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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의 정점에 선 이성계와 그의 세력은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한 움직임을 빠르게 전개했다. 군권은 이성계에 의해 장악됐도 조정의 대신들과 관료 조직도 이성계 세력이 장악했다. 남은 건 그들이 왕위에 올린 공양왕의 선위와 이성계의 즉위,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순조롭던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사대부 세력이 새로운 왕조 창조에 반대했다. 온건파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우왕의 최영의 제거, 공양왕의 즉위, 토지개혁인 과전법 시행에는 동조했지만,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에는 함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을 가장 중요한 덕복이었고 새로운 왕조를 여는 건 명분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를 왕위에 올려 새 왕조를 열고 기존 국가 운영의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하고자 했다. 여전히 사회 전반에 자리한 불교 중심을 사고를 성리학 중심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강경파 사대부들은 고려 왕조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고 이는 백성들을 삶을 너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없다고 여겼다. 이성계 역시 강경파 사대부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려왕조의 멸망은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이성계는 보다 많은 신진 사대부 세력이 그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지금의 여론 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신진사대부들이 그와 함께 해야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온건파 신진사대부 세력을 이끄는 정몽주의 협조가 필요했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이성계는 측근들과 가문의 재촉에도 정몽주가 마음을 돌리길 기다렸다. 

 

 


이성계의 바람과 달리 정몽주는 적극적으로 고려 왕조 수호를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그는 구심점 없이 흔들리던 온건파 사대부 세력들을 규합하고 정치치의 전면에 나섰다. 정몽주는 이성계와의 인연을 뒤로하고 정적의 길을 걸었다. 정몽주는 정도전 등에 탄핵되어 고초를 치르고 있었던 이색 등 온건파 신진사대부 세력들을 복권시켜 조정에 돌아오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있던 공양왕을 설득해 반 이성계 대열에 합류시켰다. 실권이 없는 왕이지만, 정몽주는 정치적 대결에서 왕의 권위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여전히 고려왕조 존속에 대한 백성들의 여론이 큰 상황에서 여론을 그들이 주도할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정몽주는 세력 규합과 동시에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을 탄핵해 조정에서 물러나게 했다. 정도전은 강경파 사대부의 중심이고 이성계의 중요한 책사였다. 이성계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이성계와의 관계 악화를 불가피하게 했다. 이성계는 이런 정몽주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에 더해 정몽주는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의 신흥 왕조 명나라에서 공양왕과 세자의 책봉을 얻어내며 고려 왕조의 대외적인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의 주도면밀한 움직임은 이성계 세력에 큰 위협이었다.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정몽주 제거에 대한 측근들과 이방원을 비롯한 가문의 의견이 강력히 나왔지만, 이성계는 정몽주를 보호했다. 이성계로서는 정몽주를 새로운 왕조의 핵심으로 삼으려 했다. 

이성계는 군권을 자신이 장악한 이상 정몽주 세력이 정치적 움직임을 한다 해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그는 측근들의 재촉에도 정몽주 세력에 대한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이미 정적이 된 정몽주는 현상 유지에 머물지 않고 이성계 세력에 대한 공격을 더 강화했다. 마침 이성계가 도성을 떠나 사냥 도중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성계의 부재는 반대파에게는 큰 호재였다. 

정몽주는 조정에 남아 있는 조준 등 정도전 세력들을 탄핵해 그들의 조정에서 축출했고 죄를 씌어 처단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성계가 부상으로 도성을 비운 시점에 이성계 세력을 와해시킨다면 이성계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이성계의 군사력은 무력으로 왕위에 오를 만큼 강력했지만, 이성계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도전 등이 선 왕조 창조 후 개혁 등을 통해 민심을 얻을 것을 주장했지만, 이성계는 여론의 지지를 얻는 왕위에 원했다. 정몽주는 이런 이성계의 마음을 읽었고 그 약점을 파고들었다. 

정몽주의 매서운 반격에 이성계 세력은 큰 위기에 빠져들었다. 정몽주는 이 여세를 몰아 이성계를 직접 겨냥할 기세였다. 역적의 죄를 씌워 이성계를 압박한다면 이성계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큰 부상과 그에 따라 발생한 권력의 공백을 이용했다. 

이 위기에서 이성계 세력에는 핵심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이 유배길을 떠났다. 가장 촉명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3년간의 시묘살이 중이었다. 위기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결국, 이성계 부재 시 가문 의사결정의 최 정점에 있었던 그의 두 번째 부인 훗날 신의왕후가 되는 강씨가 이방원을 불러들였다. 위기 상황에서 이방원 만한 전략가가 전략가가 없었다. 

시묘살이는 중단하고 돌아온 이방원은 자리에 누운 이성계의 도성 복귀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방원은 무리한 일이었지만, 이성계의 건재를 과시하는 게 위기 탈출의 중요한 해법으로 여겼다. 여전히 이성계의 존재감은 크고 이성계가 군권을 손에 넣고 있는 상황에서 이성계 자체가 반대파에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방원의 주장대로 이성계는 도성으로 돌아왔고 이는 반대파를 위축시켰다.

특히, 공양왕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공양왕은 정몽주가 주장한 정도전을 포함한 강경 신진 사대부 세력의 제거를 망설였다. 이성계의 보복이 두려웠다. 마침 이성계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공양왕에게 결정을 재촉했지만, 공양왕은 망설이기만 했다. 만약, 공양왕이 정몽주에 동조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핵심 세력을 잃은 이성계의 운신의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성계는 강력한 군벌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어려웠다. 온건파 신진 사대부는 이성계에 맞설 힘을 키울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공양왕의 우려대로 이성계 세력의 군사적 움직임이 있을 수 있었지만, 고려 왕조 존속을 위해 칼을 빼든 상황에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하지 못한다면 새 왕조 창조라는 흐름을 돌리긴 힘들었다. 이미 고려 왕조 존속을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결심한 정몽주로서는 흔들리는 공양왕의 안타깝기만 했다. 

공양왕의 결심을 미루는 사이 정몽주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이성계의 집으로 가 그와 면담했다. 이성계의 본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 하는 이유도 있었고 그의 상태를 살피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자신에 대한 이성계의 마음을 알고 있는 정몽주는 이성계가 그에게 위해를 가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각자의 생각이 다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고 그가 돌아와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정몽주 제거에 대한 의견이 일치한 이성계 가문에서는 정몽주 제거를 시도했다. 이방원이 앞장섰다. 이성계의 단호한 의지와 권위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방원이 나섰다. 이방원은 측근 무사들에게 정몽주의 참살을 명령했다. 이성계와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몽주는 기습 공격을 받았다. 정몽주는 대낮의 도성 한복판에서 철퇴를 맞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과거 드라마에서 정몽주의 죽음은 비장하게 묘사되곤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실록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묘사했다. 

그렇게 고려를 지키던 마지막 충신이 사라졌다. 정몽주의 시신은 이성계 군사들이 지키는 가운데 방치됐고 대역죄인이 되어 그의 목이 효수되어 걸렸다. 이방원을 포함한 이성계 세력들로서는 정몽주가 충신으로 남아서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를 어떻게 해서든 대역죄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대낮에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격살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새 왕조 창조에 대한 반발을 일시에 제어할 수 있었다. 이는 공양왕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양왕은 마지막 남은 의지마저 상실했다. 정몽주 세력 역시 힘을 잃었다. 유배길에 올랐던 정도전 등 강경파 신진 사대부 세력들이 다시 조정을 장악했다.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격살과 사후 처리에 분노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함께 하는 왕조를 꿈꿨지만, 비정한 정치는 오랜 지인은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정도전을 포함한 측근들을 잃어야 했다. 그의 가문 역시 큰 위기에 몰릴 수 있었다. 이성계는 자신의 힘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가 잠시 틈을 보이자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정몽주의 제거는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일이었고 누군가는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머뭇거릴 때 이방원이 행동했다.

이방원은 상황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시간을 준다면 새 왕조 창조가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방원 역시 한때 큰 스승으로 섬겼던 정몽주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었지만, 비정한 정치는 정몽주에 대한 사제의 인연 마저 끊어놓고 말았다. 이방원의 정몽주 격살은 조선 왕조 창조의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됐다. 이성계는 이방원과 함께 뜻을 함께 한 아들들에 대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이성계는 이미 형제들 간 권력 투쟁을 염려하고 있었다. 지금은 함께 하고 있지만, 차기 권력을 놓고 벌어질 가문 내 문제를 그는 예견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신덕왕후 강씨가 조금씩 파고들었다.

강한 야심가인 강씨는 이성계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게 하는 한편 이성계와 그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이 이성계와 더 돈독한 관계가 되도록 했다. 강씨는 새 왕조 창조 후 정치적 상황도 고려했다. 그는 권력 투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방번과 방석이 이성계의 마음을 더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이렇게 새 왕조 창조를 위한 극적인 움직임 속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서서히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장애물은 사라졌다. 이성계는 모두의 박수를 받는 선위를 기대했지만, 비정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게 됐다. 이성계는 갈등했지만, 이미 그는 개인 이성계가 아니었다. 그를 추종하는 정치세력과 가문의 운명을 그는 짊어지고 있었다.

그가 멈춘다면 그들 모두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는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역적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대의를 가지고 한 일이지만, 그는 왕명을 어겼고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최영을 제거하고 왕을 갈아 치우는 일을  했다. 그가 아무리 고고한 모습을 보이려 했고 그가 행한 원죄는 지어질 수 없었다. 정몽주에 대한 미련은 큰 욕심이었다. 신진 세력의 중심이 된 이성계에게 구 세력의 희생을 딛고 나가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시간은 이성계의 조선으로 빠르게 옮겨지고 있다.


사진 : 드라마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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