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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이날은 1897년 10월 12일 조선이 제국임을 선포하여 만들어진 전제군주국가인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어 멸망한 날이다. 이를 두고 한일병합, 한일합방으로 말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그 해 경술년의 이름에서 경술년에 찾아온 국가적 수치, 경술국치로 말한다. 

이후 대한제국의 행정, 사법, 군, 등 모든 기능이 일본에 종속되었고 우리 민족은 일본 국민이 됐다. 국기와 국가도 사라졌다. 국민들은 일본 경찰과 행정기관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수도 한성은 경성부로 격하되어 일본의 지방 도시가 됐다. 대한제국의 황실 역시 황제는 이왕으로 강등됐다. 과거 명나라를 사대하던 시절 조선으로 돌아갔다. 경술국치일 양국의 국왕은 지금의 담화문을 각각 발표했다. 

"짐은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대한제국을 들어서 우리 일본 제국에 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은 병합 후라도 상당 후 예우를 받을 것이며,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1919년 8월 29일 일왕의 조서


 

경술국적

 


"짐이 부덕으로 간대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리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1919년 8월 29일 조선왕조 순종실록 당시 기록, 순종의 어록 



이 지점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역사에 기록된 순종의 발언은 당시 집권층의 무능과 무력함, 무책임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순종 황제가 사실상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 임금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나라가 망하는 순간 이를 막으려는 의지가 없고 그저 대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황은 불가피성을 말하고 있지만, 나라의 주권이 황제가 속한 제국의 황제로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병합되는 상황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와 황족들은 왕족으로 대우를 받고 일제 강점기 기간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 중간 일제의 필요에 의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고통받았던 일반 국민들의 삶과는 비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무능과 무기력함은 결과적으로 황실과 국민들을 멀어지게 했고 1919. 3.1 운동 이후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한반도의 왕조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순종 임금의 처신이 불가피했다는 변명도 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 고종이 일제에 저항하다 강제로 퇴위당하는 상황 속에 황제에 즉위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도 봐야 했다. 그가 세자 시절에는 독살 미수 사건의 피해자로 커피에 포함된 다량의 아편에 중독되어 이후 큰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순종 임금에게 왕과 황제 자리는 버겁기만 했다. 고종 황제가 외교적이 노력과 의병과의 연계 등을 통해 저항하다 좌절하는 모습 속에서 저항의 의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술국치일 당일  순정효 황후가 그의 치마폭에 옥쇄를 숨겨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일화와 비교해 순종 임금의 처사는 실망 그 자체였다. 결국, 그는 이왕으로 불리며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을 정당화하는 상징이 되어 궁궐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런 무력한 대응과 함께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매국노들도 있었다. 경술국치를 이끌어낸 대신들 경술국적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 대신 민병석, 탁지부 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 장관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가 그들이다.

이 중 이완용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의 체결에도 앞장섰다. 당시 그는 학부대신이었다.  이완용과 함께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을사 오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박제순은 이완용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경술국적으로 모두 이름을 올렸다. 

이런 매국의 대가는 부와 명예였다. 이들은 높은 관직을 받았고 은사금 등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의 부는 대를 이어 상속됐고 그 자식들 역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는 대신들 뿐만 아니라 왕실의 종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린 윤덕영은 순정효 황후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옥쇄를 완력을 동원해 빼앗아 한일병합 조약을 완성하는 데 있어 큰 공을 세웠고 엄청난 부를 과시하며 살았다. 서양의 궁궐과 같은 화려함을 자랑했던 그의 저택 벽수산장은 친일 매국노들의 삶을 상징했다. 지금은 그 모습이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이렇게 친일 매국노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한일 병합은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일본은 사전 정지작업으로 영. 일 동맹을 맺고 미국과는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의 병합을 강대국들로부터 승인받았다. 고종 황제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과의 외교전을 통해 상황을 바꿔보려 했지만, 국제 정세는 이미 대한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후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해 사실상 대한제국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입법권과 행정권을 박탈했고 군대가 해산됐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과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함께 무력 투쟁에 나서기도 했지만,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이 박탈되고 이어 경찰권도 박탈됐다. 경술국치 이전에 대한제국은 이미 국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8월 29일 발표된 한일 병합조약도 실상은 8월 22일 확정되어 서명된 것을 일제가 일정을 조정해 발표했다. 대한제국의 공식적 멸망은 이미 일주일전 확정되어 있었다. 

 

 

순종황제

 



1910년의 한일 병합 조약은 이미 정해진 사실을 확인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이런 배경 탓인지 국민들은 경술국치일 당일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을사늑약 당시와는 크게 달랐다.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라 사정을 국민들은 알고 있었고 국권이 피탈 당하는 상황에 무력하기만 한 권력자들에 대한 반감도 크게 작용했다.

아래 조약의 내용은 국민들의 더는 국가를 위해 나서는 걸 단념하게 했다. 별다른 저항도 없이 전쟁도 없이 나라를 넘기는 집권층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모습 속에서 국민들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조약 발표시기까지 조정했던 일제가 오히려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조약은 내용은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하고 조인한다.

융희 (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메이지(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약 내용을 알리는 당시 신문

 



이렇게 8개 항목의 간단한 조약과 함께 조선, 대한제국의 수백 년 역사는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 수천 년 세월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며 지켜온 역사의 흐름이 이후 35년간 단절됐고 우리 민족의 긴 암흑기를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좌절하지 않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나라 안팎에서 활발히 전개했다. 

1919년 3.1 운동을 통해 우리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렸고 해외 곳곳에서 외교적으로 무력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전쟁을 했다. 일제는 그럴 때마다 무력으로 다른 간교한 방법으로 민족을 억압하고 회유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런 노력들의 결과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이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독립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해방의 날이 찾아올 수 없었다. 

이후 우리 민족은 냉전체제 속에 극심한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 전쟁 등을 거치며 큰 상처를 입었고 빈곤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군사 강국으로 거듭났다. 이제는 경술국치 당시 가해자였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력을 만들었다. 계속된 시련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런 영광의 역사 이면에 자리한 어둡고 치욕적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고 지금의 역사를 만든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경술국치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다.

특히, 나라를 적에서 판 매국노들과 적에게 협조한 대가가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들의 과오는 그들을 단죄할 수 없다 해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평가해야 하고 그 과오를 기록으로 남겨 대대손손 전해야 한다. 이는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격변의 세월 속에 제대로 하지 못한 친일 청산의 대가를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크게 치르고 있기도 하다. 1910년 8월 29일, 그때의 치욕은 계속 전해지고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이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이다.


사진 : 나무위키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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