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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는 충청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탓에 세종특별자치시와 대전광역시 등의 대도시와 충청남도의 여러 도시, 군과 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국립공원 계룡산이 남동쪽에서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고 금강이 도시 중앙부를 흘리고 있다.

공주는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한성 백제 시대를 접고 남하했던 시기인 475년과 538년까지 웅진으로 불리는 수도였다. 이후 백제는 성왕 때 이르러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공주는 백제의 중요한 도시였고 통일신라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지역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 그런 유구한 역사 속에 공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백제 문화유적이 있다. 조선 후기였던 1894년에는 동학운동 당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우금치 전투의 장소이기도 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55회에서는 이 공주를 찾아 공주의 명승지와 그곳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시간을 채웠다. 

이른 아침 백제시대 유적지인 공산성을 길을 걸었다. 공산성은 앞서 언급한 대로 웅진 백제시대 수도로 백제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백제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에 고구려와 대결했지만, 강성한 고구려에 밀려 오랜 수도인 지금의 서울, 한성을 떠나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의 시스템을 정비했다.

 

 


공주는 백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장소였다. 공주에서 힘을 키운 백제는 이후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신라와 연합해 잃어버렸던 한강 유역을 되찾는 등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공산성은 웅진 백세시대 수도를 방어하는 성곽이었다. 백제시대 토성이었지만, 이후 시대를 거치며 석성으로 증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산성의 산책로는 오랜 역사가 함축된 길이었다. 그 길에 백제시대부터 전해지는 탈춤을 연구하고 계승하고 있는 청년들을 만났다. 일본에 탈춤을 전수한 것으로 전해지는 백제시대 인물 마마지의 이름을 따 마마지 탈춤이라고 불리는 백제의 탈춤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탈춤과 달리 화려함과 기품이 느껴졌다. 그 춤의 에너지와 함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공주 원도심 길을 걸었다. 도시의 계천길을 따라 걷다 추억의 벽화들이 그려진 마을에 닿았다. 장년층들에게는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벽화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오랜 된 집과 만났다. 그 집은 과거 대학생으로 북적였던 하숙집이었다. 공주에는 두 개의 국립대학교가 있어 많은 재학생들이 있었다. 공주는 물론, 타지역 학생들도 많았다. 하숙집은 타지역에서 온 학생들의 중요한 거주 형태였다. 

한 가정에 많은 방이 있었고 학생들은 각자의 방에서 거주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주인은 학생들을 위해 상을 차리고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는 건 대표적인 하숙집의 풍경이었다. 지금은 대학생들의 주거 형태가 공동생활을 하는 하숙집이 아닌 개인적 공간인 원룸 형태로 변모했다.

하숙집은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 됐다. 방문한 하숙집도 이제 학생들은 없었다. 대신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과거 학생들이 있었던 방과 그들이 남긴 낙서 등이 있었다. 하숙집 주인은 그때를 추억하며 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오갔던 집은 여러 사람들의 인생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하숙집 주인은 젊고 생기 발랄했던 학생들과의 삶과 함께 했던 추억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했다.

추억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공주지역의 대표하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원로 시인 나태주의 시로 채워진 마을 벽화가 동행했다. 그 길에 다시 과거와 현재와 공존하는 곳을 만났다. 옛 방직공장의 모습을 한 그곳의 내부에는 식당이 있었다. 만두전골이 대표 메뉴였는데 식당의 사장님은 애초부터 식당을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생계를 위해 식당을 시작했다. 그 일을 하면서 시부모님은 남편을 대신해 그의 삶에 있어 든든한 울타리였다. 남편과의 결혼도 시부모님의 열렬한 지지속에 성사됐고 만두 빚는 기술은 이북 출신 시부모님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지금의 식당 자리도 과거 시댁의 공장 터였다. 비록 남편은 없지만, 이런 사랑을 바탕으로 사장님은 번듯한 식당을 운영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식당은 레트로 감성 가득한 독특한 분위기로 방문자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했다. 사장님의 강한 의지와 많은 이들이 도움과 사랑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이 식당이 오랜 세월 지속되기를 기원하며 길을 나섰다. 

공주의 산성시장을 찾았다. 시장 특유의 풍경과 다양한 먹거리가 방문자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중 한 떡집을 찾았다. 쫀득쫀득한 인절미가 반가웠다. 인절미의 이름에는 공주와 연결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축출하고 임금 자리에 오른 인조는 1624년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장수 이괄의 반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인조는 도성을 떠나 공주까지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  피난길에 임씨 성을 가진 이가 지금의 인절미와 같은 콩고물을 묻힌 떡을 인조에 바쳤고 인조는 그 맛에 반해 절미라 칭찬했다. 급박한 피난길에 제대로 식사도 챙길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전해진 떡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인조는 그 떡을 임절미라 부르게 했고 세월이 지나 그 이름이 인절미로 바뀌었다. 이에 인절미는 공주의 떡이라고 불린다. 인절미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시장에서의 시간을 지나 한적한 농촌 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은 밤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공주는 예로부터 밤의 주요 생산지였다. 마침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군밤을 굽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군밤과 군고구마는 도시에서도 겨울을 상징하는 풍경 중 하나다. 그런 군밤을 공주의 어느 농촌마을에게 만날 수 있었다. 주민 한 분을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이 마을에서는 밤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집집마다 만들어 놓고 있었다. 주민분의 집도 지하에 밤을 저장하는 오래된 시설이 있었다. 

이 집에는 남다른 사연이 하나 숨어 있었다. 집 주인은 97세의 노모를 50년 가까지 모시고 있다고 했다. 며느리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시집와 시부모님에 많은 시동생들, 3남매까지 뒷바라지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를 위해 며느리는 쉼 없이 일하고 살림을 돌봤다. 자신의 삶은 사라지고 식구들을 위한 살아온 그의 나이는 어느덧 70살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었다.

과거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을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이런 삶 속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됐다 시 어머니는 며느리의 고생스러운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큰 힘이 됐다. 시어머니 역시 며느리의 삶을 살았다. 세월과 함께 쌓인 고부간의 정은 노년을 함께 보내는 친구 같은 관계로 됐다.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를 함께 보내는 고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며느리가 노모를 위해 요리하는 밤묵과 밤 요리가 더해진 밥상은 그 어떤 요리보다  값지게 보였다. 

다시 나선길에 50년 가까지 이어지고 있는 노포 식당을 만났다. 이 식당은 메뉴는 너비아니 한정식으로 단출했지만, 상차림의 과정을 큰 정성이 필요했다. 식당의 사장님은 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운영했지만, 연로한 어머니는 더는 일을 할 수 없어 병원에 계신다고 했다.

숯불에 굽은 너비아니와 20가지가 넘는 밑반찬에 청국장과 해물 찌게 든 한 상 차림에 많은 손이 필요한 탓에 힘이 부치기도 하지만, 사장님은 식당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사장님은 어머니의 삶이 함께 한 어머니의 인생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식당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일해 돈을 모아 이 식당을 차렸다. 모진 세월을 이겨낸 결실인 식당임을 사장님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식당을 지키고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은 노포의 가치를 한껏 더 높이고 있었다. 

 

 



공주의 남쪽 계룡산 방면으로 발걸음 했다. 길을 걷다가 얼레빗 전수관이라는 색다른 표지석이 보였다.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할 수 있는 전통 나무 빗은 얼레빗을 만드는 공방이었다. 지금은 골동품점에서나 볼 수 있는 얼레빗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얼레빗을 만날 수 있었다. 단순한 빗이 아닌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공예품이자 예술품이었다. 

이 얼레빗은 7대 째 이어지고 있는 공예품을 만드는 가문의 산물이었다. 장인은 50년째 올레빗을 만들고 있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작업의 연속이지만, 전통 공예의 맥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또 견뎠다. 하지만 공예 장인들의 공통된 고민인 줄어드는 수요가 공예 기술을 이어갈 후계자 부족 등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우리 역사와 문화의 전통의 담겨있는 멋진 공예 기술이 계속 이어가길 기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여정의 막바지 오래된 방직공장을 찾았다. 공주시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직조공들이 다수 정착하면서 방직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한때 그 수가 200여 개에 이르렀다. 하지만 값싼 외국 제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방직산업은 사양화됐고 다수의 방직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이제는 10여 곳만 남아 있다. 그 방직 공장들이 있는 골목에서 색동 천을 짜고 있는 공장의 노부부를 만났다. 

10대 때부터 방직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부부는 20대에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방직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사이 주변의 방직공장들이 사라지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 상당수도 곁을 떠났지만, 이 부부는 지금도 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한때 부부는 이 일로 멋진 인생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섬유 산업이 쇠퇴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 방직 산업의 명맥을 이어가는 직조공이라는 자부심으로 세월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들 부부에 의해 만들어지는 색동천은 지금도 명절이면 입는 색동 한복의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부부의 삶은 색동천과 같이 화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삶의 한순간을 무지개색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공주에서의 여정은 과거의 여러 흔적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들과의 만난 시간이었다.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공주답게 고대부터 근. 현대사까지 다양한 과거 이야기가 공주 곳곳에 있었다. 그런 과거들이 모여 공주만의 역사 이야기를 만들었고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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