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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외신은 충격적인 뉴스로 일제히 보도했다. 당시 동. 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양국 정부나 관계 당국이 아닌 양 측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동독과 서독의 국민들은 장벽 위에서 함께 만나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망치와 해머, 심지어 중장비를 동원해 장벽을 부수기도 했다. 수십 년 세월 베를린을 갈라 놓았던 콘크리트 장벽은 한순간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독일은 1990년 10월 긴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통일 독일로 거듭났다. 

이런 베를린장벽 붕괴를 놓고 많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실제 베를린 장벽 붕괴는 여러 우연과 실수, 사건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동독 당국의 말실수와 이를 오해한 한 언론사의 오보, 마침 베를린 장벽 인근에서 있었던 유명 록 가수의 대형 콘서트로 인한 인파 이 한날한시에 겹쳤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는 통일을 위한 긴 노력과 국민적 공감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었다. 

베를린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은 독일 분단의 역사부터 되짚어갈 필요가 있다.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관리됐다. 이는 1945년 전쟁 후 독일 문제를 논의한 강대국들의 얄타회담이나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된 일이었다. 강대국들은 전후 독일 처리와 관련해 나치 청산과 민주화, 비무장화를 원칙으로 정했다. 이에 독일 서부 지역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각 지역을 맡아 관리했고 동부지역은 소련의 관리 체제 속에 편입됐다. 수도 베를린은 동독에 속해 있었지만, 수도로서의 상징성 등을 고려해 서쪽과 동쪽이 나누어 관리됐다. 당시는 독일의 분단을 전제로 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곧바로 찾아온 민주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시대로 찾아오며 서방과 소련으로 양분된 독일의 영토를 분할되고 말았다. 마치 해방 후 우리나라가 남쪽의 미국, 북쪽의 소련이 들어오면서 남. 북 분단이 고착화된 것과 같은 일이 독일에서도 일이었다. 이는 서독과 동독으로 독일이 양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분단 초기 동. 서독은 상호 인적, 물적 교류가 이어지며 분단을 실감할 수 없었다. 이후 서독 지역을 관할하던 서방 진영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별도 경제권을 만들자 이에 대응해 동독 지역을 관할하던 소련 역시 같은 화폐개혁으로 맞섰다. 이후 양 진영의 갈등 속에 동. 서독의 관계도 냉각됐다. 

소련은 동독의 서독과의 교류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서베를린 봉쇄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서방은 대규모 항공 지원으로 서독에 각종 물자를 공급하며 맞섰다. 무려 11개월 동안 계속된 서베를린 봉쇄는 해제됐지만, 동. 서독을 둘러싼 서방과 소련의 갈등은 더 심화됐다. 결국, 1949년 서방의 지원을 받는 서독 지역에 민주주의 서독 정부가 들어섰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동독 정부가 들어서며 독일의 동. 서 분단은 공식화됐다. 

분단된 서독과 동독을 둘러싼 서방과 소련의 대응 방식은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의 재건을 위한 마셜플랜을 실시하며 유럽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 서독 역시 그 안에 포함됐다. 미국의 지원 속에 서독은 전후 복구의 경제 발전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독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반면 동독을 관할한 소련은 동독에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된 독. 소 전쟁의 전후 배상 책임을 안겼다. 소련은 배상의 명목으로 동독 내 각종 산업 생산시설과 설비를 소련으로 이전했다. 이는 동독 지역의 경제를 침체시키는 원인이 됐다. 실제 동독 국민들은 지속적인 생필품 등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서독과의 생활 격차가 크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는 동독 주민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가속화했다. 많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에 동독 정부는 1952년 접경지 지역에 철조망을 설치하거나 장벽을 설치하며 동독 주민들의 서독 탈출을 막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독 정부는 점점 강하게 국민들을 통제하고 동독의 공산화를 급속히 진행했다. 소련을 모델로 한 계획경제와 집단농장 체제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대한 동독 국민들의 저항도 점점 거세졌다. 

1953년 동독에서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강하게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점점 민중봉기 형태로 발전했다. 동독 정부가 이를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소련군이 개입했고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이후 동독의 국경 봉쇄를 더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철조망은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바뀌었고 그 장벽은 이중 삼중의 경계 시스템이 더해졌다. 동독은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그들만의 세계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동독 국민들의 탈출은 계속 이어졌다. 열기구를 이용하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치적 자유 등이 박탈된 상황, 비인권적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동독 국민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에 동독 정부는 슈타지라는 정보기관을 이용해 국민들을 통제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다. 슈타지는 다수의 비밀 요원을 보유했고 동독 국민들의 일상을 감시했다.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등의 일도 했다. 감시 대상자는 계속된 감시와 협박, 거짓 소문, 각종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사상범에 대해서는 별도의 감옥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동독의 공산당 정권은 사회 전반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슈타지의 활동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는 시점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런 동독의 움직에 맞서는 서독 역시 냉정시대의 경직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후 서독의 대표적 정치가 아데나워는 독일에서 서독을 유일한 국가로 규정하고 동독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 동독 강경책을 유지했다. 이와 관련한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이에 동독은 공산주의 체제를 더 공고히 하며 맞섰다. 동. 서독은 냉전시대 최 일선에서 맞섰다.

 



1969년 서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 서독에는 진보적 사고와 사상이 크게 대두되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진보적 정당인 사민당의 집권으로 이어졌고 그 중심에는 빌리 브란트가 있었다. 빌리 브란트는 지지부진하던 나치 청산을 강력히 추진하는 가 하면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에 헌화하며 그 유명한 역사적 무릎 꿇기를 하며 적극적인 사죄를 표현했다. 이후 서독은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이와 함께 대 동독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정책도 변화를 가져왔다. 동방정책으로 대변되는 이 정책은 대 동독 유화책으로 동독에 대한 지원을 통해 인적, 물적 교류를 이끌어내고 평화 분위기를 조성토록 했다. 과거 우리나라 김대중 정부의 대 북한 햇볕정책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정부는 동독 내 반체제 인사들, 정치범에 대해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고 그들을 석방토록 하는가 하면, 교통 통행 협정과 교류 확대를 이끌어냈다. 

1972년에는 기본 조약을 통해 동. 서독의 자결권을 상호 인정하고 우호관계 조성을 명문화했다. 인권존중의 바탕 위에 인적, 물적, 문화 교류가 더 확대됐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실용주의와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를 힘으로 붕괴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강대강의 대결이 결코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을 했다. 오히려 그는 공산주의 서독이 동독의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게 이상주의라 여겼다. 상호 교류와 평화체제 유지가 서독에 더 이익이 된다고 여겼다. 계속된 대립은 군비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고 긴장관계를 경제에도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빌리 브란트의 과감한 동방정책은 동. 서독 관계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됐다. 그 과정에서 빌리 브란트의 측근 중 한 명이 동독 정보기관 요원임이 밝혀지고 그에 의해 많은 국가 기밀이 유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 여파와 사생활 문제 등이 겹치며 빌리 브란트가 총리직에서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에서 시작된 동방정책은 이후 보수정당에서도 계승되어 더 발전됐다. 초기 이에 반대하던 세력들조차 이에 동조했다. 그만큼 긴장완화와 평화체제가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는 효과를 체득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평화체제는 동독 국민들에게 서독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심을 더 크게 했다. 현격히 차이가 나는 생활수준과 서독의 발전된 사회, 정치 체제와 동독은 크게 대조적이었다. 동독 국민들은 민주화가 진행 중인 동유럽을 경유해 서독으로 입국하는 방식으로 동독 탈출을 하기 시작했고 그 숫자는 매년 크게 늘었다. 특히,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은 서독행을 원하는 동독 국민들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했다. 체코 정부는 이에 대해 특별한 제재를 하지 않았고 서독이 동독 국민들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많은 동독 국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런 동독 탈출 러시를 동독 공산당 정권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에 동독 내에서는 서독으로의 여행 자유화를 넘어 민주화 촉구 시위가 확산됐다. 이는 반 공산당 시위로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더했다. 마침 그 시기는 소련이 붕괴되는 시점으로 소련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동독 정부는 더는 힘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 동독 정부는 유화책을 꺼내들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공산당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견에서 동독 공산당을 시위대가 요구하는 여행 규제 완화를 발표했다. 여권 발급 기간 단축 등 여행법 일부 완화가 골자였지만, 공산당 대변인은 내용을 완벽히 숙지하지 못했고 여행 자유화로 발표했다. 이는 자유로운 국경 개방과 통과로 언론에 의해 보도됐다. 단순한 말실수였지만, 그 파장을 상당했다. 여기에 한 이탈리아 언론이 베를린 장벽 철거하는 엄청난 오보를 냈다.

하지만 그 오보는 다른 큰 언론사들이 인용하면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이는 동독 민주화 시위대를 더 강하게 자극했다. 때마침 베를린 장벽 인근 서독 지역에서 유명 록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이 있었다.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서독 국민들이 몰렸고 동독 국민들 역시 공연 소리를 듣기 위해 장벽 주변으로 몰렸다. 그런 인파 속에 베를린 장벽 철거의 소식이 전해지자 대중들을 크게 동요했다. 

 

 


동. 서독의 국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서독 국민들은 하나  둘 장벽 위로 올라갔다. 이에 동독 국민들도 동참했다. 이를 막아야 할 동독 군인들을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다. 동독 공산당 역시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몰려든 동. 서독 국민들은 어느새 하나가 됐다. 몇몇 동독 국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에 다른 이들도 동참했다. 수십 년 세월 동. 서독 국민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일반 국민들의 손해 해체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동독 군인들을 이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후 국경 검문소는 자연스럽게 파괴되고 베를린 장벽도 사라졌다. 동독 국민들은 자유롭게 서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이에 서독 정부는 방문한 동독 국민들에게 축하금을 지급하며 그들을 환영했다. 동독 국민들의 서독 방문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됐다. 통일에 대한 열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이제 독일 통일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 및 주변 강대국들과의 협의와 동의가 필요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고 그런 독일을 경계하는 시선이 여전했다. 특히,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하게 나치 독일과 대결했던 영국의 반대도 강했다. 소련 역시 서독의 동독 흡수 통일에 대한 반감을 보였다. 

동. 서독 주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하는 2+4 회담이 열렸고 1년여의 협의 끝에 독일은 강대국들의 도의를 얻어냈다. 오랜 세월 지속한 나치 청산과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전후 배상 등을 통해 쌓아온 신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대국이 된 독일의 경제력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대. 내외적으로 인정을 받은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을 선포했다. 독일의 공산주의 체제는 붕괴됐고 서독에 의해 돈독히 흡수되는 형식이었다. 

 

 


이후 독일은 막대한 통일 비용과 동. 서독 주민들 간의 통합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유럽의 선도 국가로 발전했다.  독일은 EU의 핵심 국가로 유럽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고 난민 문제 등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며 인도적 정책을 선도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진보와 보수 정권 가리지 않고 꾸준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은 불과 1년 사이 벌어진 일이지만, 긴 분단의 역사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함께 하며 이뤄낸 결과물이었다. 특히, 서독은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정책을 정파적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계승해 통일로 가는 문을 열었고 통일과 관련한 난관을 극복했다. 이를 위해 서독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평화가 국익이라는 공감대가 유지되며 통일 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노력은 장기적이었거 강한 인내심으로 지속됐다. 

독일의 사례는 여전히 남과 북이 긴장 속에서 대치하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화는 대립보다 훨씬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지만, 그동안 많은 집권층과 정치세력들은 대결과 긴장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들에게는 이익이 생겼을지 모르지만, 남북의 긴장관계는 국가적으로 불필요한 자원을 낭비하게 했다. 

남북 분단의 상황의 평화체제로 전환된다면 긴장 관계 속에 매몰된 비용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나라가 더 발전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통일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서독은 동방정책을 이어가면서 꾸준히 통일을 대비했고 통일의 기회를 그들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과연 우리는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는 통일의 기회를 우리 것으로 온전히 만들 수 있을지 독일 통일 과정은 그 점에서 면밀히 분석하고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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