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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의 전격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전히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이어지고 있고 긴 전쟁은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발생하게 하고 있다. 특히, 전장인 우크라이나의 인적, 물적 피해는 매우 크다.

이 전쟁으로 인해 세계 경제에도 주름이 깊어지고 있다. 유가와 각종 곡물 등 식량자원의 가격 상승은 모든 나라에 인플레 압력을 높이고 있고 실제 현실이 되고 있다. 이제는 먼 나라의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전 세계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높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은 전쟁의 중요한 명분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민족적 동질성을 이유로 하고 있다.

본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고 지금의 전쟁은 과거 러시아 영토를 수복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들이 러시아와 다른 민족이고 다른 전통과 문화를 가진 국가임을 주장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슬라브계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정서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여기에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고통받은 역사도 있다.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더 깊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푸틴은 전쟁을 끝낼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는 내심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그는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으로 과거 러시아 제국의 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러시아의 지속적 영토 확장을 일종의 소명이라 여기는지도 모른다. 과거 러시아는 전성기 시절 대표적인 강대국이었고 세계질서를 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영광의 역사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제국 말기에는 나라가 어떻게 하면 망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흑역사가 있었다.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는 무능한 군주의 전형이었다. 그는 시대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했거나 외면했고 거듭된 실정으로 기울어가는 나라를 더 나락으로 빠뜨렸다. 또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비선 실세에게 휘둘렸고 제국의 멸망과 황실의 비극을 자초했다. 

 

러시아 황제 궁전

 


러시아 제국의 멸망은 어느 순간 찾아온 일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누적된 제국의 구조적 문제와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정치의 실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결과였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제국은 그 기회를 놓쳤고 멸망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 제국의 전성기는 18세기 정복 군주로 불리는 표트르 대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포함하는 왕국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붕괴된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난 모스크바 공국에서 러시아제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러시아는 이후 동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시베리아 지역을 그들의 영역으로 포함했고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아우르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로 발전했다. 하지만 나라 시스템과 문화는 몽골 제국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유럽에서도 낙후된 국가였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유럽 문화권에 포함된 나라로 변모시켰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전쟁을 지속했다. 그는 인근 유럽 열강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러시아는 대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계속 이어졌다. 독일계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쪽으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중동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과의 전쟁이 발생했고 그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와 크림반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후 유럽의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에는 영국과 함께 나폴레옹에 대응하는 대표적 국가였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단행했지만,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대패 당했다.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불러왔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러시의 황제 알렉산드로 1세는 파리에 입성하며 제국의 위상을 드높였고 역대 최고의 영토를 확보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 황제의 권력을 최 정점에 올랐고 신의 영역이 됐다. 지금도 남아있는 러시아 황제의 궁궐은 권력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의 영광은 역설적으로 제국의 쇠퇴를 불러왔다. 러시아 황제권의 강화는 인권 향상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흐름과 역행하는 일이었다. 유럽은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그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퍼지고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국민들의 참정권 확대와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고 의회가 활성화되는 등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이런 분위기와 황제의 절대 권력을 바탕으로 소소의 귀족과 상류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군주제 시스템을 유지했고 오히려 더 강화했다. 이에 러시아는 점점 유럽에서 근대화에서 뒤처지는 국가가 됐다. 러시아는 여전히 광활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대제국이었지만, 내부는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낡은 정치 시스템을 고집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커졌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

 


유럽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상 유입은 피할 수 없었고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다. 이와 동시에 부의 재분배 등 사회적 평등을 더 크게 강조하는 사회주의 사상도 급속히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힘을 얻었다. 러시아는 부의 편중이 극심했고 노동자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가고 있었다. 이에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점점 강해지는 와중에서 러시아는 전제 왕정을 강화하고 이를 힘으로 억압했다. 이는 사회 전반에 혁명의 에너지를 축적시켰다.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의 할아버지였던 알렉산드로 2세는 러시아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는 러시아의 오랜 악습인 농노제를 폐지하고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이를 통해 귀족들의 특권을 일부 폐지하는 한편 교육과 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더 나아가 의회 수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극단주의 혁명론자들에 의해 1881년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이는 러시아 제국 역사에서 전환점이 됐다. 이로 인해 온건 개혁 노선은 금세 반동 정치로 변질됐다. 

알렉산드로 2세에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알렉산드로 3세는 오히려 전제군주제를 더 강화하고 모순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주력했다. 사회개혁을 위한 목소리와 행동은 강하게 탄압했다. 그의 반동 정치는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로 전수됐다.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고 러시아는 스스로 사회를 개혁하고 근대 국가로 발전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 알렉산드로 3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니콜라이 2세는 황제로서의 준비가 부족했다. 권력에 대한 의지와 사회개혁에 대해서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또한 국가 경영에 있어서도 유능하지 못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도 있었다. 러시아는 분명 큰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그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조선에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대결한 러. 일 전쟁의 패전은 러시아와 황제 권위를 추락하게 했다. 러시아는 누가 봐도 승리가 유력했던 전쟁에서 일본에 패했고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려 했던 조선의 외교적 노력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조선은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맞서려 했다. 러시아는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이권, 일본에 대한 견제를 위해 조선의 지원 요청을 일부 수용했다. 이에 일본은 친러 외교정책을 주도하던 민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고종을 사실상 연금하면서 조선 정부를 겁박했다. 

 

 

니콜라이 2세 사진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극복하기 위해 1895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감행하며 친일 정권을 친러 정권으로 변경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이와 동시에 조선은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왕의 전권을 부여받은 외교 사절단을 파견해 러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다. 실제 사절단장으로 파견된 민영환은 장기간 러시아에 체류하며 수차례 니콜라이 2세를 면담하고 외무 장관을 접견하며 조선의 요구를 관철하는 외교적인 노력을 했고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얻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즉, 니콜라이 2세는 조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황제였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일본에 러시아가 패전하면서 황제로서의 위신이 크게 손상됐다. 여기에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황제와 전제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을 더 크게 했다. 이 사건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이를 개선하기 위한 청원의 성격이 강했고 평화적이었다. 이 시위대에 황제는 강경 진압을 명령했고 발포로 연결됐다. 대규모 유혈사태에 황제에 대한 반감은 커졌고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사회가 혼란이 가중됐다. 

이렇게 각종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는 국정에 전념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2세에게 남모를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일한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가 불치병이라 할 수 있는 혈우병에 고통받고 있었다. 출혈이 발생하며 지혈이 안되는 혈우병은 사소한 상처에도 과다 출혈로 사망할 수 있는 심각한 병이었다. 이런 아들의 병은 황제권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로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황실에 접근하는 이가 있었다. 당시 영적 능력과 치유 능력을 가진 인물로 이름을 높았던 라스푸틴이 그 인물이었다. 라스푸틴은 종교와는 거리가  먼 하층 계급의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고 잡범으로 감옥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절도 협의로 마을에서 추방된 라스푸틴은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종교에 귀의했다. 그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집단의 일원이 됐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의 능력에 대한 사람들이 믿음이 강해지고 퍼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영적 능력을 입증하는 모습이 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지방을 넘어 황제가 사는 수도에도 전해졌다. 그는 지역 대주교의 추천장을 가지고 수도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라스푸틴은 상류층 인사들과 귀족, 황실 인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 급기야 아들의 불치병에 고민하던 황제와 그의 가족들과도 연결됐다. 

 

라스푸틴

 


실제 라스푸틴은 혼수상태에 빠졌던 황태자를 기도로 치유하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다. 우연이 겹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라스푸틴은 황제와 그 가족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는 그가 권력에 한층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절대 권력자인 황제와의 관계는 그를 막후 실력자로 크게 만들었다. 그는 황제는 물론이고 황후, 자녀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황제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황후는 라스푸틴의 강력한 추종자였다. 이를 바탕으로 라스푸틴은 러시가 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이를 통해 막후 권력자가 된 라스푸틴의 이를 이용해 부정 축재를 하고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어났지만, 황제는 그를 비호하기만 했다. 심지어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해서도 라스푸틴에 의존하기도 했다. 특히, 황후의 라스푸틴에 대한 추종은 더 심각했다. 러시아 언론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라스푸틴과 황후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크게 제기 되기도 했다. 실제 라스푸틴은 특유의 뛰어난 언변과 화술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류층 귀부인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방탕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이런 비선 실세의 존재는 국정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국정 운영의 철학이나 능력, 도덕성이 없는 인물의 사실상 국정 운영을 주도하면서 황제에 대한 여론은 더 악화됐다. 이는 전제 군주제 타도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다. 하지만 농민들을 중심으로 황제를 추앙하는 러시아 국민들이 많았다. 황제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국정을 쇄신한다면 제국의 몰락을 막을 희망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결정적 패착을 두고 만다. 니콜라이 2세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러시아는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하여 독일과 동부전선에서 대치했다. 문제는 이미 그전 러일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군사 대국이 아니었다. 국가 역량도 큰 전쟁을 치르기엔 부족했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전쟁 참전은 계속된 패전으로 연결됐다. 민생 역시 더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최전전에서 전쟁을 지휘하려 전장으로 나섰다. 마지막 실책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후의 비호를 받은 라스푸틴의 전횡의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은 더 깊어졌다. 황실과 라스푸틴을 둘러싼 각종 소문과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최전선에 나가있는 황제는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96년 러시아 방문 조선 사절단

 


급기야 황실에서 나섰다. 황실 인사들은 라스푸틴 제거에 나섰고 그를 유인해 암살을 시도했다. 애초 음식에 청산가리를 넣어 독살을 시도했지만, 라스푸틴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수차례 총격을 가하고서야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라스푸틴의 시신은 결박되어 차디찬 강물에 버려졌다. 러시아를 뒤흔들었던 괴승의 비참한 최후였다.

라스푸틴은 그가 죽이 얼마 전 예언서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 그는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고, 황제의 친구가 황족이 나를 죽이면 황실은 얼마 안가 몰락하고 만약, 귀족에게 자신이 죽은다면 황제는 25년 후 사라지며 농부, 즉, 국민들에게 죽는다면 황제는 수백 년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마치 그와 러시아 제국의 앞날을 알기라도 한 듯한 내용이었다. 물론, 글의 이면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말을 실제 현실이 됐다. 

국정을 농단하던 최악의 빌런이 사라졌지만, 러시아 제국의 혼란은 더 커졌다. 최전선에 나가있는 황제는 불리한 전황을 반전시키지 못했고 국정 난맥상은 여전했다. 민생고에 시달리는 노동자 서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올랐고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1917년 2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국민들은 황제 퇴진, 전쟁 중단 등을 요구했다 황제는 이번에도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하지만, 시위 진압을 담당하는 군인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는 장교를 살해하고 사위대에 가담했다. 혁명 세력은 그 세가 점점 커졌다. 혁명의 불길은 더는 진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니콜라이 2세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수도 돌아오는 길에 황제 퇴위를 선언했다. 그는 그의 자리를 아들 또는 그의 동생이 넘겨받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을 역사에서 사라졌다.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수백 년 제국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하지만 황실 가족의 비극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황제로서의 권한을 모두 잃은 니콜라이 2세 가족은 혁명세력에 이끌려 교외로 떠났다. 그들에게 더는 궁궐의 화려한 삶은 없었다. 그들은 일상을 감 받으며 연금 상태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런 삶도 오래갈 수 없었다. 

구 체제를 옹호하는 귀족, 가본 혁명에 반대하는 반 혁명 세력들이 세를 규합해 혁명세력에 맞섰다. 이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구체제 복원을 원하는 반 혁명 세력은 백군으로 혁명 세력은 적군으로 나뉘어 싸웠다. 백군 세력에는 영국과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이 있었다.

러시아의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됐다. 초기 군사력에서 밀렸던 적국은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점점 초반 밀리던 전세를 역전했고 구체제 옹호세력들을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 혁명 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이 다수파가 되면서 러시아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으로 재편됐다. 

 

니콜라이 2세의 마지막 사진

 


이런 정치적 격변기에 반 혁명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은 혁명군에 큰 위협이었다. 강경파가 더 힘을 얻는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었고 그들은 혁명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존재가 됐다. 1918년 7월, 니콜라이 2세 가족은 혁명군에 의해 어느 집으로 옮겨졌고 그 집 지하실에서 모두 총살됐다. 니콜라이 황제 내외와 4명의 딸, 한 명의 아들까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황실의 최후였다. 니콜라이 2세는그 직위를 뒤늦게 내려놓았지만, 가족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이들의 시신은 인근 숲에서 불태워졌고 암매장 됐다. 사회주의 소련 정권에서 그들은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의 존재는 1991년 사회주의 소련이 해체된 이후 다시 부각됐다. 그들이 암매장 된 시신이 발굴되고 DNA 대조를 통해 그 시신이 니콜라이 2세 가족임이 확인됐다.

그리고 그들은 시신 발굴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공인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성당에 그 시신이 안치되면서 편안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그들을 성인으로 시성하며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2008년에는 러시아 대법원은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죽음이 정치적 탄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판결하며 그들을 복권시켰다. 긴 세월이 지나 니콜라이 2세 가족은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 제국의 멸망은 국민들의 뜻에 반하는 정권의 몰락이었다. 황제는 절대 권력을 놓지 못했고 시대 변화를 이끌어가 그에 맞는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그 불만을 힘으로만 억누르려 했다. 이는 극단적을 상황으로 러시아 제국을 이끌었다. 러시아 혁명은 제국의 총체적 부실이 불러온 사건이었다.

만약,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국민과 나누고 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로 또한, 입헌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회주의 소련도 현대사에서 없는 이름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다. 

러시아 제국의 멸망은 조선 말 조선의 상황과 닮아 있다. 고종은 일제의 조선 침탈을 막아내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강구했고 외교적 노력에 사활을 걸었지만, 이미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고종은 나라의 힘을 키우고 위해 근대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고 국방력 강화를 하기도 했지만,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고종은 일제의 침탈을 막기 위해 나라의 역량을 집중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나누고 국민들의 국정 참여를 확대하는 등 전향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전제 군주제를 국가를 세웠고 황제 권한을 더 강화하는 반동 정치를 했다.

국가적 위기를 대응하기 위해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명분도 있었지만, 이런 퇴행적인 국정운영은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 황제에 집중된 권한은 결과적으로 을사늑약 등 각종 조약 체결에 있어 이를 제어할 방법을 사라지게 했다. 그 방법이 강압적이었다 해도 황제의 직인이 찍힌 조약을 그 자체로 국가 간 조약이 될 수 있었다. 의회가 있었다면 그 기능이 제대로 가동됐다면 조금 더 저항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현실 정치 참여를 이끌어 보다 강하게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었다. 고종은 조선을 황제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했다. 이는 니콜라이 2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러시아 니콜라이 2세와 고종 황제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지 못한 군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통치가 가져온 결과였다. 

지금 러시아 지도다 푸틴은 어떻게 보면 과거 러시아 제국의 팽창기처럼 지속적인 영토 확장을 꿈꾸고 있다. 그것이 러시아를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그 속에서 내재된 사회의 문제를 등한시했고 멸망을 길을 걸었다. 그 속에는 무리한 전쟁도 큰 원인이었다.

러시아 제국 멸망사는 과거의 일이 아닌 절대 권력이 지배하는 어느 나라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푸틴의 러시아는 어쩌면 멸망한 러시아 제국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 위키백과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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