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은 지리적으로 여러 시군과 맞닿아 있는 내륙의 도시다. 서쪽으로는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 동쪽으로는 경북 구미, 남쪽으로는 경남 거창, 북쪽으로는 경북 상주와 경계를 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 탓인지 김천은 교통의 요지로 경부선 철도와 경부 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난다. 최근에는 한국 도로공사가 이전하면서 혁신 도시가 조성되고 발전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 이런 지리적 특성과 함께 김천은 소백산맥 지류의 금오산과 황악산이 동서로 시를 감싸고 낙동강 지류의 하천인 비옥한 토지를 조성해주고 있다. 이는 김천 곳곳에 멋진 경관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김천은 삼국시대 신라를 기원으로 하는 천년 고찰 직시사가 있고 그 직지사는 여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을 재조명했던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이 다시 고대사의 각 장면들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고대 왕국 고구려였다. 그 시작은 광개토대왕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왕은 얼마 없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함께 광개토대왕이 그중 한 명이다. 그만큼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우리 고대사에서 중요했다. 광개토대왕이 재위했던 391년 ~ 413년은 국내외로 격변의 시기였다. 멀리 유럽에서는 로마가 395년 동. 서로마로 분열되면서 절대 왕국이었던 로마제국이 사라졌고 중국은 위 진 남북조, 5호 16국의 혼란기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세운 5호 16국의 왕조는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며 수시로 충돌했다. 여기에 고구려는 남쪽..
전북 남원은 지역의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의 영역에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 과거 백제 영역이었던 익산에 세운 보덕국이 망하면서 그 유민들 다수가 남원으로 이주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남원은 삼국시대 모든 나라의 영향력 미치는 독특한 역사적 전통이 있다. 또한, 남원은 조선시대 고전소설이자 한글소설인 춘향전의 무대로 크게 알려져 있다. 난 원하면 떠오르는 이름인 성춘향과 이몽룡은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이다. 이런 역사적 전통이 함께 하는 남원은 지리산 자락의 청정 자연과도 함께 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는 남원을 지켜가고 있는 이웃들을 만나고 그들이 이야기와 함께 했다. 여정의 시작은 남원을 상징하..
4월 11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4월 13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4월 11일로 정정되었고 임시정부의 역사는 2019년 100주년을 이미 맞이했고 또 역사를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는 최초의 민주공화국의 시작이라는 점과 나라의 주인, 주권이 국민들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조선의 주인은 임금이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긴 했지만,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다. 그 전에 있었던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시도 등이 무산되고 오히려 전제군주제가 강화되는 역사의 퇴보였다. 이후 봉..
1987년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군사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국민들의 열망이 폭발한 폭풍 같은 시기였다. 1979년 12. 12 군사 반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힘으로 이를 제압하려 했지만, 분출되는 국민들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해 6월 29일, 국민들이 요구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끈 정권의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공권력에 희생되고 큰 고통을 받았다. 87년 6월 민주 항쟁은 그런 희생이 쌓이고 쌓여 이뤄낸 성과였다. 그리고 그해 6월의 열기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한 청년의 죽음이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6월 항쟁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
서울 용산은 한강과 맞닿아 있고 위로를 서울 종로로 아래로는 강남과 연결되는 말 그대로 요지 중 하나다. 하지만 용산은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긴 세월 외국 군대가 이용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땅에 들어온 청나라 군이 주둔한 지역이 용산이었고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러. 일 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식민 지배를 명확히 이렇게 일제에 의한 강점기 기간 용산은 일본군의 대륙 침략을 위한 후방기지로 기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일제가 물러난 후에는 미군이 최근까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긴 우리 근현대사에서 용산은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로 채워졌다. 미군이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