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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세상을 떠난 재벌 회장의 예술작품 기증과 관련해 앞다퉈 뉴스를 내보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기업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생전 수입한 작품들을 나라에 기증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증품에는 시대를 초월해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 국보급 문화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다수의 예술 작품이 그 존재를 대중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언론은 찬사를 보냈지만, 한 편에서는 거액의 상속세를 대신해 납부한 예술 작품 기증에 대한 순수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실제 상속세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수집품들이 세상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을 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더 오랜 세월 누군가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엇갈린 평가가 있지만, 소중한 우리 예술작품들이 국외로 반출되지 않고 잘 보존됐고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기증품들은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등에서 전시되고 있다. 여전히 그 전시회 인기는 매우 높고 예약 경쟁도 치열하다. 

 

 

 

 

최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특별전을 찾았다. 우리 미술사에서 그 이름을 가장 잘 알려지고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한국 화가 중 한 명인 이중섭의 여러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중섭은 매우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그 안에는 우리 한국적인 정서가 담겨 있는 작품세계를 보였다. 일반적인 회화 기법과 다른 이중섭의 그림은 그가 활동하던 1940~50년대에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의 독창성은 그의 소 그림에서 드러났다. 


소는 근면과 성실함의 표상이었고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함께 한 동물이었다. 소의 근면함과 성실함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중섭은 더 나아가 이 소에 강인한 생명력과 힘찬 기상, 역동성을 더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서슬 퍼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소 그림을 그리기 꺼려지는 상황에도 거침없이 소를 소재로 삼았고 그 소를 통해 우리 민족의 기상을 담았다. 황소 그림에서의 뛰어난 표현력과 해석 능력, 자신만의 작품관과 기법 등은 이중섭의 천재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 천재화가의 작품들을 이건희 컬렉션을 만났다. 


이번 컬렉션에 나온 작품들은 우리가 잘 아는 그의 대표작 외에 그가 청년 시절 그렸던 그림과 함께 소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중섭의 작품관을 주제별로 정리해 보는 이들의 이해를 도왔다.

 

 

전시관 입구, 전체 분위기 

 

 

1940년대 초반 이중섭의 작품, 마치 동화 속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이중섭의 시각으로 창조된 동물들



이들 작품에서 그의 필명을 살피면 둥섭이라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평안북도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를 그 지역의 오산학교 진학했다. 오산학교는 1907년 민족운동 단체인 신민회가 주도한 애국계몽운동 진행과정에서 설립됐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 인재 육성과 국민교육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대표적인 민족사학이었다. 


이곳에 입학해 교육을 받은 이중섭도 영향을 받았다. 이중섭은 오산학교의 미술교육을 받았고 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이중섭은 일본에 유학하며 체계적으로 미술을 배웠고 작품전에 그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도 이중섭은 소재로 한 작품을 그리는 강단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중섭은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마음 한편에 민족의식은 잃지 않았다. 


이중섭은 친일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 문학가가 기고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일제 전쟁과 청년들의 참전을 찬양하는 사설을 보고 분노했다. 그는 그 사설 제목의 중자가 자기 이름의 중자와 같은 것이 싫어 필명을 이둥섭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중섭의 스케치 


일본에서의 시간은 화가 이중섭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는 일본에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도 만났다. 그 시절 그의 작품은 밝고 자유롭고 산뜻한 느낌이다. 그의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중섭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족함 없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미술을 위해 유학길에도 오를 수 있었다. 예술가로서는 이보다 좋은 수 없는 환경에 그의 재능이 더해지며 화가 이중섭은 더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행복 가득한 인생은 시대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중섭의 동물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외에도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도 등장한다. 이중섭은 그 동물들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새롭게 창조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힘이 느껴지는 동물들의 모습이다. 

 

 

함께 어울리는 어린이들, 이중섭 특유의 작품 기법이 담겨 있다. 

 

 

가족, 이중섭 작품의 중요한 소재


이중섭은 194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원산에서 유학시절 만난 연인 마사코와 결혼했다. 이중섭은 그녀에서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는 원산의 한 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다.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해방 후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은 공산화가 급격히 진행됐다. 부유했던 이중섭은 집안은 그 변화 속에서 몰락했다. 이중섭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했고 사회주의 사상의 지배하는 북한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마음껏 펼치기 힘든 상황이 됐다. 6.25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의 삶은 또 한 번 요동쳤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원산을 떠나 월남했다. 하지만 남한은 연고도 없었고 전시 상황은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경제적 궁핍이 지속됐다. 이중섭 가족은 부산, 통영, 제주 등지로 거처를 옮기며 살았다. 이중섭은 그 과정에서도 작품 활동을 했지만, 궁핍한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중섭 역시 부두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지만, 평생 예술가로 살아온 그에게는 낯설기만 한 일이었다.


이중섭은 그의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아내의 친정으로 떠나보내는 결정을 했다. 이중섭에게는 가족들이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갈라진 가족은 이중섭 생전에 더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이중섭은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받은 선원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주일 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게 가족들과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런 불행한 가족사는 이중섭의 작품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행복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 있는 가족과 주고받은 서신에 그려진 이중섭의 그림


이 편지 속에서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현실, 가족들과의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서 편지는 가족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편지의 그림은 이중섭의 그 어떤 작품보다 큰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잡지 표지에 들어간 이중섭의 작품

 

 

이중섭의 은지화 

 

 

이중섭의 은지화는 창작에 대한 그의 처절함이 담겨 있다. 이중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에 이중섭은 담뱃갑 속 은박지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다. 얇은 은박지에서 조심스럽게 그려간 그의 작품은 그를 특징하고 있다.


이를 사람들은 은지화라 했다. 그의 삶을 모르는 이들은 이중섭의 독창성과 창의성의 담긴 작품이라 하겠지만, 이는 그의 극한의 빈곤 속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이중섭이 세상을 떠난 1956년 그려진 서울 정동 풍경


이전 그의 작품과 달리 쓸쓸하고 차가운 느낌이다. 생의 끝자락에서 생의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는 느낌이다.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후에도 생활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는 생활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1955년 마침내 그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화가에게는 개인전이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중섭에게 개인전은 큰 기회였고 그는 개인전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실제 개인전에서 수십점의 작품이 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 작품 대금이 제대로 이중섭에게 지불되지 않았고 그는 개인전을 통해 그가 기대했던 경제적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었다.


이는 이중섭의 삶을 지탱하던 큰 희망도 사라지게 했다. 이중섭은 화가로서의 성공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찾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불러와 함께 사는 게 큰 꿈이었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 속에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궁핍과 상실감은 그를 더 힘들게 했다. 


그사이 그의 지병은 더 악화됐다. 1956년 가을 이중섭은 지병의 악화와 영양실조 등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지인들이 그를 수소문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병원에서 사늘한 시신이 된 이후였다. 그렇게 이중섭은 생전에 그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을 살다 떠났다. 

 

 

 

이중섭은 사후에서야 그의 작품이 인정을 받고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이후 고가에 거래되거나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됐다. 그와 관련한 각종 서적이 나오고 미디어에서도 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잠시 살았던 제주도에는 그와 가족들이 살았던 집을 중심으로 이중섭 미술관과 거리가 만들어져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지금도 이중섭의 작품은 미술 시장에서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마치 불행한 삶을 살다간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고흐와 닮은 이중섭의 삶이다. 


이중섭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 우리나라는 해방 후 극심한 이념 대립과 혼란, 이어진 전쟁과 극심한 가난 속에 생존이 중요한 과제였다.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중섭과 같이 매우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를 외면했고 이중섭은 외로운 예술가로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런 극한의 상황에도 이중섭은 그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또 그렸다. 비록,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천재 화가는 무연고자로 외롭게 병실 한 편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불행한 화가였지만, 이중섭의 작품은 남아 세상과 계속 만나고 있다. 이제는 재벌 회장만의 작품이 아닌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최고 불행했던 화가의 작품을 수집한 최고 부자, 그 부자의 행복이 이중섭의 생전에 조금이라고 찾아갔다면 이중섭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 부질없는 상상도 함께 생기는 이중섭 특별전이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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