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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 전 터키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다. 멋진 자연과 동. 서양이 교차하는 독특한 문화 전통, 6.25 한국 전쟁 참전 등의 이유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현지의 우호적 분위기도 터키에 대한 친밀감을 높였다.

그중 이스탄불은 대표적 관광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고 아프리카와도 연결되는 지리적 위치는 이스탄불을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만들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스탄불을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이나 영상을 보면 이슬람의 문명과 서양의 문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이스탄불은 로마제국 시대 그 이름을 바뀌기 전까지 비잔티움이라 불렸고 이후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콘스탄티누폴리스 등으로 불렸다. 현대에서는 영어식 이름인 콘스탄티노플로 많이 불리고 있고 이슬람 세력하에서 그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뀌며 현대에 이르고 있다. 이스탄불의 다양성 이면에는 치열한 전쟁과 정복의 역사가 숨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성이 혼재하는 곳인 이스탄불은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사건의 장소이기도 하다. 1453년 이슬람 제국 오스만투르크의 황제 메흐메트 2세가 주도한 정벌군에 이스탄불이 함락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며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문명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했던 이 도시는 유럽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제국의 역사와 함께 이해해야 하는 도시다.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유렵과 아프리카 북구 지중해를 아우르던 대 제국 로마는 330년 큰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에 로마는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이후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됐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이민족의 침략과 내부 정치 혼란 속에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천년 넘게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에 단일 왕조로는 가장 긴 역사이기도 했다. 

 

 


과거 이 지역을 부르는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따온 비잔틴제국이라고도 불린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다른 동. 서양의 문화가 융합되고 특히, 이슬람의 문화가 더해진 제국으로 발전했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지리적 이점을 통해 동. 서 교역의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했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계승해 발전시키며 문화 강국의 모습도 보였다.

막대한 경제적 부는 주식인 빵을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할 정도였다. 시민들은 과거 로마와 달리 상공업에 종사하며 도시의 번성에 있어 중요할 일익을 담당했다. 다른 중세 유렵 도시와 다른 근대적 도시의 면모까지 보인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는 등 그 세력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황금기가 지나고 동로마 제국은 점점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슬람 제국의 끊임없은 압박에 동로마 제국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 대 제국의 면모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이슬람 제국의 압박에 동로마 제국은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교황이 주도하는 십자군이 편성되어 대규모 동방 원정이 이루어졌다. 십자군 전쟁은 과거 기독교 성지를 탈환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복 전쟁으로 변질됐고 군대가 아닌 약탈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고 약탈당하고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를 거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쇠락을 길을 걸었다.

이후 무역항으로 다시 부활하며 그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보루로 자리를 지켰다. 동로마 제국의 영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크게 축소됐지만, 콘스탄티노플의 강력한 성벽과 방어 체계는 이슬람 제국들의 거듭된 침공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플은 천년 제국의 수도로 역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젊은 황제 메흐메트 2세의 등장으로 콘스탄티노플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이슬람 제국의 침략을 막아낸 콘스탄티노플이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과거 이슬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여의지 않을 경우 막대한 금품을 받는 식으로 상황을 정리하곤 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달랐다. 그는 철저히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준비했고 국가적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는 어린 나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결과물이 필요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수백 년간 이슬람 제국의 숙원이었지만, 누구로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 일을 해낸다면 그의 지배력은 한층 높아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여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또한, 동.서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중요한 교역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경제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고 지중해 진출에도 큰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맞서는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은 심각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육지는 물론이고 해상 교역을 막았다. 이미 그의 오스만 제국은 로마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콘스탄티노플은 고립무원의 상황이었다. 서유럽의 지원도 받기 어려웠다.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제국은 10만 명이 넘는 대군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채 육지와 바다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아야 소피아 벽화

 


오스만 제국의 부대에는 당시로는 가장 강력한 대포가 있었고 최정예 부대가 함께 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5만 명 정도였고 정식 군대는 고작 7천 명 수준이었다. 그 군대 중 상당수는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은 용병들의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왕실의 귀중품을 녹여 금화를 만들어야 했다. 겹겹이 오스만제국의 군대에 포위되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 제국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중심으로 뭉쳐 끝까지 항전했다. 무려 2달여의 공방전이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건재했다. 천년 왕국의 마지막 요새는 단단했고 그 왕국을 지키려는 이들의 의지는 객관적인 전력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다.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제국 군대는 육전에서는 성벽을 넘지 못했고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콘스탄티노플의 해안에서 근접전을 펼칠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에 근접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 해협으로 가는 바닷길의 입구에는 현대의 기술로도 끊을 수 없는 강력한 쇠줄이 있어 통과가 불가능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점점 오스만제국이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갔다. 대군을 동원한 오스만제국으로서는 긴 전투가 큰 부담이었다. 이전의 오스만제국처럼 콘스탄티노플을 지척에 두고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메흐메트 2세는 세계 전쟁사에 남을 기발하고 창의적인 작전으로 전세를 변화시켰다.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밤늦은 시간 콘스탄티노플 군대의 눈을 피해 산에 길을 내고 군함을 다수 이동했다. 하룻밤 사이 오스만제국의 대규모 함대가 콘스탄티노플 해협에 등장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육지에서 강력한 오스만제국의 정예군이 그들 뒤편의 바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해군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양쪽을 모두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성벽 일부가 붕괴되면서 전세는 급격히 오스만제국으로 기울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도시를 지킬 수 없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에 의해 점령됐다. 천년 왕국 동로마 제국도 멸망했다. 이슬람 세력으로서는 오랜 숙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오스만제국은 더 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이후에도 인근 지역을 모두 점령하며 정복 군주로 명성을 쌓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이후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됐고 동. 서 교역의 중심으로 기능했지만, 그 주인은 기독교 세력이 아닌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갔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약탈과 파괴를 금지하고 도시의 기능을 정상화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5만 명의 시민 중 상당수를 처형하고 나머지 인원을 노예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시민들의 재산권과 인권을 보장하고 생업에 그대로 종사할 수 있도록 했다. 종교 역시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관용정책은 콘스탄티노플을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됐고 그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하지만 기존의 콘스탄티노플의 이름도 함께 사용됐다. 오스만제국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만큼 천년 넘게 이어진 로마 제국의 역사와 전통은 이슬람 세력들로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는데 활용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은 서구에서 소피아 대성당으로 불리는 이스탄불 최고 유적지인 야야 소피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야 소피아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제국 시절 기독교의 또 다른 종파인 동방정교의 본산이자 중심이 되는 성당이었다.  당시 동로나 제국의 역량이 집중된 건물과 시대의 걸작이었다. 오스만제국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의 성당 건축 양식과 이슬람의 모스크 양식이 공존하는 독특함이 있다. 성당 건축 당시 그려진 성화들은 파괴되지 않고 덧 씌워지기만 한 탓에 훗날 그 일부가 복원되어 동로마 제국 당시의 예술적 문화적 흔적과 만날 수도 있다.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을 이은 터키의 중요 도시로 자리하고 있지만, 동방정교회의 총 대주교가 여전히 이스탄불에 있고 이스탄불은 동방정교회의 본산으로 여전히 인식되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오스만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종교적 관용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정복자의 포용 정책의 결과물이었고 이스탄불의 정체성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로마 지역의 영역이었던 터키와 인근 지역에서 유럽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다. 동. 서 교역의 주도권은 이슬람 세력이 가지게 됐다. 오스만제국의 영향력 확대는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바닷길에 열망을 불러왔고 대항해 시대를 여는 발판이 됐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입된 다수의 기술자와 예술가, 과학자 등 지식인들은 선진 문물의 전파자가 됐고 유럽의 르네상스를 한층 더 촉진토록 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 역사와 문화적 전통의 중요한 본류라 할 수 있는 로마와의 이별이었지만, 유럽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은 사회, 경제적인 발전을 이뤄냈고 동양과의 경쟁에서 완벽한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제국주의로 이어져 서구 국가들이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는 변화로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 멸망의 역설이었다. 천년 제국의 멸망은 새로운 창조와 발전의 세 시대, 중세를 넘어 근대로 가는 기폭제였다. 


사진 : 프로그램,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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