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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동남부에 자리한 광양시는 서쪽으로는 순천시, 남쪽으로는 여수시, 북쪽으로 구례군과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하동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도시 광양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있어 공업도시 이미지가 강하다. 

광양은 삼국시대 마한의 일부였고 고려 시대 광양으로 불렸다. 그만큼 지역의 역사가 깊다. 광양시는 과거 광양군이었다 그중 일부가 동광양시로 분리됐고 1995년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하여 도농 복합 형태의 지금의 광양시가 됐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2회에서는 이 광양시를 찾아 도시의 이모저모와 살마들을 만나 그들의 예기를 들었다. 

여정의 시작은 바다 풍경이 함께 하는 산책로에서 시작했다. 특히, 지역의 명소가 된 도보교가 인상적이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도보교는 걷는 재미를 더했다. 그 도보교에서 보는 화창한 날의 바다 풍경은 지금이 봄의 절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양시의 유일한 섬인 배알도 역시 이 도보교로 연결되어 있어 광양의 바다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장소를 옮겨 섬진강 변에 마련된 자건거 길을 자전거와 함께 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과 하동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자전거 라이딩은 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그 길에 봄을 즐기는 시민들과 만났고 빨간 우체통 모양의 재미있는 화장실도 만났다. 이 자전거 길은 임실에서 광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의 일부로 지역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찾았다. 광양의 백운산 자락의 마을로 향했다. 그 마을 길을 걷다가 작은 노포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붕어빵을 만들고 있었다. 사장님 말로는 50년 넘게 붕어빵을 만들어 팔았다고 했다. 그의 붕어빵에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쑥이 들어가 있었다. 쑥 붕어빵은 사장님이 수작업으로 만들어내는 붕어빵의 독특한 맛을 내는 요소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이어온 붕어빵에는 수십 년 내공과 사장님의 인생이 담겨있었다. 그는 생계의 어려움으로 노점으로 붕어빵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이제는 노년이 된 그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 

 

 


그 사장님의 붕어빵은 수많은 단골들이 찾는 지역의 먹거리가 됐다. 단골손님들이 사장님에게 전해준 그림과 격려문은 이제 이 가게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 그리고 또 한 사람, 3년 전 베트남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사장님의 큰 힘이 되고 있다. 아직 며느리는 한국말이 다소 서툴지만, 빠르게 기술을 배우고 50년 붕어빵 가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장님과 며느리는 그 누구보다 강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광양 쑥 붕어빵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광양은 작은 포구를 찾았다. 바다 풍경을 따라 걸으니 가을을 대표하는 생선인 전어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포구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전어 축제를 한다고 했다. 코로나 제한이 풀리고 올가을에는 사람들로 북적일 포구의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에서 오래된 횟집이 보였다. 마침 사장님이 섬진강의 명물 재첩을 손질하고 있었다. 40년 넘은 노포인 횟집에는 많은 단골들이 찾는 물회와 함께 재첩국수로 만날 수 있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광양과 딱 어울리는 메뉴 조합이었다. 

이 횟집의 사장님은 먼저 횟집을 열고 운영하던 시어머니의 일을 도와주면서 횟집과 인연을 맺었다. 주말을 이용해 일을 도와주다 점점 일을 버거워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함께 일하게 됐다. 이제는 노환으로 병약해진 시어머니를 대신해 식당을 책임지고 있다. 사장님은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는 것에 더해 자신만의 메뉴를 개발해 제공하고 있었다. 그렇게 40년 횟집은 많은 이들이 찾는 지역의 맛집이 됐다. 

사장님은 횟집이 자신의 원했던 인생의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너무 편하기만 하다. 남편도 이런 아내와 함께 식당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팔순의 시어머니는 가끔 사장님 부부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고 식당 이야기를 함께 하며 노년의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식당과 사장님 부부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 있었다. 이렇게 식당의 맛은 그들의 인생과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포구 인근에 역사적 장소가 있어 찾았다. 윤동주의 길이 그곳에 있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윤동주의 길 끝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정병욱 가옥에 답이 있었다. 정병욱은 국문학자이자 민속학자 수필가였다. 그는 생전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는 어려웠다. 정병욱은 광양의 고향집에 이 원고를 가져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 원고를 항아리에 넣어 마룻바닥 아래 숨겼고 그 작품을 보존할 수 있었다. 마침내 해방 후 윤동주의 작품집이 나올 수 있었고 윤동주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정병욱 가옥은 그런 윤동주의 삶이 담긴 곳이다.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였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도시로 나가야 하는 주민들에게 이 버스정류장은 세상으로 나가는 일종의 통로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무작정 그 버스를 탔다. 그곳에서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르신들을 아주 살갑게 대하는 여성 운전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남편이 일하는 버스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했고 마을버스 운전기사를 거쳐 버스 회사에 입사했다. 남편과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부부는 버스회사에서 서로를 높여 부르는 동료로 지내지만 사람들이 눈길 없는 곳에서는 닭살 커플의 모습을 보이며 부부만의 직장 라이프를 만들고 있었다. 

아내는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 어르신들에게 누구보다 친절하고 그들의 말벗이 되는 등 행복 버스기사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이런 선행이 알려져 아내는 포상을 받기도 했다. 힘든 버스 운전이지만, 아내는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즐겁기만 해 보였다.

이 부부는 40살을 넘긴 뒤늦은 나이에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남편은 병든 노모를 모시다 혼기를 놓쳤고 아내는 자녀와 함께 싱글맘으로 살았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부부는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이런 행복한 일상이 아내의 친절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보였다. 천생연분 부부의 모습과 함께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고목이 마을 입구를 지키는 한마을을 찾았다. 흙 돌담길이 인상적이었다. 마을 길을 따라 걷다 집 수선에 여념이 없는 주민을 만났다. 그리고 생소함이 있는 매실 강정을 만드는 집을 방문했다. 매실은 광양의 중요한 특산물 중 하나다. 이 집에서는 매실을 가루로 만들어 땅콩 가루를 더해 독특한 강정을 만들고 있었다. 지역의 농산물을 잘 활용한 예였다. 

이 강정을 만든 마을 주민은 이를 위해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그 속에서 최적의 방법을 찾았다. 이를 통해 매실의 맛이 더해진 강정이 탄생했다. 지금은 이 마을의 특산물이 됐다. 포기하지 않은 노력의 결과물인 매실 강정은 그 어느 산해 진미보다 가치 있어 보였다. 

여정의 마지막, 빛바랜 콘크리트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 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 골목길을 따라가다 오래된 사진관이 보여 들어갔다. 마침 한 가족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최근 보기 드문 다둥이 가족이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사이자 사장님은 노년의 여성이었다. 

그는 수십 년 사진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 사진관을 애초 그의 남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과는 전혀 무관한 전업주부였다. 어느 날 건강하던 남편이 돌연 사망하면서 그는 집안의 가장이 됐다. 막막함이 밀려왔지만,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남기도 간 유품인 사진기로 사진 기술을 물어물어 배웠다. 남편이 사진관 일과 함께 했던 도장 파는 일도 배웠다. 그렇게 남편의 사진관은 그녀의 일터이자 가족을 지키는 버팀목이 됐다. 

이제는 찾는 이들도 크게 줄었지만, 사장님은 남편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관을 떠날 수 없었다. 사진관 한편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사진기와 장비들은 남편이 사용했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장님은 매일매일 사진관에서 남편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장님은 남편과 함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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