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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북쪽의 아산만과 접하고 있는 아산시는 동쪽으로 천안시, 서쪽으로 당진시와 예산군, 남쪽으로 공주시, 북쪽으로는 안산만을 공유하는 평택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아산시의 역사는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이 통합하여 도농복합도시가 되면서 시작됐다. 아직 청년의 나이에 있는 젊은 도시다. 

아산시는 대기업을 포함해 다수의 제조업체들이 있는 제조업의 도시고 KTX 천안 아산역을 포함해 장항선 철도가 지나고 수도권 1호선의 종착역인 신창역이 있다. 이렇게 제조업과 교통의 요지인 아산시는 충남에서 천안 다음의 제2의 도시고 충청권 전체로 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도시가 됐다. 최근에는 신도시가 조성되어 점점 더 그 인구가 늘어가는 추세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 나날이 성장하는 젊은 도시 아산시를 찾아 도시의 이모저모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함께 했다. 

아산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전망대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이 전망대는 과거 쓰레기 소각장의 굴뚝이었다. 이제는 소각장이 사라졌지만, 이 굴뚝은 철거되지 않고 전망대와 전망대에 오를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아산시의 명소로 재 탄생했다. 최근 크게 주목받는 도시 재생의 중요한 예라 할 수 있었다. 

아산시의 과거가 현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장소를 찾았다. 온양온천 거리가 그곳이었다. 온양온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그 역사가 깊다. 세종대왕이 질병 치료차 이곳에 수차례 행차한 기록이 있고 그때 지어진 이름 온양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 세종대왕 이후에도 조선의 많은 임금이 온양온천을 찾았고 흥선대원군 역시 이곳에 욕실을 설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온양온천의 명성은 먼 옛날부터 아주 컸다.

 

 


그 역사적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졌다. 1960년대 부터 1970년대 까지 신혼부부의 신혼여행지로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후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달라지고 다양한 여행지와 레저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온양온천은 과거와 같이 사람들의 북적임으로 가득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온천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온천마을에서는 지하에서 온천수가 차고 넘치게 나오고 있었다. 과거에는 수도보다 온천수가 더 흔하다는 말도 있었다고 했다. 그 온천 거리에서 과거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온천 목욕탕을 찾았다. 과거 시설물과 소품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60년 넘은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잠시 온양온천의 과거 역사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봄비가 조금씩 내리는 한적한 마을을 찾았다. 길을 걷다가 식당 마당에 장독대가 묻혀있는 식당이 보였다. 식당은 할머니와 손녀가 운영하고 있었다. 4년 전부터 식당 문을 열었다고 했다. 할머니와 손녀는 어울릴 듯 아닌 듯 오순도순 식당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식당은 주메뉴는 묶은지 갈비찜이었다. 식당에서 직접 담근 2년 넘은 묶은지를 넣어 만든 갈비찜이었다. 할머니에게 이 묶은지는 특별함이 있었다. 이미 사별한 남편이 즐겼던 음식이 묵은지였다. 자연스럽게 할머니는 오랜 세월 묶은지를 담그고 요리를 했다. 그 내공이 식당에서 발휘되고 있었다. 그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묶은지는 그 남편이 남긴 유산이었다. 할머니는 그 묵은지로 요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산시의 중요한 명소를 찾았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현충사에서 잠시 그와 함께 했다. 박물관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각종 기록과 유물들을 살필 수 있었다. 그가 전투를 지휘할 때 사용했던 장군검에서 새겨진 글귀에서 장군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현충사를 나와 독특한 느낌의 마을을 찾았다. 마치 유럽 지중해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산시의 새로운 명소 지중해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과거 포도밭이었지만, 도시개발이 이루어지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마을 주민들은 뜻을 모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그 결과 그리스의 명소 산토리니에 있는 건축물 양식의 집들이 생겨났고 전국 각지에서 찾는 명소가 됐다. 

그 마을에서 한 쿠키 가게에 들렀다. 사장님은 집에서 주부로서 쿠키를 만들던 경험으로 바탕 삼아 이 가게를 열었다. 아직은 일이 서툴고 찾아오는 손님이 겁나기도 한 초보 사장님이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하루하루 일상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의 새로운 꿈을 응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아산만과 가까은 천주교 성지 중 한 곳인 공세리 성당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1894년 설립된 이 성당은 흥선대원군 집권기 있었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병인박해 때 희생된 3인의 묘가 있다. 이 성당은 이후 증축을 거듭해 1922년 고딕 양식의 근대 성당으로 완성됐다. 지금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어울리는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이런 천주교의 역사와 함께 이 성당은 조선 후기 첫 번째 신약이라 불리는 고약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 성당의 외국인 신부 드비즈 신부가 종기 치료를 위해 고안한 고약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이들에게는 큰 선물과도 같았다. 이후 고약 만드는 기술은 성당의 신자였던 한 사람에게 전수됐고 그가 이를 대중화하면서 고약 치료의 대표적 약이 됐다. 그의 이름을 딴 고약 이름은 이제 고유명사가 됐습니다. 공세리 성당에서 역사가 시작된 고약은 이후 오랜 일반 대중들에게 애용됐다. 지금은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종기 치료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 이런 고약의 역사가 유서 깊은 성당의 역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했다. 

아산시 또 다른 온천지역인 도고 온천 거리를 찾았다. 아산시에는 온양온천 외에 도고온천과 아산온천까지 곳곳에 온천이 있다. 그 온천 거리에서 부녀가 운영하는 식당을 방문했다. 그 식당은 호박국수가 주메뉴였다. 식당 사장님이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레시피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 국수는 여느 잔치국수와 비슷했지만, 국물이 거의 없고 호박이 주가 되는 독특함이 있었다. 

사장님은 그의 아내와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아픔을 마음속에 묻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슬픔은 딸도 마찬가지였다. 부녀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 식당은 가족들의 체취가 남은 소중한 공간이고 부녀가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였다. 이따금씩 먼저 떠난 가족에 대한 슬픔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부녀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슬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일상을 매일매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이 행복으로 채워지길 기원하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우리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500년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산의 전통마을, 외암마을이 그곳이었다. 외암마을은 양반들의 한옥과 서민들이 살았던 초가집들 다수가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 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곳이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대대로 이 마을을 지킨 이들이 살고 있었다. 외암마을에서 유명한 한옥 고택에 들렀다.

참판댁이라 불리는 이 고택에서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주인 연엽주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재배되는 연잎으로 주 재료로 하는 연잎주는 외암마을은 역사와 함께 하는 전통주였다. 이 연잎주는 6대 종부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종갓집 맏 며느리로 이 집에 들어온 종부는 엄한 시아버지 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다.

 

 


지금도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무섭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지만, 그 안에 자리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을 알기에 시집살이의 어려움이 이제는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다고 했다. 시아버지의 역시 며느리에 대한 칭찬에 인색하지만,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 가득 가지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내 비치지 않으면서도 각별한 마음을 안고 있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두 사람이 나란히 마을 길을 걷는 모습이 정겹게 보였다. 

여정의 막바지, 한적한 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에서 멋진 조경의 정원이 돋보이는 전원주택을 만났다. 그 주택은 노년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은퇴 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부부는 전원생활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삶을 사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이 부부는 젊은 시절부터 고단한 삶을 견디며,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았다. 그렇게 가난을 벗어났지만, 이 부부에게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던 아들이 없다는 현실은 부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아내의 슬픔이 더 컸다. 아내는 힘겨운 삶의 여정 속에 건강을 잃었고 아들을 잃은 충격이 더해졌다. 아내는 마음의 문까지 닫으며 세상과 스스로 단절했다. 이런 아내를 위해 남편은 하루하루 아내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 남편은 캠핑카를 개조해 만들어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며 아내에서 더 많은 세상을 보여주려 애쓰고 있었다. 이런 남편의 노력에 아내는 건강과 함께 마음의 문도 조금씩 열어가는 중이었다. 이 노부부의 인생의 황혼에서 더 빛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며 마을을 떠났다. 

아산시는 시의 역사는 길지 않은 젊은 도시지만, 그 안에는 오랜 역사의 장소와 흔적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과거는 현재의 삶을 살찌우고 있었다. 이런 아산시의 역사와 공존하는 이웃들은 더 나은 미래와 그들의 꿈을 위해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가고 있었다. 그들의 꿈이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길 기원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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