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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서남부, 영산강 하구에 자리한 목포는 1897년 일찍부터 개항한 목포항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큰 번영을 누렸다. 목포항과 호남선 철도의 종착지라 할 수 있는 목포역을 중심으로 목포는 호남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였고 1940년대 부산, 인천, 원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항구 중 하나였다. 그 이면에는 호남평야에서 나는 쌀들이 모여 일본으로 향하는 항구로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이라는 아픔도 있었다. 

해방 후 목포는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쇠퇴기를 겪었다. 수출 각종 물동량이 부산과 인천항으로 집중되고 호남 지역이 산업화 시기 크게 소외되면서 한때 전국 6대 도시의 명성도 사라졌다. 하지만 목포는 근대화 유산으로 지정된 일제 조선 말 일제 강점기 건축물이나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새로운 역사 문화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다도해 지역을 연결하는 배편의 기점으로 또 다른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 목포를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4회에서 찾았다.

목포시의 전경과 다도해 바다 풍경을 모두 살필 수 있는 목포의 명소 유달산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유달산 정상에 자리한 노적봉에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쌀가마를 얹어 놓을 듯한 지형의 노적봉에 이엉 등을 덮어 진짜 쌀가마니를 싸놓은 듯 위장했다. 이를 통해 적들이 이곳에 차고 넘치는 군량미와 병사들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여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을 느낄 수 있는 전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와 함께 정상 인근에는 목포 시내 전체에 그 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는 시민의 종이 있었다. 유달산의 기운이 모인 듯한 거대한 범종은 울림은 봄이 매우 크고 웅장했다.

 

 


그 유달산을 내려와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봄 햇살이 내리쬐는 동네를 산비탈의 동네를 찾았다. 옹기종기 오래된 집들이 모여있는 이 동네의 모습이 정겨웠다. 이 동네의 이름도 동네와 잘 어울렸다. 다순구미 마을이라 불리는 이 동네는 따뜻하다는 뜻의 지역 방언인 다순과 강가의 후미진 곳이라는 의미가 구미가 합쳐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답게 마을에는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오래된 나무에서 꽃이 피고 봄 느낌으로 마을 곳곳이 채워져있다. 그 마을 한 집에 모여있는 할머니들을 만나 마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과거 다순구미 마을을 목포항을 터전 삼아 살아간 뱃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마을이 됐다. 이후 시대 흐름에 따라 청년들이 도시로 떠나가고 이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할머니들의 이 마을의 역사를 마음 가득 품고 서로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의 북적임과 활력은 사라졌지만, 할머니들은 추억을 친구 삼아 그들의 노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한편의 말라버린 우물은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나선 길, 한적한 도로변 마을 길을 걷다  갑오징어 말리는 덕장을 만났다. 이 덕장은 10월부터 3월까지 작업을 하는데, 아주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덕장의 사장님 역시 40년 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덕장은 사장님과 함께 동네 어머니들이 세월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제 이 덕장의 사람들은 각각의 사연들을 공유하고 힘든 삶에 서로를 다독이며 이웃 이상의 존재가 됐다. 이 덕장에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했던 젊은 엄마는 이제 노년의 나이가 됐다. 그 사이 그는 주변 동료들과 덕장 주변의 마을 주민들의 격려와 도움을 받으며 힘든 시간을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이 덕장은 일을 하는 장소가 아닌 사람 사는 정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바닷가로 향했다. 목포항의 해안 길을 조업을 마치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들과 벗하며 걸었다. 그 길이 끝나갈 무렵, 어선들의 바다 조업에 필요한 각종 어구들이 가득한 한 가게를 만났다. 선구점이라고 하는 그 가게의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17살 나이에 섬에서 목포로 일자를 구하려 무작정 상경했다. 그는 선구점의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10년을 일해 돈은 모은 사장님은 자신의 가세를 차렸고 크게 성공했다. 그는 어려운 형평에 정규 학교를 모두 마치지 못했지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며 하루하루를 온 힘을 다해 살았다. 

하지만 사장님은 거액의 사기를 당하고 전 재산을 잃는 시련을 겪었다. 그 충격으로 사장님은 건강을 잃었고 한쪽 눈이 실명되는 일도 있었다. 사장님은 다시 일어섰다. 목포는 그가 다시 좌절하지 않도록 그를 보듬어주었다. 다시 선구점 일을 시작한 사장님은 이후 57년 넘게 그 일을 해오고 있다. 비록 그 중간에 큰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제는 지난 일일 뿐이다. 사장님은 오늘도 손수 어구를 손질하고 어망을 만들며 그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망과 어구와 관련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식도 가지고 있다. 여전히 그를 찾는 단골들도 많다. 사람에 큰 실망을 했지만, 노년의 사장님에게 사람은 그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었다. 

목포 시내로 향했다. 근. 현대사, 일제강점기 흔적을 담은 오래된 건물과 현대 건물들이 혼재하는 목포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그 길에 목포의 역사와 함께 하는 노포를 만났다. 1947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중국요리 식당이 그곳이었다. 식당의 사장님은 할아버지 때부터 3대를 이어가는 가업을 지키며 한자리를 지킨 식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가업을 지킨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명감은 힘든 여건에서 식당을 지켜갈 수 이는 힘이 되고 있었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이지만, 식당의 모습은 현대식으로 변호가 있었다. 하지만 벽면에 걸려있는 1960년대 메뉴 가격이 손글씨로 적혀있는 빛바랜 메뉴판은 이 식당이 역사를 말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장님은 식당의 긴 역사와 3대에 걸쳐 전해진 맛을 담은 간짜장을 오늘도 직접 요리하고 있었다. 그 맛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지길 응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유달산 자락의 오래된 마을을 찾았다. 마을의 집 담벼락 곳곳에  벽화가 문학 작품의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그 글귀는 골목길을 걷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마을은 과거 목포지역 문인들의 생가 터가 곳곳에 자리한 예술인 골목이었다. 벽면 곳곳에 자리한 글귀는 차범석, 김우진 등 근대 문학의 거장들의 글이었다.  마을 곳곳에는 문학의 향기가 가득했다. 최근에는 이 마을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지역 예술인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예향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정체성과 잘 맞는 장소였다. 

다시 목포 시내를 찾았다.  시내 길을 걷다가 오래된 빵집을 만났다. 빵집에는 넓적하게 생긴 빵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미추리 빵이라 불리는 그 빵은 그 모양이 넓적하고 투박한 게 특징이었다. 미추리라는 말은 못난이라는 의미가 지역 방언이라 했다. 

모양은 못난이지만, 이 빵은 어머니에서 아들로 그 기술이 이어진 2대에 걸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지켜진 내공이 그 빵에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몸이 아픈 아들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빵집을 시작했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어머니의 삶과 힘든 일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못난이 빵은 가족들을 지켜준 소중한 존재였다. 아팠던 아들은 건강해졌고 이제는 어머니를 이어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과거 아들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이제는 세월의 무게에 쇠약해진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다. 아들은 최고의 재료와 정성을 기울이는 어머니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긴 빵에는 특별함이 있었다.   

목포의 가장 번화가 5거리를 찾았다. 그 5거리 인근의 오래된 홍어집을 찾았다. 호남지역에서 경조사에 홍어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고 지역의 맛을 대표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목포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홍어집이 많은데 찾은 것은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이 홍어집은 목포 5거리의 변화를 함께 하며 그 역사를 쌓았다. 

 

 


이 홍어집에서는 국내산 흑산도 홍어만 취급하고 있었다. 그만큼 고가에 관리가 어렵지만, 이 집의 오랜 전통을 버릴 수 없었다. 오랜 경력의 사장님이지만, 홍어 특유의 맛을 내기 위해 여전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과거에는 손님들의 제각각의 입맛을 맞추지 못해 많은 홍어를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다져진 내공이 이 홍어집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홍어집의 사장인 어머니와 함께 홍어집을 지키는 딸이 있어 사장님은 덜 외롭게 홍어집을 지키고 있었다. 삭힌 홍어의 맛은 삶의 희로애락을 담았다고 할 만큼 그 안에 다양한 맛과 미묘한 맛이 함께 한다. 그 맛을 내는 모녀 역시 그 홍어와 함께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오래된 건물이 곳곳에 자리한 한적한 골목길을 걸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목공소를 찾았다. 일제 강점기 지어진 이 건물의 역사는 100년을 넘었다고 있다. 이 목공소에서 부부는 긴 세월 함께 일하며 살았다. 이 노부부는 건물 100년 역사 한편에서 53년 넘게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부부는 목공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부부에게는 그들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가 따로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들이 키운 손자 손녀들이 그들이었다. 목공소의 단칸방에서 자라난 손자 손녀들은 이제 장성해 모두 더 큰 도시로 떠났지만,  그들의 흔적인 목공소 곳곳에 남아있었다. 지금도 부부는 과거 사진들을 보며 흐뭇한 마음을 감추기 못했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부부에게 손자, 손녀들과 함께 한 시간은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이제 그들 품을 떠난 손자, 손녀들이지만, 부부에게는 그들의 소식과 연락이 그 무엇보다 반갑기만 하다. 내리사랑이 무엇인지 목공소의 노부부는 보여주고 있었다. 

목포는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그 발전이 더디면서 과거 대도시의 영광을 잃었다. 그 대신 과거와 현재와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가지게 됐다. 이런 풍경은 소중한 역사, 문화의 유적이 되었고 목포를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도시로 만들었다. 목포는 모든 걸 무조건 새롭게 바꾸는 게 모두 선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목포에서 그들의 역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만남은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목포가 아니어도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역사를 이어가는 모습을 더 많은 곳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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