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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성북동은 도심권에 속해 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에 산세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환경을 가지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 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성북구는 한적한 교외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의복의 재료를 생산하는 누에가 잘 사육되도록 염원하게 제사를 지내는 선잠 단지가 있었고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풍광으로 양반들의 저택이나 별장이 지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성북동 일대에 재벌 회장과 고위 관료나 정치인,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위치해 있다.  

1960년대 들어 도심과 연결되는 교통망이 생기고 서울이 사대문을 넘어 확장되면서 그 모습이 점점 변해갔다. 하지만, 개발의 광풍 속에 성북동의 모습은 변해갔지만, 여전히 성북동 곳곳에서 과거 흔적들이 남아있다. 한옥 등 건축물 외에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사립 미술관인 간송 미술관과 과거 고급 요정이었다가 그 주인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에 사찰이 된 길상사가 유명하다. 이에 성북동은 최근 역사, 문화 기행의 여행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심우장 가는 길

 



그 역사기행의 장소 중 '심우장(尋牛裝)'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지도자, 문학가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이 인생의 말년을 보낸 곳이다. '심우장'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2가지 수행의 과정 중,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라는 의미의 '심우(尋牛)에서 유래했다. 그 안에는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한용운은 1879년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 스님이 됐다. 하지만 그는 속세와 단절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종교인에 머물지 않고 사회 운동에 적극 나섰다. 한 편으로 불교계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승려 또한, 결혼할 권리를 가지게 해 달라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했다. 실제 한용운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두기도 했다. 그는 당시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용운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독립운동이다. 한용운은 일제가 주도하는 어용 불교 단체 참여를 완강히 거부하는 한 편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시 불교계를 대표해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용운은 여러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했고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억압을 받았다. 또 한 편으로 한용운은 문학가이지 시인이었다. 

 

 

심우장 마당

 



1926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이 실린 시집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님의 침묵' 시집의 초판본이 매우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만큼 '님의 침묵'은 작품성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는 대표적인 저항시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일제 강점기 주권을 빼앗긴 나라를 의미하고 있다. 한용운은 떠나간 님에 지금의 나라를 비유했다. 하지만 한용운은 작품에서 님을 떠나보내지 않았고 재회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았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의 의지가 시로 투영됐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국을 조국이라 할 수 없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시이기도 하다.

일제는 문화와 예술 전반을 통제하고 검열을 지속했다.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언론, 출반의 자유를 일부 인정하고 조선인들의 사회운동을 용인하는 듯 보였지만, 경찰력을 한층 증가하고 사회 통제를 더 강화했다. 3.1운동 이후 문화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표현의 자유는 제한적이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그런 속에서도 문학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독립의지를 표현했다 할 수 있다. 

 

 

심우장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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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독립의지는 나이가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 강요로 상당수 지식인들과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친일파로 변절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린 인사 상당수도 변절자 대열에 가세했다. 이에 국내 독립운동은 그 힘을 잃었다.

하지만, 한용운은 그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일제에 저항했다.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장례를 한용운이 치러준 일화는 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동삼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독립군 장군으로 그 명성이 국. 내외에서 매우 컸다. 그는 김좌진, 오동진과 함께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동삼은 1931년 중국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10년형을 선고받았고 감옥에서 옥사했다.

문제는 김동삼의 장례를 치를 유족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일제의 기준으로 최악의 범죄자였던 김동삼의 장례를 치른다는 건 상당한 불이익과 고초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용운은 그의 유해를 수습하고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르며 그를 추모했다. 

 

 

 

심우장

 



이와 함께 한용운은 노년에도 일제의 거듭된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개인적인 인연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려는 친일파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른 경제적으로 그를 힘들게 했다. 심우장은 그의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심우장은 비교적 넓은 마당을 갖춘 나름 번듯한 한옥이지만, 남쪽에 산은 등진 북향 가옥이다. 일설에는 그가 총독부 건물이 있는 남쪽을 피해 일부러 북향 건물을 지었다고 하지만, 성북동은 남향 건물을 짓기 어려운 지형이다. 그만큼 부지를 선정하는 데 있어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남향 건물은 부자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가능했다. 그 외 서민들은 대부분 북향으로 집을 지어 살았다. 지금도 성북동을 가면 남향 건물들은 의리의 리한 저택이 많고 북향 건물들은 서민들의 주거지를 이루고 있다. 한용운의 '심우장'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해도 평소 한용운이 가지고 있었던 독립에 대한 의지,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을 고려하면 '심우장'에 대한 일화는 그를 더 영웅시화하는 것으로만 볼 수 없다. 한용운은 불교계에서도 끊임없이 혁신과 현실 참여를 주장했고 사회활동가로 온 힘을 다했다. 그는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심지어 일제 통치기간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거부했다. '님의 침묵'과 같은 그의 시는 한용운의 저항정신을 응축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한용운 동상

 



한용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수많은 역경에도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잃지 않았다. 최근 이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문구인 '꺾이지 않는 마음'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 한용운이었다. 그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의 대상은 오로리 조국,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었다. 한용운은 꺾이지 않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안타깝게도 한용운은 그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생전에 볼 수 없었다. 1944년 한용운은 지병으로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렇게 열반에 들었지만, 그의 발자취가 남은 '심우장'은 지금도 건재하다. '심우장'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이 살았던 곳 이전에 그가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교감했던 독립운동의 장소이고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심우장'은 2019년 4월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다만, 최근 이 지역의 재개발 진행으로 인해 그 모습이 변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심우장'은 잘 보전되고 한용운의 뜻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전해지기를 바란다. 


사진 : 독립기념관, 위키백과,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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