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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과 1차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다룬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면모와 함께 그와 함께 했던 장군들과 백성들 그리고 일본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면모를 함께 다루며 이전 이순신 시리즈의 첫 시작인 '명량'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명량'에서는 이순신의 영웅적인 면모 위에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그렸다면 '한산'에서 이순신은 냉철하면서 조용하지만, 강인한 외유내강형의 장군이었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을 세세히 그려냈다. 이는 이순신의 영웅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게 다가올 수도 있었다.

또한,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모두 다른 탓에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가는 과정이 길고 관객들에게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하듯 한산도 대첩의 전투 장면은 이전 '명량'보다 한층 더 완성도 있고 박진감이 있었다. 전장의 승패가 엇갈릴 수 있는 긴장된 순간 등장한 거북선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강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영화 '한산'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그 역사를 따라가긴 했지만, 작가적 상상력이 이전 '명량'보다 더해졌다. 우선 전투를 위한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 양측의 치열한 정보전과 첩보전을 치열하게 그렸다. 양측은 모두 상대 진영에 첩자를 파견하거나 정탐을 하면서 약점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전 이순신의 영화에서 일본군을 악마화하고 힘을 앞세운 침략자의 면모를 보다 강조했지만, '한산'에서 일본군은 매우 치밀하고 무모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정보를 사전에 충분히 파악하고 이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는 나오지 않지만,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개전 한달도 안 돼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는 사전에 치밀한 전쟁 준비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일본군에 대해 조선은 정보가 부족했고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못했다. 이는 육지전에서 일방적으로 조선이 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의 임금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을 떠났다. 

나름 이유는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단순히 조선을 점령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며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가능하면 빠르게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고 조선의 왕을 하루 빨리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게 중요했다. 일본의 정서상 이는 가장 빠르게 전쟁을 승리하는 방법이었지만, 선조는 결사 항전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응했다. 물론, 백성들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을 가는 임금의 모습은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이런 선조의 모습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데 있어 큰 요인이 됐다. 

하지만 이런 선조의 전략은 빠르게 북진하는 일본군의 속도로 인해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영화에서도 언급됐지만, 선조는 의주를 지나 명나라로의 기부를 고려하기도 했다. 사실상의 망명 정부를 명나라 땅에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는 신하들과 명나라의 부정적 반응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다. 대신 선조는 조정을 2개로 나눠 세자인 광해군에서 분조를 맡겨 그로 하여금 전장에서 백성들과 군사들을 지휘하고 항전을 독려하도록 했다. 광해군으로서는 전란 와중에 급히 세자 자리에 올라 위험한 전장 한복판에 놓이게 됐다. 

광해군은 어려운 상황에도 분조를 잘 이끌었고 그를 중심으로 조선의 민심이 안정되고 항전을 위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육지전의 상황은 조선에 크게 불리했다.

이순신의 수군은 조선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순신은 전쟁 전부터 전쟁에 대비했다. 조선에는 우리 연안 바다에 맞는 넓은 선체에 튼튼한 판옥선이 있었고 앞선 기술의 화포가 있었다. 또한, 강력한 돌격선인 거북선이라는 신무기도 있었다. 하지만 육지전에서 크게 밀리는 상황은 이순신의 수군에 큰 부담이었다. 개전 후 몇 차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거듭 승리하긴 했지만, 전쟁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이 있는 호남지역을 공략해 점령할 경우 이순신의 수군은 그 근거지를 잃을 수 있었다. 이는 보급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수군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일이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시작됐다. 

향후 전투방향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육지전의 상황이 급하고 전황이 크게 밀리는 수세국면에서 수성에 더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이순신은 이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내놓지 않았다. 이순신은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그는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전술을 가다듬고 군수 물자를 충원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 진영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활동도 병행했다. 이순신의 적의 허점을 알아야 했고 그들의 지휘관은 와키자카를 알아야 했다. 

이는 와키자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육전에서 수천명의 병사로 수만명의 조선군을 궤멸시킨 용인전투의 승장이었다.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수전에서도 큰 승리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순신의 지략과 능력을 파악했고 신무기 거북선의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거북선의 약점도 파악하고 있었다.

거북선은 적에게 큰 위압감을 주는 돌격선이긴 했지만, 배 위에 철갑을 씌운탓에 기동력과 방향 전환이 느린 단점이 있었다. 또한 중요한 공격 수단인 배를 부딪혀 상대 배를 공략하는 충파 공격시 거북선의 중요한 상징인 머리 부분이 상대 베에 끼여 기동이 중단되는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과 달리 대규모 교전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거북선의 돌격선으로서의 역할을 제한하는 일이었다. 이는 조선 수군에도 큰 고민이었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함선 건조 책임자 나대용은 그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전투까지 시간이 부족했다. 여기에 이순신이 야심차게 준비중인 진법인 학익진의 완성도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주로 육지전에서 상대 공격을 둘러싸 막아내고 역습하는 진법인 학익진을 해상에서 구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함대는 그가 지휘하는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 경상 우수영의 수군이 연합한 부대였다. 확실한 지휘체계가 구축된 게 아니었고 특히, 경상 우수사 원균은 이순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이었다. 해전이 벌어질 장소는 이순신의 전라 우수영 관할 해역이 아닌 원균 관할의 경상 우수영 해역이었다. 원균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원균은 이순신의 전략에 동조하지 않았다.  하나된 움직임이 중요한 진법을 만들기에 악조건이었다. 

시시각각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이순신의 고심도 깊어졌다. 와키자카를 중심으로 한 일본 수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전투에 임하는 중이었다. 일본수군은 조선 수군의 충파 공격에 대비해 철갑선을 준비하기도 했고 그들이 먼저 충파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배를 만들기고 했다. 또한, 그들에게 없었던 화포까지 준비했다. 조선 수군의 장점이 희석될 수 있었다. 또한, 지속적인 정보전으로 조선 수군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산도 일대 지도 - 구글지도

 



이순신은 출전을 명령했다. 완성하지 못한 진법, 단점을 극복하지 못한 거북선, 하나되지 못한 지휘체계 등 문제가 있었지만, 이순신은 전쟁의 양상을 바꿀 큰 승리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수성보다는 공세를 취해야 함을 결정했다.

와키자카는 이에 대응해 좁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좁은 수로인 견내량에서 조선 수군을 기다렸다. 이 지역은 영남에서 호남의 바다로 향하는 길목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조선 수군으로서는 지켜야 하는 곳이었고 일본수군은 이곳을 돌파해 호남 그리고 서해안으로 진출해야 했다. 이는 바다의 재해권과 관련되는 일이었고 언젠가 이 곳에서의 큰 전투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지만, 견내량은 수로 폭이 넓고 속도가 다수 떨어지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전투를 하기 불리한 곳이었다. 배와 배의 간격이 좁아질 수 있었다. 이는 배를 월선해 백병전을 주 작전으로 하는 일본군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와키자카의 일본은 서두르지 않고 조선 수군을 기다렸다. 이에 대응해 이순신의 수군은 일본 수군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는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해상에서의 대결이 이어지는 사이 육지에서도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개전 초기 수도 한양 점령에 주력하면서 북진에 주력했다. 일본군은 진격로인 영남을 지났지만, 호남 지역에 대한 진격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전쟁이 그들 의도와 달리 장기전 양상을 보이지 한산도 대첩이 펼쳐지는 시점에 호남지역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 지역은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중요한 군량미 공급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조선 수군을 배후에서 공격해 고립시킬 수 있었다. 일본군의 호남 공략은 그들의 의도대로 전쟁을 빠르게 일본군의 승리로 가져올 수 있는 방편이었다. 이순신도 이를 우려하고 있었다. 이순신으로서는 호남지역을 지키는 관군과 의병들의 승리가 절실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웅치 전투의 장면이 등장한다. 이 곳은 호남의 중요한 거점인 전주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고개로 호남 방어를 위해 중요한 장소였다. 영화에서는 적장 와키자카가 이순신의 수군을 육지에서 압박하기 위해 전주성으로 향하던 일본 육군을 전라 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향하게 했다. 그 길목에서 일본군과 의병이 중심이 된 조선군이 대결하는 상황으로 설정했다. 만약, 이 지역이 뚫린다면 호남지역은 물론이고 조선 수군에게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큰 열세에도 불구하고 웅치고개를 사수했다.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인명 손실이 발생했지만, 조선군은 끝까지 분전했다. 이 의병들 희생은 전라 좌수영을 지키는 힘이 됐다. 역사적으로는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패배했다. 수천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그 시신이 고개를 뒤덮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웅치에서의 결사 항전은 일본군의 진군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진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은 오히려 수세에 몰리게 됐다. 이후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에 밀린 일본군은 전주성 공략을 멈추고 후퇴했다.  이로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은 좌절됐다. 웅치 전투에서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군마저 후퇴하면서 웅치 고개에 쓰러져 있던 조선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고 비석을 세워주며 예를 갖췄다고 전해진다.

'한산'에서는 이들의 희생을 비중있게 묘사했다. 이순신 장군이 아닌 당시 조선인들의 항전에 많은 비중을 둔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승리는 그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호남을 끝까지 지켜낸 의병들과 관군, 침략자에 맞선 백성들 모두가 이뤄낸 승리였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마침내 일본군을 견내량 밖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고 숨겨둔 비중의 진법을 선보이며 속도로 맞선 일본군을 일시에 포격으로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진영을 갖추기 위해 전투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였던 거북선을 돌격으로 깜짝 등장시켜 일본군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 거북선은 이전 일본군이 알고 있었던 거북선이 아니었다. 더 빨라지고 기동력이 우수했다. 충파 공격시 약점도 기발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말 그대로 공포의 귀선이었다. 

이순신은 명예욕이 큰 와키자카가 언젠가 전면전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했다. 와키자카의 시선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수성에만 머물 인물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그의 기다림을 끝낼 유인전을 끈질기게 시도했다.

이순신은 와키자카가 학인진의 약점을 파고들기 위해 중앙을 집중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한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세와 수성을 겸할 수 있는 조선 수군만의 학익진을 선보였고 그 장점을 극대화했다. 일본 수군은 학익진 속에서 궤멸됐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한산도 대첩 승리를 계기로 바다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 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로 진격해 포구를 초토화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군은 조선 수군, 이순신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일본군이 계획했던 수륙 병진 작전은 좌절되고 일본군은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 호남 공략마저 좌절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의 기세를 크게 꺾이고 말았다. 한산도 대첩이 불러온 엄청난 결과였다. 

 

 

 



이후 일본군은 육전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후방이 공격당하고 명나라 군의 참전이 이어지며 남해안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다. 조선은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군제를 개편하고 전쟁을 보다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다. 이는 훗날 일본이 재침한 정유재란을 막아내는 힘이 됐다.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이 원했던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승리였다. '한산'은 이 승리의 역사를 차분하게 전개시키며 서서히 긴장을 고조하고 강렬한 전투신으로 마무리했다. 이전 '명량'과 달리 이순신이 고난을 이겨내며 영웅으로 다시 등장하기 보다 이순신의 지략가로서, 소통의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전쟁의 상황과 진행은 이순신보다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 또 다른 전투 장면으로 묘사됐다. 이순신은 그 거대한 전투의 한 부분이었다. 이름모를 영웅들 중 한 명이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순신은 이 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하며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일본 장교 준사에게 전쟁의 성격에 대해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 답했다. 국익과 여러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전쟁을 이순신은 침략자를 불의로 이에 대응하는 이들의 의로 규정했다. 이 말은 준사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는 일본의 침략군에 맞서는 항왜가 되어 의의 편에 서게 된다. 

이 말속에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침략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말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불의에 맞서는 데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침략자에 맞서 백성들이 함께 했고 그 배경과 과정이 어찌되었건 명나라의 참전도 있었다. 그들은 불의에 대해 함께 싸웠다. 그 결과는 침략자들을 몰아내는 승리였다. 한산도 대첩은 의를 위한 전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한 승전이었다. 

그리고 그 승전의 배경에서 이름없이 산화한 이들의 의를 위한 투쟁도 함께 하고 있었다. 영화 '한산, 용의출현' 에서 용은 극적으로 등장한 거북선 뿐만 아니라 당시 침략자에 대항해 불의에 대항해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 그리고 다시 이 땅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한산'은 어쩌면 그들을 위한 헌사일수도 있다. 


사진 : 영화 포스터/ 구글 지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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