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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는 북쪽으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북한 개성시와 접하는 접경 도시다. 이제는 통일로와 자유로 경의선 철도 등 교통망이 확충되어 수도권과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지만, 가장 가깝게는 북한과 불과 몇 킬로 거리에 있어 남북 관계의 변화에 따라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다. 

접경 도시라는 지리적 특성은 파주시를 군사도시, 발전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지만, 최근 파주시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수도권에 인접한 곳에는 대형 신도시가 들어섰고 도시 곳곳에 문화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파주출판도시는 우리나라 출판 산업의 메카가 됐다. 헤이리 마을은 만들어질 당시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문화예술인들의 집성촌으로 큰 관심을 모았고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대규모 첨단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자족 도시로의 가능성도 높여가고 있다. 

지금도 파주시는 곳곳에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도농 복합도시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파주시는 접경 도시라는 특성을 이용한 안보 관광지로도 이름이 높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판문점이 있고 북한 지역을 살필 수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도라전망대, 임진각 관광지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와 조선 최고의 명의로 이름이 높은 허준의 묘소가 파주에 있다. 이들 외에 역사 문화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파주시다. 

파주시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도시로 과거의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50회에서는 2021년 마지막 방문지로 이 파주시를 택했다. 그곳에서 파주시의 명소와 전통을 이어가는 명인들과 힘든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이웃들과 만났다. 

 

 


파주시 여정의 시작은 최근 개장한 임진각 관광지 내 평화 곤돌라를 타는 것으로 했다. 평화 곤돌라는 타면 하늘길을 타고 민간인 통제구역에 이를 수 있다. 그곳에는 좌우 철조망으로 벽 아닌 벽이 생긴 산책로와 최근 반환된 미군 기지와 만날 수 있다. 곤돌라에서는 과거 남북을 연결하던 통일대교와 경의선 철교, 임진강의 풍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긴장감과 함께 평화로운 풍경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파주시 연풍리의 한마을 골목길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이곳은 과거 미군부대가 주둔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도 북적였던 번화가였다.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몰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달러 골목이라 불렀다. 이곳은 접경지의 긴장감과 거리가 먼 다른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미군부대가 이전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쇠락을 길을 걷게 됐다.

아직 남아있는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그때를 기억하게 하고 있어다. 그 골목을 걷다 50년 넘게 마을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 옷 가게 주인을 만나 마을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마을 한편의 노포에서 마을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5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이 노포는 연탄구이 돼지갈비를 주메뉴로 아주 대조적인 메뉴인 생오징어 무침을 함께 내놓고 있었다.

이 노포는 식당을 시작한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가업을 지켜가는 중이었다. 시어머니의 손맛은 며느리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고 수십 년의 맛도 지켜지고 있었다. 며느리는 홀로 힘든 식당 일을 하는 시어머니를 조금씩 돕다 식당에 눌러않게 됐다. 의도했던 일은 아니지만, 이제 두 고부간은 세상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동료가 됐다. 이들의 노력으로 이 노포는 전쟁의 아픔과 남북 긴장관계는 외적 요인에 의해 마을이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도 동요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노포를 나와 한적한 마을에서 지금은 보기 힘든 전통 자물쇠가 보이는 공방을 만났다. 그곳에서 전통 가구의 장식을 만드는 두석장인 부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통가구가 거의 사라진 지금 두석장은 귀한 기술이 됐다. 하지만 그 기술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이도 함께 사라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장인은 그런 시대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전통 기술을 지키고 발전시켜가고 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전통 자물쇠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모양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자물쇠를 쉽게 열지 못하도록 하는 자물쇠의 구조가 아주 독특했다. 간단한 듯하면서 쉽게 열 수 없는 자물쇠,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파주시 문산읍의 초등학교를 찾았다. 프로그램 진행자인 배우 김영철의 모교이기도 한 이 초등학교는 실향민이었던 부모님이 고향과 가까운 파주시에 살게 되면서 그의 유년 시절을 파주에세 함께 했다. 학교는 과거 사진과 달리 더 증축되어 규모가 커졌지만, 과거의 추억할 수 있는 모습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배우 김영철과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배우 김영철의 잠시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보냈던 상당 수 장년층 이상의 성인들에게 더 각별하게 다가올 초등학교의 추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과거 추억 여행에서 돌아와 한적한 동네를 찾았다. 그 동네 가정집 마당에서 목각 인형으로 인형극을 하고 있는 가족들을 만났다. 이곳의 목각인형은 3남매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시작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만들어주려 만든 헝겊 인형이었지만, 점차 목각 인형의 매력에 빠져 직접 목각 인형을 제작했다. 이제는 수없이 많은 캐릭터 목각 인형이 공방을 채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목각인형 제작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잃었던 자신의 존재를 다시 찾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의 배우자 역시 아내의 일을 적극 도우며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어느새 목각인형은 이 가족을 끈끈하게 연결하는 소중한 존재가 됐다. 어머니의 소망대로 코로나 상황은 진정되고 이 목각인형들로 더 많은 이들에게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날이 올 수 있기를 응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파주의 중요한 명소인 파주출판도시를 찾았다. 여행지로도 유명해진 파주출판도시는 개성 가득한 건물들이 사진 마니아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지금도 파주출판도시에는 700여 개의 출판 관련 회사들이 입주해 있고 전국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문화 도시로 자리하고 있다. 

그 출판도시를 걷다 국내 유일하게 한 곳 남아있는 활판인쇄소를 방문했다. 활판인쇄는 금속으로 만든 글자 하나 하나를 조합해 원고에 맞게 배열하고 판을 만든 후 인쇄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당연히 활판인쇄에는 큰 노력과 정성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첨단의 프로그래밍 기술과 자동화된 출판 인쇄 시스템이 보편화된 현실에서 활판인쇄술은 점점 자리를 잃었고 이제는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그럼에도 80살이 넘은 인쇄 기술자와 그의 동료들은 전통의 활판 인쇄술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고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온기에 가득한 활판 인쇄물은 사람 냄새 가득한 독특함이 느껴졌다. 이 활판인쇄술이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인적이 없는 겨울 임진강 유역을 찾았다. 민간인 접근이 힘든 강변에서 어선을 발견했다. 노년의 어부는 마침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임진강에서의 어로 행위는 허가를 득한 이들만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임진강의 민물고기는 귀한 식재료다. 그 어부는 방금 잡은 민물고기를 납품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를 따라 그 장소를 찾았다. 민물 매운탕 식당이었다. 

그 식당에는 어머니의 세 자매가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40년 된 이 식당을 남편과 함께 운영했다. 남편은 임진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식당에 공급하고 아내는 그 물고기를 매운탕을 끓였다. 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홀로 식당을 운영하기 버거워진 어머니는 식당을 정리하려 했다. 힘든 식당 일을 벗어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무겁기만 했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읽은 딸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세 딸이 함께 하면서 어머니는 다시 힘을 얻었다. 그렇게 지켜진 식당에서는 임진강의 명물인 참게가 들어간 민물고기 매운탕과 참게 조림 등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임진강의 청정 자연에서 난 식재료와 가족의 사랑이 가득 담긴 매운탕이 남달라 보였다. 

문산읍내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과 만났다. 그들은 수도권 최북단에 자리한 접경지 마을인 통일촌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버스를 함께 하고 마을로 향했다. 통일촌은 1973년 북한의 선전마을에 대응하고 안보상의 이유로 국가 차원에서 조성됐다. 제대한 군인들과 지역민들을 포함해 80여 가구가 이 마을에 입주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은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 주변의 농지를 개간하고 밤에는 경계 근무에 나서야 했고 군사 훈련도 받았다. 최전선에 위치한 마을에서의 일상은 평범함과 거리가 있었다. 그런 어려움에도 통일촌 마을 주민들은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수십 년이 넘은 마을 역사를 이어왔다. 과거에 통일촌은 이름과 달리 남북 대치의 긴장감을 대표하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이제는 다가가기 힘든 접경지 마을이 아닌 희망의 마을이 되기를 소망해 봤다. 

여정의 막바지 오두산 통일 전망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북한 지역을 살폈고 전시관에서 안보 관련 전시물을 볼 수 있었다. 아픈 우리 현대사를 다시 살피고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실향민을 만났다. 80살이 넘은 그 실향민은 10살이던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는 잠깐의 피난길이라 생각했지만, 그 세월은 1년이 넘어 2년이 되고 다시 10년이 되고 79년이 됐다. 그때의 어린 소녀는 이제 80대의 노년에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는 지금도 그때 함께 피난길에 나서지 않았던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큰 후회는 마음속 큰 응어리가 됐다. 수시로 통일 전망대나 북녘땅이 가까운 곳을 찾지만,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현실은 달라지 않았다. 

남은 생에서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뿐이다.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고 고향땅에 한 번 가보는 것 외에 다른 소원은 없었다. 이렇게 이산가족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은 오늘도 기약 없는 기다림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초고령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현실이다. 남북 이산가족의 문제는 이념과 정치적 이해관계 등을 초월해 더는 미룰 수 없는 보편적 인류의 가치와 인권을 실현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 파주에서 만난 실향민의 절절한 사연이 마음을 한층 더 무겁게 했다. 

이렇게 파주시는 큰 변화 속에서 다양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이웃들 역시 주어진 삶에 무조건 순응하기보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꿈과 희망은 이를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 그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2021년 파주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그래서 더 특별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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