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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양구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정중앙점이 자리하고 있는 국토의 중심이다. 실제 정중앙점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 상 국토정중앙면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처럼 그 상징성이 매우 큰 양구군은 과거 6.25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장이었다. 그 결과 양구군은 휴전선과 접하는 접경지로 남북 분단의 상처와 긴장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접근하기 힘든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최근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찾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최근 양구는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에 안보 관광지로서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8회에서는 양구군을 찾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이야기를 함께 했다.

여정을 시작하며 양구군의 여행 명소인 파로호, 그 안에 자리한 국내 최대 인공습지 파로호 인공 습지를 찾았다. 파로호 인공습지는 그 중간에 자리한 한반도 모양의 인공섬으로 유명하다. 인공섬은 위에서 보면 우리 국토를 압축하여 재현해 놓았다. 방문자들은 습지에 조성된 데크길을 따라 국토 최남단 제주도에서 최북단의 백두산까지 한 번에 종주할 수 있다. 그 과저에서 각 지역의 상징물들이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양구와 잘 어울리는 상징물이었다.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남북이 서로 왕래하기 어려운 현실과 대비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양구 북동쪽의 해안면을  찾았다. 해안면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민간인 통제선 내 면 단위 행정구역이다.  마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먼저 찾았다. 그곳에서 왜 이 지역을 펀치볼이라 부르는지에 대한 유래가 안내문에 담겨 있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펀치볼 지역은 수만 발의 폭탄이 쏟아지는 격전의 현장이었다. 그 전장의 상황을 취재하던 미국 종군기자가 지 지역을 살피다 그 지형이 움푹 파인 분지 모양으로 마치 화채 그릇 (punch bowl) 같다고 했고 이후 그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다고 했다.

 

 


지금도 펀치볼은 양구군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름이다. 비극적인 전쟁의 과정에서 이름이 지역의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한편으로 양구군 해안면의 펀치볼 지형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부분 침식 분지로 지리적으로 가치가 크다. 지금은 평화 둘레길도 조성되고 전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장소로도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 해안면의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 곳곳에는 무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이한 건 무를 수확하지 않고 무청만을 따낸다는 점이었다. 이 무청들은 지역의 덕장으로 옮겨져 말려지고 시래기로 판매되고 있었다. 청정한 자연과 큰 일교차는 양구의 시래기를 더 맛있게 하고 있었다. 펀치볼 일대의 시래기는 펀치볼 시래기로 지역의 특산물로 자리를 잡았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이 일대는 푸른빛의 시래기로 덕장이 채워진다. 이 시래기는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는 반복하며 그 빛을 유지한 채 특색 있는 먹거리로 변신한다. 

펀치볼 시래기는 이곳 주민들의 대를 이은 노력을 산물이다. 전후 이 지역에 자리한 이들은 산지를 손으로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 지금도 산지 곳곳에는 지뢰를 경고하는 안내판이 존재하다. 과거 지역민들은 지뢰나 불발탄 등으로  위험이 가득한 지역을 농지로 바꿨다. 그들의 노고는 이제 지역의 특산물로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흔적이 여전하지만, 펀치볼의 시래기는 달라진 마을을 상징하고 있었다. 

동일한 모습이 집들이 곳곳에 자리한 만대리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남북 분단의 아픔이 함께 하고 있었다. 휴전선에 가까운 이 마을은 1970년대 접경지 북한의 선전마을에 대응에 조성한 마을이었다. 그 때문에 집 모양이 비슷하고 북한을 볼 수 있게 북향으로 집들이 지어졌다. 이 마을에 정착하는 주민들은 땅과 집이 주어졌지만, 생활에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1990년 중반까지만 해도 마을을 오가는데 는 출입증이 필요했다. 

팽팽한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남북 대결의 최일선에서 불안한 마음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아야 했다. 이제 긴 세월이 흘러 과거의 경직되고 긴장된 분위기는 사라졌다. 마을은 평화로운 농촌 마을 그 자체였다. 과거의 기억도 사라져가는 듯 보였다. 마을 한편에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는 오래된 가게에서 마을의 지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마을에 정착한 아버지와 그 아들은 마을의 변화를 몸소 느끼며 살아왔다. 이제 많은 이들이 마을을 떠나고 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이 가게도 서서히 그 역사를 마무리해 해야 한다고 했다. 마을의 한 역사가 사라져 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대신 긍정의 변화가 이 마을에 찾아오길 기원했다. 

또 다른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동치미 메밀 국숫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 국숫집은 과거 국수공장을 개조해 시작했고 3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양구지역에서 많이 나는 무를 이용해 동치미 국물을 만들고 사장님의 오랜 내공이 들어간 메밀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국숫집은 사장님 혼자만이 가게가 아니었다. 이웃 마을 주민들이 수시로 이곳에 와 일을 도와주고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이 국숫집의 역사도 계속 이어져가고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아파트와 마을 집 담벼락에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 보였다. 우리 현대 미술사에 남을 대표적 화가인 박수근의 그림이었다. 박수근은 양구 출신으로 우리 서민들의 모습을 토속적인 느낌으로 그려낸 화가였다. 그의 그림에는 당시 시대상이 담겨 있고 일상을 바라보다는 화가의 독특한 시선이 담겨있다. 양구군에서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미술관이 있었다. 그의 생가터에 마련된 박수근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마음 가득 담아 갈 수 있었다. 

또 다른 농촌 마을에서 커다란 애호박 이정표가 보였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니 찐빵가게가 있었다. 애호박은 물론이고 다양한 종류의 찐빵이 만들어지고 판매되고 있었다. 이 찐빵집을 운영하는 사장님 부부는 젊은 시절 도시에서 식당을 운영했지만, 큰 실패를 경험했고 무거운 마음을 가득 안고 사장님의 고향으로 귀향했다. 귀향 초기 부부는 실패의 기억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들을 포근하게 맞아주고 안아주는 고향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찐빵으로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사람들에 온기를 전해주는 찐빵같이 이들 부부에게 양구와 찐빵은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지금도 부부는 새로운 찐빵을 개발하고 만들며 그들의 인생을 행복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다시 나선 길, 산 아래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집 정원에서 커다란 텐트를 설치고 캠핑을 즐기는 부부를 만났다. 이 부부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수시로 야영을 즐긴다고 했다. 양구의 청정자연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도시인들에게 캠핑하면 먼 거리를 이동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즐기는 걸 연상하지만, 이 부부에게 캠핑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부부는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양구의 멋진 자연에 반해 이곳에 정착했다.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어 수익을 얻는다고 하지만 도시의 삶과 다른 이곳의 삶이 불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부는 수시로 양구지역의 산들과 명소를 찾아 즐기며 삶을 풍요롭게 채워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부부는 행복이 결코 부와 명예만으로 얻을 수 없음을 매일매일 느끼는 듯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하루는 양구의 자연과 함께 계속되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어느 마을의 식당을 찾았다. 그 식당이 과거 통닭집이었음을 알 수 있는 간판이 인상적이었다. 그 식당은 식당 사장님님 손수 반찬을 해서 내어주는 집 밥 식당이었다. 여느 식당과 달리 밥과 반찬에 온기가 더 느껴졌다. 이 식당의 사장님은 과거 남편의 사업 실패 후 어려워진 가정 형편 탓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부부만 양구로 귀향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이후 식당을 시작했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사장님의 곁에는 100세가 넘는 나이까지도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던 시어머니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20년 넘게 손두부를 만들어주며 사장님에 큰 힘이 됐다. 좋거나 힘들거나 한결같았던 시어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의 체취가 남아있는 식당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사장님은 시어머니 대신해 손두부를 만들고 직접 반찬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놓은 한 상을 맛있는 먹는 손님들은 사장님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었다. 

접경지에 위치한 탓에 타지역 사람들에게 멀게 느껴지던 양구군이었다. 하지만 양구군에는 잘 보존된 자연이 있었고 과거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가는 이웃들도 있었다. 또한, 긴장감 가득한 일상이 아닌 평화로운 일상을 만날 수 있었다. 빠르게 바뀌어 가는 시대 흐름 속에 양구군도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뒤로하고 평화롭고 밝은 미래를 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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