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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의 지명에는 은 한자로 햇볕이 빽빽함을 의미하는 의미가 있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던 시절 햇볕이 잘 들고 강과 가까운 밀양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밀양 지역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나라를 형성했던 기록이 있다.

대구와 부산 시에 자리한 밀양은 KTX 철도가 정차하고 대구, 부산 고속도로가 지나는 등 영남권의 교통 요지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영남권 신공항 건설과 관련해 부산 가덕도와 치열한 유치 경쟁을 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밀양을  통해 많은 알려지기도 했다. 밀양은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높고 험준한 산맥이 도시를 감싸는 분지 지형이기도 하고 남쪽으로서는 낙동강이 흘러 배산임수의 지리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산과 강이 함께 하는 밀양은 멋진 풍경을 가진 장소가 곳곳에 있다. 이렇게 볼거리와 여러 이야기가 있는 밀양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0회에서 찾았다. 

강과 함께 하는 멋진 풍경이 있는 장소를 먼저 찾았다. 밀양 강변의 절벽에 자리한 정자인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불릴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매우 컸다. 지금도 영남루는 밀양의 절경 중 가장 으뜸으로 손꼽히는 밀양의 명소다. 

그 풍경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노랫가락이 들였다. 인근 마을 주민들의 소리였다. 그들은 아리랑 공연을 준비하는 어르신들이었다. 밀양 아리랑은 진도, 정선 아리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에 속한다. 밀양 아리랑의 멋진 리듬과 소리에 빠져 잠시 시간을 보냈다. 

밀양의 또 다른 명소 얼음골로 향했다. 한 여름에도 계곡의 바위틈 사이로 얼음이 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얼음골은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비석에서 땀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한 무안면 무안리의 표충비, 만어산 만어사 인근 계곡의 골짜기 바위를 두드려면 종소리가 나는 만어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 중 하나다.

 

 


방문 시에는 얼음골 계곡을 찾지 않았고 얼음골의 또 다른 명물 사과를 만났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하면서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한 밀양의 기후 속에 자라난 얼음골 사과는 밀양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곳곳에서 사과를 파는 거리를 지나 한 푸드트럭을 들렀다. 부부가 운영하는 푸드트럭에서는 사과 빵 등을 만들어 찾는 이들에 판매하고 있었다. 부부는 자신들의 과수원에 나는 사과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사과 빵을 구상했다고 했다. 식구들 부양을 위해 청장년 시간을 보낸 남편은 뒤늦은 나이에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다소 늦게 인연이 됐지만, 부부는 서로를 밀고 끌며 얼음골 사과와 함께 인생 2막을 멋지게 열어가고 있었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강변의 수변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원도심의 색다른 공간을 발견했다. 오래된 집들을 개조하고 꾸며 만들 공간에는 다양한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역의 작가들이 모인 예술인들의 문화 마을이었다. 마을 한 편에는 미리니동국이라는 마을 명이 눈에 띄었다. 미리니동국은 삼국시대 밀양 지역에서 번성했던 왕국이었다.

이후 신라가 그 세력을 확대하며 사라졌지만, 이 고대왕국의 존재는 밀양의 유서 깊은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을 미리니동국으로 이름지었다고 했다. 지방의 도시들이 대부분이 겪는 문제인 지속적인 인구 감소와 지역 축소의 문제에 밀양시도 예외는 아니다. 미리니동국 예술인 거리는 지역의 문화, 예술의 공간이자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공간으로 그 의미가 커 보였다. 

사람들의 북적임 가득한 밀양의 시장을 찾았다. 밀양 아리랑 시장이라는 간판이 선명한 이 시장은 조선 성종 때 밀양 읍성을 축조하고 밀양이 지역의 거점으로 자리 잡는 시기를 그 기원으로 할 정도로 유서 깊은 시장이었다. 그 시장에서 전통떡을 지키는 모자가 운영하는 떡집을 찾았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부편이라는 떡집이었다.

부편은 제사나 차례, 고사 등 큰 상을 차릴 때 떡 가장 윗부분을 장식하는 웃기떡을 말한다고 했다. 제조 과정에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떡이었다. 이 전통떡은 어머니에서 아들로 기술이 전수되고 이어지고 있었다. 아들은 한때 삶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이 시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했고 떡집을 열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의 기술을 전하고 함께 떡집을 운영을 도왔다. 모자의 떡집은 두 사람의 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들은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열었다. 아들의 노력과 그런 아들과 함께 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더해진 결과였다. 지금도 이 떡집에서는 전통 떡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밀양 읍내로 발걸음 했다. 그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항일운동 테마거리에서는 지역의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기록들을 살필 수 있었다. 밀양은 1919년 3.1 운동 당시 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으 정도로 활발히 이에 참여했다. 또한,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의 지도자 김원봉이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밀양의 항일운동 테마거리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하는 의미 있는 장소였다.

밀양의 농촌 마을을 찾았다. 넓은 들판 옆 농로를 걷다가 작업이 한창이 주민들을 만났다. 주민들은 묵의 일종인 한천 말리기 작업에 열중이었다. 한천은 해조류인 우뭇가사리로 만드는데 젤리나 양갱등의 탱글탱글한 식감을 만들어 주는 재료로 이용된다. 바다와는 거리가 먼 내륙의 도시에서 한천을 만드는 게 이채로웠다. 이유가 있었다. 밀양은 일교차가 심하고 햇볕이 잘 드는 기후조건이 있다. 무언가를 잘 말리는데 아주 유리하다. 이에 착안해 밀양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천 덕장이 생겼다. 지금도 농사가 끝나고 몇 개월간 이 작업을 한다고 했다. 지금은 국내에서 유일한 자연 건조 한천 덕장이라고 했다. 전통의 맛을 지키는 또 다른 장소라 할 수 있었다.

농촌 마을을 떠나 산골 깊숙이 자리한 산촌을 찾았다. 집들을 거의 볼 수 없는 깊은 산중에 한 집이 보였다. 그곳에서 전원생활을 함께 하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도시에서 괜찮은 사업가로 살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격무에 지치고 건강을 잃었다. 그는 보다 여유롭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곳을 찾았고 밀양의 어느 산촌에 정착했다. 부인은 처음에는 귀촌에 반대했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을 염려해 그와 함께 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산촌에서 부부는 집을 짓고 생활에 필요한 시설 등을 만들고 고치며 이곳의 삶에 적응했다. 불편함의 연속이었지만, 자연 속에서의 삶은 건강과 함께 마음의 평화, 여유를 가져다줬다. 이제는 완전히 산촌 사람이 됐다.

남편은 산촌에서의 여유를 방문자들과 나누고 있었다.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이나 산을 방문한 이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그들에게 찬 한 잔, 밤 한 끼를 나누는 일이 일상이 됐다. 어느새 부부의 산골 집은 그들만의 장소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열린 공간이 됐다. 부부는 그들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잠시나마 행복을 마음속에 담아 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외로울 수 있는 산중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이 부부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산촌을 나와 황토 돌담이 인상적인 한 마을을 찾았다. 돌담길을 걷다가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하는 음악 합주 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향했다.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든 형제자매들의 함께 연주를 하고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합주를 해본 모습이었다. 모두 육 남매로 이루어진 이 합주단은 막내의 제안으로 합주를 시작했고 이제는 이 일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중 막내 바로 위 자매들 중 유일한 남자 동생을 둘러싼 누나들은 어린 시절 4대 독자인 남자 동생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에 대해 섭섭함과 서운함을 농담 섞인 푸념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됐다. 지금은 악기 연주를 함께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자매간 우애를 더 돈독히 하고 있었다. 음악이 가족들에게는 행복을 부르는 매개체였다.

 

 


여정의 막바지 한 오래된 노포를 찾았다. 밀양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돼지국밥 식당이 그곳이었다. 요즘은 돼지국밥 하면 부산을 먼저 떠올리지만, 밀양의 돼지국밥도 그 역사가 매우 깊다. 이 식당은 밀양 돼지국밥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었다. 이 식당은 팔순을 넘긴 어머니와 그의 며느리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연로한 나이에도 매일 식당에 나와 식당 일을 돌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과거 돼지국밥 식당을 하다 잠시 일을 그만뒀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식당을 다시 해야 했다. 지인을 위해 보증을 선 게 큰 빚이 됐고 가정의 생계에 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고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를 크게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가정의 생계가 문제였다. 며느리는 마음을 다잡고 식당을 다시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맛을 다시 재현했고 식당도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가족들이 어려움에 빠졌던 기억이 큰 돌덩이가 되어 남아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식당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그의 삶과 함께 했다. 

며느리는 이런 시어머니의 마음을 다독이며 함께 식당을 운영 중이다. 이제는 한때 가졌던 원망의 마음을 접었다. 그저 시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있는 게 최고의 소원이 됐다. 그렇게 돈독해진 고부간의 관계는 밀양 돼지국밥집의 역사를 대를 이어 이어가도록 하고 있었다. 

밀양에서의 일정은 봄 햇살과 같이 마음 따뜻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이름과 같이 마음 따뜻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마음 한편을 뜨겁게 하는 역사의 현장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따스함이 밀양을 더 살기 좋게 하고 방문하는 이들을 기분 좋게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행지 밀양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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