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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하다.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됐던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기는 문제가 사실상 확정됐다. 2022년 5월 10일부터 시작하는 윤석열 정부는 용산으로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발표했다.

그 자리는 현재 국방부가 있고 그와 관련한 군부대와 시설들이 있는 곳이다. 국가 안보의 컨트롤타워라 할 수 있는 국방부는 대통령 집무실이 옮겨오면서 당장  2달 안에 국방부와 관련 부대가 자리를 내주고 이사를 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이와 관련해 여러 비판이 나오고 있고 반대 의견도 상당하지만, 새 정권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그대로 강행할 태세다. 이와 관련한 사회적 갈등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청와대 집무실 이전은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다. 매번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보다 열린 공간으로 옮기겠다는 공약은 계속 나왔다. 하지만 국가 원수에 대한 경호와 안보 보안상 문제, 막대한 비용, 서울 시민들의 불편함 등 여러 현실적인 장애 사항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의 용산 대통령 집무실 이전 역시 경호와 안보, 비용 등 기존의 문제들이 다시 한번 제기되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란 속에 우리 근. 현대사 속 청와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두 곳은 모두 일제 침략의 역사에 있어 그 중심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용산은 일본군의 주둔지였고 전쟁의 병참기지, 조선 침탈의 전초기지였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경복궁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이 그 후원에는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모두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청사(1929년)

 


용산의 외국 군대 주둔의 역사는 매우 길다. 용산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시대 중요한 수상 물류의 통로였다.  수도 한양과 바로 연결되는 도로도 있었다. 그 덕분에 큰 장이 서는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에 용산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사는 주거지가 있었고 대규모 공동묘지도 있었다. 지금의 이태원은 배밭이 있었다. 또한 용산은 수도 한양을 가는 길목에 자리한 요충지로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중요성도 컸다. 이에 용산은 침략군들의 근거지가 됐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으로 향하는 일본군이 이후 조선 말에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이 주둔했다. 1894년 청. 일 전쟁 직후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했고 주둔의 역사는 길어졌다. 청. 일 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한 일본은 군대의 지휘로 각종 병참 기지를 용산에 설치했다. 190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대결한 러. 일 전쟁 때는 일본군의 조선 내 영토 사용권을 주 목적으로 하는 한일의정서에 근거해 지금의 용산역 일대를 군사 목적으로 징발해 사용했다. 

이후 용산은 일본의 조선 주둔군, 그들이 조선군이라 하는 일본 침략군의 본거지가 됐다. 또한, 용산은 철도 교통의 요지로 추후 대륙 침략을 위한 근거지로 자리했다. 그 한편에는 철도 부지 주변에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신용산이라는 불리는 거주지도 생겨났다.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이 절정으로 향하는 시기에는 1938년 4월 국가 총동원법에 근거해 조선의 인적, 물적 수탈의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용산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향했고 곳곳에서 수탈한 물자들이 오고 갔다. 그 한편에는 지금 용산 미군 기지 내로 추정되는 곳에 호화로운 제2의 총독관저도 있었다. 서양식 궁궐의 모습을 한 관저는 남겨진 사진 등에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화려함 때문인지 이 관저 유지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사용에 제한이 있었다. 한때는 일왕의 조선대 궁으로 검토되기도 했었다.  용산은 일본군의 주둔지이기도 했지만, 조선을 억압하는 총독부의 잔재도 함께 품고 있는 곳이었다. 

이런 일제의 침략전쟁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강력히 저항하던 일본은 원폭 2방을 얻어맞고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제의 압제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용산의 외국인 군대 주둔의 역사도 끝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용산에 바로 주둔했다. 또다시 외국 군대가 용산을 차지했다. 6.25 한국전쟁 때 용산을 장악한 북한군의 지휘소가 용산에 있었고 전후 주한 미군이 용산을 근거지로 주둔했다. 그렇게 외국군의 용산 주둔 역사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남산에 있었던 조선 총독부

 


장기간에 걸친 외국 군대의 용산 주둔은 이 지역의 풍경을 변모시켰다. 군부대의 존재는 지역민들의 생활을 상당 부분 제약했다. 군사보호구역이 되면서 생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방 후 긴 세월이 흘렀다. 6.25 한국전쟁 직후부터 미군의  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물품들을 판매하는 보세상이 성업했고 보세 의류 등은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달러는 암 달라 시장을 만들었고 미군들의 돈을 노리는 유흥가와 각종 상가가 주변에 자리했다. 외국인들의 거리라 할 수 있는 이태원 역시 장기간 미군 주둔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용산 일대는 여러 문화가 혼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들에 의한 각종 범죄 등은 큰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긴 세월 생활상 제약이 큰 주민들의 불만도 커져만 갔다. 용산은 마치 도심 속 섬과 같은 곳이었다. 

1991년 용산 미군 골프장 부지에 용산 가족공원이 조성되고 국립중앙박물관과 전쟁기념관이 들어서면서 용산에 변화가 찾아왔다. 미군 기지 이전이 현실화되고 용산의 미군 대부분은 모두 평택 기지로 이전했다. 이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은 우리 정부의 몫이었다.

하지만 긴 세월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한 외국 군대가 떠나고 그 자리를 우리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가치가 있었다. 이에 용산 미군 기지와 그 주변을 둘러싼 활용 계획과 각종 개발계획이 봇물을 이루는 시점에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가 터져 나왔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들어온다는 건 어떻게 보면 반가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수 십 년 세월 각종 제한 사항에 묶여 있었던 지역민들에게는 걱정이 함께 하는 소식일 수 있다. 어렵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용산 주한 미군 부지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게 일을 추진하는데 따른 비판도 커지고 있다. 당장 국방부와 군부대시설 등이 이전이 일반 이사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종 첨단 보안장비와 시스템의 이전은 막대한 비용이 수반된다. 이전할 곳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전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누구도 정확한 비용과 관련해 명확한 정보를 전하지 않고 있다. 

비판의 목소리 중에는 풍수적의 필요에 의해 용산으로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대통령 당선인은 이를 일축했지만, 이와 관련한 의구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과거 외국인 주둔지로 쓰였던 아픔의 땅에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는 데 대한 목소리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과거 청와대가 일제 강점기 총독의 관저가 있었던 자리였음을 들러 발론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에 따른 역사적 의미를 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총독부 전경

 


실제 지금 청와대에는 일본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고려 시대 청와대 자리는 남경의 별궁 자리였고 조선 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후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1937년 공사를 시작해 1939년 완공해 관저로 사용했다. 미나미 지로는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총독으로 있었다. 그는 내선일체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이를  강제로 시행했다. 전후 그는 A급 전범으로 지목되어 처벌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했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불리는 이 관저를 사용했다. 그가 장기간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따른 4.19 혁명으로 물러난 이후, 경무대에 들어온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 이름을 청와대로 바꾸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1년 신관이 건축됐고 일제 총독이 사용하던 구 본관은 1993년 철거되어 사라졌다. 이후 청와대에는 국가위기관리센터가 설치되고 안보의 컨트롤 타워로서 기능했다. 

청와대는 1968년 북한 특수군으로 조직된 김신조 일당이 대통령 시해를 위해 청와대를 기습한 1.21 사태 이후 인근 지역과 산의 출입금 금지하는 등 보안을 극도로 강화했다. 이는 청와대를 국민들과 멀어지게 하고 구중궁궐이라는 비판을 받도록 했다. 경호와 보안의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청와대는 국민들과 동떨어진 외딴섬이었다.

여기에 역대 대통령 중 상당수가 암살되거나 각종 비리와 범죄로 처벌을 받는 등 어두운 말로를 보이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상징하는 곳이 되기도 했다. 최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청와대에 대항 접근성이 한층 좋아지고 인근 등산로 등이 재 개방하는 등 국민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청와대 이전에 대한 여론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긴 했다. 그 이면에는 대통령들의 비극적인 최후와 맞물리며 풍수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더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경복궁을 포함한 청와대 자리는 조선 시대 최고의 명당이었다. 북으로는 북악산이 주산이 되고 낙산은 좌청룡, 인왕산이 우백호, 남산이 안산이 되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동으로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이라 했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으로 정하는 데 있어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지형은 큰 영향을 줬다. 물론, 결정의 중요한 요인인 수도로서의 기능과 확장성 등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

 

용산 총독관저 사진

 


이런 청와대 입지가 어느 순간 흉지로 돌변했다. 북악산의 많은 돌이 풍수에서 살기가 될 수 있고 후궁들이 거주하는 7궁의 땅, 과거 궁인들의 임시 무덤과 무예 훈련장으로 사용되는 등 버려진 땅으로 흉지라는 주장도 있다. 즉, 풍수와 관련한 말들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끼워 맞추다 보면 길지가 되고 흉지가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럴리는 없지만, 청와대가 흉지라서 이전해야 한다는 논리는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또한, 문명 국가에서 풍수를 국가 정책 결정의 이유로 활용한다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청와대를 사용한 대통령들의 불행은 그들의 통치 과정에서의 위법과 권한남용 문제와 비리 등 사람의 문제였다. 자리가 좋지 않아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그 자리에 대통령의 집무실을 두고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청와대다 속한 경복궁은 일제 강점이 법궁의 지위를 잃고 각종 전각들이 해체되어 팔리는 등 원형이 크게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궁궐의 용도와 달리 박람회장으로 사용되는 일도 있었다. 총독부가 경복궁의 근정전을 막고 서는 형태로 자리하면서 일제는 풍수적인 침탈과 함께 민족정신 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0년 들어 경복궁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민족정기를 막던 경복궁이 해체되면서 경복궁은 원형을 찾아가고 있다.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공사가 필요하지만,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의미에서 계속해야 할 사업이기도 하다.

청와대 역시 그 가치가 재정립하고 여러 활용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이전보다는 청와대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한층 더 높이는 수준에서 변화를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더 큰 틀에서 지역의 균형 발전과 세종시의 행정수도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청와대와 함께 국회의 세종시 이전을 통해 세종시를 정치, 행정의 중심 도시로 서울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더 특색 있게 발전하는 큰 틀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먼 미래를 위해 고려할 만한 일이었다. 

용산과 청와대는 모두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 어느 곳에 역사적 의미가 더 크다는 논쟁을 무의미하다. 모두 일제 강점기 불행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 활용에 대해서는 무거운 역사의 무게만큼이나 신중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 결코, 누군가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의견을 듣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다수의 뜻에 따르는 게 순리다. 이는 역사의 중요한 기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훗날 청와대의 용산 이전과 관련해 역사가 어떻게 기록하게 될지 그 의미를 깊이 있게 살필 필요가 있다. 



사진 : 우리역사넷,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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