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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에 자리한 나라 캄보디아는 고대 유적지 앙코르와트로 대표되는 나라다. 9세기부터 캄보디아 일대에서 번성한 크메르 왕국이 번성하던 12세기 경 건설된 불교 사원으로 알려진 앙코르와트는 그 규모나 건축 기술 등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래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전 세계 여행자들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캄보디아를 넘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캄보디아 국기에도 앙코르와트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불교 사원 유적이 있는 캄보디아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지만, 불과 50여 년 전 캄보디아는 끔찍한 살육과 학살의 현상이었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과 이어진 공산혁명과 내전, 급진 공산주의 세력 집권기를 거치면서 나라는 황폐해지고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1975년과 1979년 사이 캄보디아의 집권 세력이었던 크메르루주에 의해 자행된 민간들에 의한 학살과 탄압은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 기간 10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전 전쟁 등과 합치면 캄보디아 인구의 1/4 이상이 사망했다는 추정도 있다.  이 기간 캄보디아는 죽음의 땅 '킬링필드'로 불렸다. 극단적인 야만과 비 이성이 지배하는 캄보디아의 아픈 이야기는 1985년 제작된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런 캄보디아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의 역사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캄보디아는 비옥한 토지와 열대 기후와 함께 대표적인 쌀 생산지고 오래전부터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지금도 캄보디아 경제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다. 

 

 

앙코르와트

 


캄보디아는 9세기 경부터 크메르 왕국이 강성해지면서 캄보디아를 넘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그 위세는 수백 년간 지속됐다. 하지만 15세기 경부터 캄보디아는 주변의 강국인 태국과 베트남 세력에 밀려 그 힘이 쇠퇴했고 영토도 점점 줄어들었다.

17세기 베트남이 남부 지방을 장악하면서 캄보디아는 지금의 영토로 축소됐다. 이후에도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압력과 대결 구도 사이에 놓이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세이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라오스 지역을 포함한 인도차이나반도에 진출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 편으로서는 태국과 베트남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의 존립을 위해 식민지를 자초한 면도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후 변화를 맞이했다. 식민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독립 러시가 이어지는 가운 데 캄보디아도 1953년 국왕이 있는 입헌군주국으로의 독립을 선언했다. 초대 왕으로서는 시아누크가 즉위했다. 시아누크는 프랑스의 지지 속에 왕위에 올랐지만, 독립을 이끌었다. 이는 그는 훗날에도 캄보디아의 독립 영웅으로 남아있다. 

시아누크는 왕보다는 정치가로서 권력의지가 강했다. 그는 입헌 군주제 국가의 상징적인 왕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고 정치가로 변신했다. 그는 총리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장기 집권과 함께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대외 정책에서 베트남 당시 북베트남 편에 섰다.

그는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고 호찌민 루트로 불리는 북베트남과 남 베트남의 공산주의 무장세력 베트콩의 연결로를 제공했다. 이 호찌민 루트는 미국에는 매우 성가신 존재였다. 결국,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 전쟁과 무관한 캄보디아의 동부지역을 폭격했다. 단기간에 수천 회의 폭격이 이루어졌고 폭격을 받은 지역은 일대가 초토화됐다. 캄보디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시아누크의 권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일대 농촌 풍경

 


이는 내부의 반발과 함께 군부의 쿠데타로 연결됐다. 시아누크가 해외 순방을 하는 사이 론놀 장군이 이끄는 캄보디아 군부세력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전 승리를 위해 캄보디아와 북베트남의 관계를 끊어야 하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이렇게 캄보디아의 권력을 장악한 군부정권이었지만, 강력한 친미 성향이라는 점 외에 나라의 각종 현안에 대한 대응과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국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캄보디아 동부를 폭격했다.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연결 루크를 차단함과 동시에 베트남으로부터 캄보디아로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미국은 무려 수만 회에 걸쳐 캄보디아 지역에 폭격을 단행했고 막대한 민간이 피해가 뒤따랐다. 친미 정권이 들어서며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줄 알았던 캄보디아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론놀 정권은 이런 상황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국토가 황폐해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사이 캄보디아의 국토는 더 파괴되어 국가의 중요한 산업기반이 농업도 붕괴됐다. 국민들의 생활을 더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론놀 정권의 미국의 지원 속에 자신의 부를 축전하는 등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했다. 집권세력을 부정부패로 패망의 길을 앞당긴 베트남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극단적 성향의 공산주의 단체의 세력이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의 군부정권에 대한 반감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 극단적 성향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폴 포트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지지세를 확산했다. 결정적으로 해외 망명 중인 시아누크 국왕의 지지를 얻으며 캄보디아에서 그 더 큰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시아누크는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해 군대가 필요했고 크메르루주는 그들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권위가 필요했다. 

크메르루주의 세력은 급속히 팽창했다. 캄보디아 국민들도 이들을 지지했다. 크메르 루주와 론놀의 군사 정권사이 치열한 내전이 전개됐다. 외부의 지원도 내전을 더 키웠다. 공산주의 진영은 크메르루주에 민주주의 진영은 론놀 정권을 지원했다.

 

 

폴 포트 - 위키백과

 


두 정치 세력 간의 치열한 내전은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하게 했다. 특히, 양 진영은 수백만 개의 지뢰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하며 맞섰다. 캄보디아는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지뢰가 매설된 나라가 됐다. 그 지뢰들은 아무 계획도 없이 뿌려지듯 살포된 탓에 사후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뢰에 의한 민간이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뢰 피해자가 발생하는 나라다. 세계 각국에서 공급된 지뢰, 특히, 손과 발에 장애를 불러오는 대인 지뢰의 피해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고 현재진행형의 비극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치열했던 내전은 베트남 전쟁의 종전과 미국의 철수로 인해 크메르루주 쪽으로 힘이 균형이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론놀 정권은 붕괴됐고 론놀은 망명길에 올랐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크메르루주는 민주 캄푸치아를 건국했다. 캄보디아 국민들인 이제 전쟁이 없는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크메르루주의 집권은 더 잔혹한 시간이 시작이었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이상향 건설이라는 목표에 빠진 크메르루주의 지도가 폴 포트의 그릇된 가치관과 역사관, 편협함, 그리고 잔혹함은 캄보디아 국민들을 더 큰 비극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폴 포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캄보디아의 상류층에 속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집안이 왕족과 연결된 탓에 캄보디아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고등교육을 받았다. 또한, 프랑스 유학길에도 오를 수 있었다.

기득권 중의 기득권, 상위 몇 %의 부를 가진 집안의 아들이었던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프랑스 유학중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이에 심취했다. 그는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 두 독재자의 열렬한 신봉자가 됐다. 일반 국민들의 삶과 나라의 상황을 새롭게 보고 사회 변화를 추구한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는 그가 원하는 부분만을 보고 잘못된 신념을 가지게 됐다. 이는 극단적 공산주의 사상을 캄보디아에 도입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후 캄보디아로 돌아온 폴 포트는 공산주의 무장 세력은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가 됐고 내전 승리 후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후 집권한 폴 포트 정권은 당장 긴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를 재건하고 국민들을 빈곤에서 구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특히, 식량 부족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폴 포트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강력한 중농주의를 지향했다. 그러면서 집단농장 체제와 계획경제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경제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 경제정책은 이미 소련과 중국에서 큰 실패를 경험한 정책이었지만, 폴 포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중요한 후원자인 중국마저 급격한 추진을 만류할 정도였다. 

폴 포트의 공산화 정책은 거침이 없었다. 1975년 캄보디아 역사 원년을 선언한 폴 포트는 기존의 전통과 역사를 모두 새롭게 하려 했다. 국가의 강력한 대 국민 통제를 실시했다. 국민들은 동일한 의복과 두발, 생활을 강요받았다. 화폐는 철폐하고 중앙은행도 사라졌다. 나라 전반에 자본주의 요소를 모두 사라지게 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삶은 극단적 평등으로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국민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다. 

폴 포트는 이에 머물지 않고 더 강력한 중농주의를 진행했다. 그는 도시 지역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농촌지역의 집단농장 등으로 배치했다. 수도 프놈펜을 포함한 캄보디아 도시인들은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고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 그들은 대부분 걸어서 이동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에 포함됐다. 병원의 환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이에 불응하는 이들은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한 떼 동남아시아의 파리라 불렸던 수도 프놈펜은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지금의 프놈펜 전경

 


끝나지 않은 장거리 이동에 다수의 국민들이 병이나 굶주림 속에 사망하기도 했다. 농촌에 도착한 이들은 대부분 집단농장에 소속된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도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모든 것이 소위 대약진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반동분자로 낙인 찍힌 이들은 숙청당했고 국민들은 강력한 통제 속에 살아야 했다. 

폴 포트는 도시인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시인들의 반 공산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자본주의에 물든 이들이라 여겼다. 그는 농촌지역 국민들은 일반 인민, 도시지역 국민들은 신인민으로 구분했다. 신인민들은 교화의 대상이고 미약한 존재로 여겼다. 도시인들의 강제 위주로 폴 포트의 왜곡된 생각이 불러온 측면이 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 정권은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더 촉진하려 했다. 그들은 국민들의 생각 자체를 개조하려 했다.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부정하고 어린아이들을 어려서 부터 부모에게서 불리하고 교육했다. 아이들은 극단적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했다. 그들은 폴 포트 정권의 전사로 키워졌고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집단 농장의 관리자로 활용됐다. 감정과 감수성, 공감 능력을 잃은 아이들은 마치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됐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폴 포트 정권은 자본주의의 물이 들었다 판단되는 이들에 대한 숙청과 학살을 본격화했다. 폴 포트 정권은 지식인들이 정권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세력으로 여기고 혐오했다. 그런 부류에 속하는 학자, 교육자, 공무원, 교사 등이 숙청되고 학살됐다. 심지어 손에 군살 등 노동의 흔적이 없는 자, 안경을 쓰는 자, 글을 아는 자들도 학살 대상에 포함됐다. 이에 캄보디아 국민들은 살기 위해 교육을 받았던 사실을 숨기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폴 포트 정권은 심지어 체육인과 문화, 예술 종사자들도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폴 포트 정권 기간 캄보디아는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문제는 이런 기준이 모두 자의적이고 폴 포트에 의해 결정됐다는 점이었다. 또한, 매우 위선적이었다. 폴 포트를 포함해 정권의 실세들은 대부분 상류층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유학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기준이라면 가장 먼저 처단되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폴 포트 역시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고 이름조차 미국식이었다. 그들의 지식인 등에 학살이 얼마나 명분 없고 광기에 휩싸인 무모한 행동이었는지 알 수 있다. 

폴 포트 정권은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들 정권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최고의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사상 구현을 목표로 했지만, 폴 포트 정권은 소수의 그룹이 특권층을 형성하고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 나라에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명시했지만, 강력한 철권통치에 독재 정권을 지향했다. 

 

강제 수용소 사진

 


폴 포트 정권의 만행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 강제 수용소를 세웠고 숙청 대상자들을 수용했다. 그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첩자임을 자백하라는 강요와 함께 극심한 가혹행위와 고문에 시달렸다. 상당수는 고문 과정에서 사망했다. 고통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이들은 곧바로 처형됐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는 강제 수용소였다. 그렇게 사망한 이들은 수용소 또는 인근에 암매장됐다. 이 수용소의 참상은 극적으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화가의 그림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더 악랄했던 건 수용소에 수용된 이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즉, 반정부 활동과 전혀 무관한 무고한 이들이 큰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이런 잔혹한 공포 정치를 자행한 폴 포트 정권은 그들의 목표로 했던 중농주의 경제정책도 실패하며 캄보디아의 경제를 더 후퇴시켰다. 폴 포트 정권은 집단 농장 운영을 통해 식량 생산을 수 배로 늘리길 기대했지만,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무사안일, 계획경제의 한계성으로 오히려 농업생산이 더 후퇴하고 말았다. 누구나 함께 잘 사는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는 모두가 빈곤하고 굶주려야 하고 특권층들만 행복한 사회로 변질됐다. 폴 포트 정권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강력한 통제와 대규모 학살 등으로 힘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정권을 유지했다. 

이런 폴 포트 정권의 행태는 자국 내는 물론이고 같은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왔다. 폴 포트에 대해서는 히틀러, 스탈린과 함께 최악의 학살자라는 불명예가 더해졌다. 

결국, 그들의 권력도 영원할 수 없었다. 폴 포트 정권의 학살은 캄보디아 인들을 넘어 인근 국가 국민들까지 그 범위가 확대됐다. 이는 인근 베트남까지 영향을 미쳤다. 폴 포트 정권은 자국 내 베트남인들의 학살에 이어 국경지역 베트남인들의 학살까지 자행했다. 폴 포트 정권은 이미 수백 년 전 베트남이 차지했던 과거 캄보디아 남부지역 영의 탈환을 천명하며 베트남과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베트남을 자극했다. 1978년 베트남은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내 반 크메르루주 세력과 연합해 폴 포트 정권을 압박했다. 베트남전 등을 통해 정예화 된 베트남군을 폴 포트의 캄보디아 군이 당해낼 수 없었다. 1979년 폴 포트 정권이 붕괴되고 친 베트남 정권이 수립됐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 세력은 이후 태국 국경지대로 이동해 게릴라전을 하며 저항했다. 

여기서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베트남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미국이 크메르 루주 세력을 지원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유대관계를 이어온 중국도 그 지원에 합세했다. 미국과 중국의 지원 속에 크메르 루주는 국제사회에서 캄보디아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을 받았다. 마침 베트남의 당시 중국, 미국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최악의 학살 정권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원한다는 건 매우 부도덕한 일이었다. 

 

캄보디아 국기

 


이에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 정권이 자행한 학살과 반인권적인 범죄들을 국제 사회에 알리며 여론전을 전개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산재한 학살자들을 암매장 지역을 발굴하고 강제 수용소의 실상을 공개했다. 이는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비로소 폴 포트 정권의 만행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 세력은 여전히 그 힘을 유지했고 무장 투쟁을 지속했다. 베트남이 철군하고 1991년 파리 평화조약을 통해 내전 종식의 실마리가 풀렸다. 유엔 주도하에 새로운 정부 구성과 총선이 이루어졌지만, 크메르루주는 이에 참여하지 않고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이에 미국도 크메르 루주를 더는 지원하지 않았다. 1993년 총선 후 캄보디아에는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입헌 군주제의 정치 시스템이 다시 가동됐고 해외 망명 중이었던 시아누크 국왕도 복귀했다. 크메르 루주의 존립 기반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크메르 루주 세력 상당수는 저항을 멈추고 투항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세력들도 긴 전쟁에 지쳐 분열 양상을 보였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폴 포트는 부하들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수감되지 않았고 연금 상태에서 1998년 4월 돌연 사망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폴 포트의 시신은 각종 쓰레기와 함께 소각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후 크메르 루주 조직은 와해되고 소멸됐다.

최악의 학살자 독재자였던 폴 포트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만 했다. 수백만 명의 캄보디아 인들이 사망하고 고통 속에 살도록 한 악행을 저지른 폴 포트는 사실상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에는 모두 경건함을 가져야 하지만, 전혀 그럴 수 없는 인물이 폴 포트였다. 이후 뒤늦었지만, 폴 포트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뒤늦게 재판을 받고 단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캄보디아 정부는 여전히 폴 포트 시대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캄보디아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겪었지만, 여전히 최빈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다수의 국민들의 문맹일 정도로 사회 시스템 자체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과거 전쟁의 후유증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 정권은 1985년부터 집권한 훈센 총리가 장기 집권하고 있고 폴 포트와 다른 온건파였지만, 크메르 루주 출신들도 다수 정권 포함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다. 사회 민주화는 더디고 부정부패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이런 상황은 폴 포트 시절 크게 후퇴한 나라의 상황을 개선하는데 큰 짐이 되고 있다. 인근의 베트남과 태국이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직은 캄보디아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에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계속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과거사의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다. 

'킬링필드'의 비극은 한 나라의 리더가 잘못된 사고와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 나라가 얼마가 불행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는 캄보디아의 비극이 아니었다. 현대사 속에서 나치 독일의 만행이 있었고 유고 내전의 인종청소도 있었다. 가깝게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 소식이 들리고 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나라의 국민들은 보호하고 지켜야 할 국가의 폭력으로 자국민들이 고통받고 희생됐다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그런 일이 있었고 제주 4.3 사건도 국가의 폭력으로 국민들이 희생된 일이었다. 이런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제대로 단죄 받지 못하고 그 진상과 진실이 왜곡되고 숨겨지는 현실도 안타깝기만 하다. 이는 이념과 정치적 유불리 등을 떠나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폴 포트 정권의 만행은 한때 공산주의의 잔혹함을 교육하는 데 중요한 사례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그들이 만행을 제대로 알린 게 베트남이었고 폴 포트 크메르루주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권의 재탈환을 노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인권은 언제든 무시될 수 있다는 냉혹하고 잔인한 국제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라 할 수 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 정치의 발전과 시민들에 의한 권력 통제다. 이는 고도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보다 많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된다. '킬링필드'의 비극은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그 피해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현재 진행형의 비극을 결코 잊지 말고 이른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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