여낸 완당은 만두인 듯하기도 하고 수제비인 듯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이 식당은 사장님은 군을 제대 후 취직한 식당에서 완당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자신의 식당을 창업했다.

하지만 식당은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고 실패를 거듭했다. 이에 다름 음식이나 업종의 전환을 모색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완당 요리에 대한 강한 자부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의 다수의 단골들이 찾는 지역 맛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지금도 손으로 완당을 빚고 정성 가득 끓여내는 육수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한 사람의 고집과 노력은 한 요리의 역사를 지켜지도록 하고 있었다. 

다시 도심의 골목을 걸었다. 그 길에 조선시대부터 시작한 유서 깊은 수영구의 전통시장에 들어섰다. 시장의 북적임과 활기찬 풍경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풍경 속에서 흥이 가득한 채소가게 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아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흥겨움이 가득해 보였다. 이유가 있었다. 이 가게의 사장님인 아버지는 과거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인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었다. 노래는 아버지를 살게 하는 큰 에너지원이었다. 아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들은 다른 일을 하다 3년 전부터 시장에서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시장 일을 했다. 수술을 앞두고도 그의 마음은 시장일 걱정뿐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했다. 그렇게 부자는 매일매일 서로에 의지하며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각별한 마음으로 채워진 시장의 공기는 따뜻하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고 있었다. 

시장을 벗어나 인근의 공원을 찾았다. 수영사적공원이었다. 이 공원은 앞서 언급한 경상좌수사 수군의 군영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 이곳에는 수백 년 수령의 고목들이 즐비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용맹이 싸웠던 이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사당과 비석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수사는 왜군의 기세에 눌려 개전 후 도망을 쳤고 다른 간부급 병사들도 진영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말단 병사들 상당수는 수군 진영을 지키고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곳의 추모비는 당시 이곳을 지키며 분투했던 25인의 의용대를 위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시 조선은 집권층의 무능과 소모적인 정쟁으로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고 개전 초기 속절없이 왜군에 밀렸다. 수도 한양은 너무 쉽게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임금은 백성들을 버리고 황급히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이 위기에서 백성을 스스로 의병을 조직해 후방에서 왜군과 맞섰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왜 수군에 연전연승하며 바다 재해권을 장악했다. 의병과 이순신의 존재는 전쟁 양상을 변화시켰고 조선이 반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기반이 되는 힘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반 백성들의 강한 의지였다. 수영 자석공원의 25인 의용대 역시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싸웠다. 그들의 숭고한 나라 사랑의 정신은 지금도 흔적으로 남아 기억되고 있었다. 

여정의 후반부 지역의 오래된 마을인 망미동을 찾았다. 정감 있는 골목 풍경 사이로 길고양이들을 위한 쉼터와 먹거리가 마을 곳곳에 있었다. 이 마을은 고양이들과 마을 주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었다. 선냥한 이웃 프로젝트로 시작한 공존의 길은 애초 길 고양이들의 번식을 억제하기 위한 중성화 수술이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이후 공전을 위한 노력을 병행했다.

 

광안대교 야경 - 픽사베이



사람들의 돌봄 속에 길고양이들은 망미동에서 사람과 공존하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생활하고 사람들은 고양이들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공존은 이 마을을 특색 있게 만들었다. 길 고양이들과 유기견으로 인한 문제들이 뉴스를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망미동의 모습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지역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였다. 

망미동을 벗어나 의미 있는 장소를 또 찾았다. 고가도로 아래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었다. 고가도로는 최근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구조물로 철거되는 흐름이다. 이곳에서는 고가 도로 아래 공간을 새롭게 활용해 도시 속 풍경을 바꿔가고 있었다. 컨테이너 등으로 만든 건물에서는 각종 전시나 행사가 열리기도 하고 제품 판매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보통 고가도로 아래는 음침하고 사람들이 가기 꺼려지는 곳이 대부분 있었지만, 수영구에서는 이 공간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창조했다. 또한, 먹고 버리는 페트병을 수거해 그곳에서 바로 인형 등 새로운 재품을 만드는 프로젝트는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학생들의 산 교육장으로 의미가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다시 광안리 해수욕장을 찾았다. 시원한 바다 풍경과 해양 레포츠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수영구에서 여정을 정리하는 시점에 수많은 드론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가 보였다. 그곳은 광안리해수욕장 일대에서 매년 열리는 드론 라이트 쇼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속히 수십 대는 넘어 보이는 드론들은 첨단 시스템과 어울려 멋진 군무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드론 라이트쇼는 코로나 영향으로 올해 열리지 못하고 관계자들은 가끔씩 시험 비행과 점검만 할 수 있다고 했다. 과거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보였던 드론 쇼를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광안리해수욕장의 드론 라이트쇼는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었지만, 아직은 그 모습을 직접 보기에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대신 과거 촬영했던 드론 라이트 쇼의 영상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수영구는 과거 군사 요충지로 지역의 역사가 시작됐지만, 해양 스포츠의 중심지로 부산 여행의 중심지로 그 위치가 변해왔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오랜 세월 변치 않은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웃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들의 시련과 어려움을 이기고 그들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었다. 멋진 바다 풍경과 딱 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수영구에서의 시간을 도 소중히 기억하게 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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