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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한강 하류와 서해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탓에 군사적으로 물류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결하는 전장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몽골 침략 당시 임시 수도로서 수십 년간 이어진 항쟁의 거점이었습니다. 몽골과의 화친 이후에는 그에 저항하는 삼별초군의 최초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강화도는 그 중요성이 컸습니다. 새로운 수도가 된 한양, 지금의 서울로 향하는 수상 물류가 강화도와 접하는 바다와 한강을 거쳤습니다. 만약 강화도가 적에서 점령당하거나 하다면 수도 기능이 마비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조선시대에도 강화도에는 각종 군사시설이 설치되었고 방비에 힘썼습니다. 전란 시에는 왕실이 피신하여 항쟁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강화도는 시대를 초월해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강화도는 근대에 들어와서는 조선을 향하는 외세의 침략을 가장 일선에서 맞서는 전진 기지였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맞서 군사적인 충돌이 있었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도 강화도였습니다.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나라의 문호를 연 강화도 조약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강화도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사건과 그 흐름이 바뀌는 사건의 중심지였습니다. 이에 강화도는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선사시대 유적과 함께 각 시대별 역사 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그중에서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던 광성보를 찾았습니다.

 

 

 

 

광성보의 돈대로 향하는 관문인 안해루

 

 

광성보는 그 축성의 기원이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몽골 침략기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에 다수의 진지와 성곽이 구축되었고 광성보도 그곳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강화도 해안의 방어는 중요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축성의 기록이 있습니다. 광해군 때 광성보는 다시 고쳐쌓았고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효종 시대에는 성벽 기능 외에 진지 형태의 지금의 광성보가 축성됐습니다. 이후 숙종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진지 형태의 각종 돈대가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입구 쪽 광성돈대, 조선 후기 사용했던 포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10월 초 방문했을 당시 푸르름이 남아있던 초록의 소나무 숲길

 

 

이곳에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는 무명용사비

 

 

한강하구에 접한 용두돈대와 바다

 

 

용두돈대에 전시된 과거 포, 성곽 산책로

 

 

용두 돈대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대와 조선군 간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미국은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선원들의 횡포로 지역민들과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배가 불태워지고 선원들이 처형된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과 통상 요구를 위해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은 외국과의 통상을 철저히 금하는 쇄국정책을 공고히 했고 이전 프랑스군이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이유로 조선을 침공한 병인양요를 겪은 이후였습니다. 외세의 통상 요구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조선의 거부 의사에도 통상을 지속 요구했고 그들의 함대를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해역으로 진출시켰습니다. 강화도를 지나면 수도인 한양으로 함대가 진출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군사적 대응에 나섰습니다. 양측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용두돈대는 미군함과의 포격전이 있었습니다.

 

 

미군의 사거리와 그 위력에서 월등히 강한 대포로 무장했고 조선군의 재래식 대포는 미군함에 닿지 못했습니다. 포격전의 미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조선군의 해안 진지는 크게 파괴되고 몇몇 진지가 미군에 점령당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항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화력이니 무기는 미군이 크게 월등했고 조선군의 수많은 피해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싸움이었습니다. 조선은 굴복하지 않았고 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결국, 미군은 조선이 통상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철수했습니다. 전투에서는 미국이 승리했지만, 미국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이후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에 대한 적대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습니다.

 

 

신미양도의 또 다른 격전지 손돌목돈대

 

 

이곳에서 미군과 조선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월등히 앞선 무기를 앞세운 미군 앞에 조선군을 속절없이 쓰러지고 희생당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총 대장 어재연 장군을 포함에 모든 장졸이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결국 이곳에서 조선군은 중상자를 제외한 어재연 장군을 포함한 50여 명의 군사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조선실록에는 53명 전사 24명 부상으로 기록아 남아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240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20여 명이 미군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어떤 기록이 맞든 조선군은 중과 부족의 상황이었고 기존에 겪지 않았던 엄청난 강적을 만난 건 분명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쏴도 닿지 않은 포와 총으로 조선군은 분전했지만, 상대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최후의 1인까지 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미군들인 어떻게 보면 조선군의 무모한 항전에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릅니다. 미군이 물러난대는 이런 조선군의 치열한 저항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돈대에서 바라본 바다 그때의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을 안고 유유히 흐를 뿐입니다.

 

 

신의순의총

 

 

신미양요 당시 전사한 51명의 군졸들이 묻힌 곳입니다. 이들은 그 신원을 분별하기 힘들어 이곳에 합장했습니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군졸 상당수는 그 이름조차 없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평민들은 나라의 필요에 의해 군역과 노역을 부담했고 해마다 각종 세금을 부담했습니다. 그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결과물 중 대부분은 소수의 집권층과 양반들에게 귀속됐습니다. 불평한 착취 구조 속에서 평민들은 매일매일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나라는 큰 힘이 되지 못했고 무한한 의무만을 부담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웠습니다. 무모한 싸움이었고 군졸들은 그 이름조차 세상에 알릴 수 없었지만,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강요하고 강제한다고 할 수 있은 아니었습니다. 군졸들은 비록 무거운 삶의 무게를 안겨준 나라일지라도 이곳이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의 후손과 이웃들, 소중한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기에 나라를 지켜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목숨을 바치며 맞서 싸운 침략자였던 미국이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의 우방국이 됐습니다. 국제관계에 있어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실감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역사의 아이러니한 변화 속에 광성보를 지키던 이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광성보는 강화도의 중요한 관광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미양요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방문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 생깁니다. 과거 아픈 역사를 애써 강조하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 희생에 대한 의미를 한 번쯤은 생각하고 이곳을 찾는다면 남다르게 이곳이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곳뿐만이 아니고 다른 역사유적지를 방문하기 전 역사적 배경이나 사실을 조금이라도 공부하고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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