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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근대 문화유산과 관련해 관심이 커지고 있다.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지어진 건축물을 시대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한 상당수 건물들과 유적은 도시개발 과정에서 파괴되고 사라졌다.

뒤늦게 그 가치를 인식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이 시작되면서 각 지역에서 그동안 방치되거나 몰랐던 근대 건축물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자리한 앨버트 가옥 '딜쿠샤'는 최근 근대 건축 문화재로 등록되고 그 원형이 복원되어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딜쿠샤의 본래 주인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영국인 아내 메리 테일러의 집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당시로는 아주 고급스럽고 화려한 서양식 주택이었다. 1923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24년 완공됐고 독립문 인근의 언덕에 지어져 서울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1926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930년 재 건축되었다고 전해진다.

 

과거 딜쿠샤 사진 - 서울역사 박믈관

 

앨러트 테일러 - 국가문화유산포털

 

 

 

건물 외관

 

 

초석

 

 

1층 응접실

 

딜쿠샤라는 말의 뜻은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이상향이라는 의미가 있고 이 집을 지은 테일러 부부가 인도 여행 중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딜쿠샤는 근대 건축의 흐름을 알 수 있어 건축자적 가치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의 생가로 추정되고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인근 수백 년 된 수령의 은행나무가 이 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집은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살던 외국인의 집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집 주인인 앨버트 테일러가 역사의 중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우리 근대사 속 건축물로 그 의미가 더해진다. 

앨버트 테일러는 조선에 광산업자와 무역업자로 들어왔다. 한 마디로 영리 목적으로 입국한 미국인이었다. 아울러 그는 미국 언론사인 AP 통신의 특파원이기도 했다. 특파원이긴 했지만, 주업은 아니었고 지금의 통신원 정도의 역할을 했다. 

 

 

1층 응접실 소품들

 


1919년 3.1 만세운동은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당시 그의 아내는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었다. 마침 그 병원에는 3.1 만세운동을 위한 독립선언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보관하던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가 입원해 있던 병실에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겼다. 마침 그 독립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가 발견했다.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앨버트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AP 통신의 연락망을 통해 해외로 반출했고 3.1 만세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가 우리 독립의 의지를 이해하고 했건 안 했건 그의 행동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대외에 알리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는 앨버트 테일러는 우리 독립운동의 협력자로 변신했다. 3.1 만세운동 기간 일제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여 알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에 그는 일제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고 가택 연금 상태에 있기도 했다. 

1942년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침략에 이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미국과 적대 관계가 되자 앨버트 테일러 가족은 강제 추방되고 말았다. 이후 딜쿠샤는 그의 동생이 잠시 관리하다 다른 이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앨버트 테일러는 딜쿠샤로 돌아오지 못했다. 앨버트 테일러는 1948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앨버트 테일러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우리나라에 묻혔고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잠들어 있다.  그의 부인 매리 테일러 역시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 시절, 딜쿠샤의 역사 담긴 자료

 

 

2층 응접실

 



이렇게 주인이 없어진 딜쿠샤는 한때 자유당 국회의원 조경규의 소유로 있다 그가 부정축재자로 되어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국가 소유가 되기도 했다. 국방부 관련 기관이 이 건물을 사용하다 그 기관이 떠나면서 방치 상태에 있었다. 이후 이 건물에는 인근 주민들이 점유하여 10여 가구가 수십 년간 이곳에 살았다. 그렇게 딜쿠샤는 본래 용도와 달리 이용되면서 그 존재도 퇴색됐다. 

이 건물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건 건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이 건물을 찾았고 2006년 한 방송국의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딜쿠샤 찾기 여정이 방송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이를 통해 딜쿠샤의 가치와 재 조명되고 복원을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이후 이 건물을 점유하고 있는 거주민들과의 협상이 타결되어 그들이 퇴거하고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의 딸 제니퍼 테일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 조부모인 테일러 부부의 유품과 사진, 각종 자료들을 기증하면서 복원 작업에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집 안팎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딜쿠샤를 복원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됐고 일제 강점기 건축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모저모

 

 

그 때 그 모습

 


사진들을 근거해 당시 집의 모습을 재현했고 당사 사용하던 가구나, 집기 등을 그에 맞게 구입해 비치했다. 당장 사용해도 될 정도였다. 

물론, 복원과 관련해 문화재의 시대 흐름 속 변화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과거 흔적을 모두 지운 채, 사실상 인테리어를 새롭게 한 방식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 딜쿠샤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과거 모습을 재현하긴 했지만,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건물의 이력이나 생활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딜쿠샤는 사라져가는 근대 문화유적의 복원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주택가 한가운데 이런 건축물이 있고 조화를 이룬다는 점도 이채롭고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딜쿠샤를 방문하는 이들은 일제 강점기 시대상과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알 수 있다. 앞으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그 가치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어렵게 원형을 되찾은 딜쿠샤가 앞으로 가치있게 활용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떠나며



참고로 딜쿠샤 방문은 인터넷 서울시 공공예약 사이트를 https://yeyak.seoul.go.kr/ 통해 가능하다. 건물에 주차는 불가능하다.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인 만큼 방문 인원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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