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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끝나지 않는 비극, 우크라이나 전쟁의 쟁점들

jihuni74 2022. 5. 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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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러시아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수개월간 지속된 전쟁에서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그 피해는 누적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이 시시각각 전해지면서 침략자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에 대한 분노도 커지고 있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은 대 러시아 경제제제를 강화하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한 군사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개전 초기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침략자와 맞섰고 많은 곳에서 러시아의 공세를 이겨내며 영토 밖으로 러시아 군대를 밀어내는 성과를 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공세의 초점을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해안 벨트를 중심으로 변경하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중요한 항구도시 마리우풀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됐다. 러시아군은 포위 공세로 마리우풀은 거의 장악한 상황이고 우크라이나 군은 항복 권유에서 굴하지 않고 최후의 항전을 이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다수 희생됐고 마리우풀 시내에 고립되어 고통을 겪고 있다. 일부 시민들이 전장을 탈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러시아군의 포위 속에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런 과정에서 한때 진전 가능성을 보였던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휴전 협상도 지지부진하다. 러시아의 무리한 요구가 원인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침략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건 항복과 같은 일이다. 전쟁의 양상도 변화했다. 우크라이나는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려 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휴전협상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일반 국민들은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런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누적된 양국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의 인근 국가인 벨라루스는 슬라브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각 나라의 독자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게 됐다. 이들 나라는 모두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슬라브족 왕국의 기원은 9세기 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된 국가인 키이우 루스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예로부터 비옥하고 광활한 대지의 땅으로 농업이 흥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는 유럽 최대의 곡창지대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밀은 유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우크라이나를 두고 유럽의 빵 공장이라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농업의 중요한 산업이었을 고대 우크라이나 지역은 풍요로움이 상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서유럽과 러시아, 흑해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도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위치 또한 이 지역의 중요성을 높였다.

이에 9세기 세워진 고대왕국 키이우 루스는 중계무역 등을 통해 큰 번영을 누렸다. 슬라브족들은 함께 그 번영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13세기 세계 최강국 몽골제국이 키이우 루스를 침략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키이우 루스 왕국은 멸망했고 왕국의 잔존 세력 중 일부가 북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모스크바 공국을 건국했다. 이는 러시아의 원형이 됐다. 몽골제국은 비옥한 농토가 있는 우크라이나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모스크바 공국에 자치권을 주며 간접 지배했다.

그 사이 모스크바 공국은 세력을 확장해 몽골제국의 세력을 밀어내고 러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이후 강성한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폴란드 왕국의 지배에 놓였다. 이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의 왕국 코사크 공국을 세우고 폴란드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 공국,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고 연합을 형성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쟁보다는 폴란드와의 협상을 택했고 두 강대국의 협의로 우크라이나는 동. 서로 나뉘어 지배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의 정서적 차이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됐다. 서부지역인 서구 유렵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대세를 이뤘다. 이는 친서방 성향이 강한 지역적 특색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간 동부는 정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친 러시아 성향을 강한 지역이 됐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폴란드의 세력이 약화되고 그 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또 한 번 변화를 맞이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에 속하게 됐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우크라이나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러시아가 혼란한 시기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 속 소련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은 쟁취하기 위해 당시 유럽의 강국 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런 시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되고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물거품이 됐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사회주의 소련 연방에 소속됐고 1991년 소련이 공식 해체될 때 까지 그 체제 속에 있었다. 이후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소련의 통치 기간 우크라이나는 큰 고난의 시간을 겪었고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다. 러시아에 대한 동. 서부 국민들의 크게 다른 시각은 나라의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역사 속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 됐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유 중 하나로 드는 건 우크라이나의 나치화를 들고 있다. 이는 푸틴이 직접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내 나치 즉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민족주의 역사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던 시기, 사회주의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는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났다. 그중 일부는 극단적 성향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이라 하는 그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 당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이유로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 문제는 그들이 나치 독일 이상으로 소수 민족에 대한 잔학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나치 독일 대신 유대인 및 소수 민족 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의 전쟁범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유대인 영유아들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하며 그 세력이 약화됐지만, 여전히 상당수 우크라이나 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고 러시아는 주장한다. 실제 존재하는 세력이었고 그들이 자행한 전쟁범죄의 기록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 세력이 우크라이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군중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는 건 각종 보도를 통해 알려져 있다. 아픈 역사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우크라이나의 나치화 위험을 주장하기는 부족함이 있다. 우크라이나 역시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과 관련해 부인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정체성과 관련한 대립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그들의 일부로 보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다. 러시아 제국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소련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세력 속에 있었다. 러시아는 소련을 사실상 계승한 나라다. 러시아인들의 정서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그들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인들 상당수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양국 갈등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과거 소련은 우크라이나의 원활한 지배를 위해 유화책과 강경책을 병행했다. 소련의 첫 지도자 레닌은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이에 레닌은 우크라이나 내에서 자치권과 자결권을 크게 인정했고 그들의 언어 사용을 오히려 장려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레닌에 이어 집권한 스탈린은 자치, 자결권을 축소하고 소련의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대신 우크라이나는 소련 공업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특히,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이 대표적이었다. 이 지역에는 대규모 공업도시가 건설됐고 노동력 확보를 위해 러시아에서 러시아인들이 대거 유입됐다. 이는 우크라이나 동부가 친러 성향을 보이는 또 다른 요인이 됐다. 스탈린이 주도한 소련의 공업화 정책은 큰 성과를 내긴 했다. 소련은 미국에 이어 제2의 공업국가로 자리했고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돈바스 지역은 그런 소련의 영광과 함께 한 지역으로 그 향수를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공업화 정책은 농업부분의 큰 희생을 전제로 한 일이었다. 농업 생산물의 이익을 대거 공업생산에 투자하면서 농촌은 집단농장 체제 속에 시간이 흐를수록 가난해졌고 많은 농업 생산에서 기아에 허덕였다. 대표적 농업 생산지였던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막심했다. 스탈린 통치 기간 우크라이나에서는 대규모 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었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소련은 지속적으로 소련의 영토를 넘겨주는 조치를 했다.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지도자들을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땅을 넘겨줬다. 대표적인 곳이 지금의 크름반도다. 이곳은 흑해로 진출하는 교두보이자 멋진 자연경관과 오랜 역사유적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 땅은 본래 소련의 영토였다. 소련 체제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그들의 행정구역 중 한 곳이었고 영토의 확대는 행정구역 조정 정도로 인식됐다. 이는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의 독립 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과거 영토 문제가 불거졌다. 당장 크름반도에 대해 러시아는 지배권을 주장하고 2014년 강제로 그 지역을 병합했다. 이전까지 크름반도는 상호 협정을 통해 러시아 해군이 지역의 한 항구를 사용하는 정도였지만, 푸틴은 크름반도는 점령하며 러시아의 영토로 삼았다. 마침 그 지역 주민들 상당수가 러시아에 편입되기를 원했고 러시아군의 기습작전에 우크라이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크름반도 영토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런 영토 분쟁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친 러시아 성향이 주민들이 다수를 이루는 돈바스 등 동부지역에서 갈등이 격화됐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 동. 서로 민심이 갈리며 갈등을 빚었다. 소련 붕괴 직후 들어선 우크라이나 정권을 친러 성향을 유지했지만, 친. 서방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에 돈바스를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 주민들은 자치국 설립을 추진했고 자치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를 저지하려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의 군사적 충돌을 불가피했다. 돈바스 지역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와 지역 주민들의 민병대 간 군사적 충돌이 이어졌다. 유럽 국가들의 중재로 협정이 맺어지기도 했지만,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런 군사적 충돌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하면서 자국민 보호를 또 다른 이유로 삼았다.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제공하는 등 지배권을 강화했다. 러시아는 지역 자치국의 독립은 승인하면서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가 총공세를 이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돈바스와 크름반도를 이어가는 남부 벨트의 요충지로 전략적 가치가 크다. 그 지역을 장악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 이르는 추가 영토를 확보할 수 있고 우크라이나의 해상 진출을 봉쇄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이는 사실상 우크라이나가 내륙 국가로 전락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큰 희생에도 마리우폴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최근 전쟁의 양상은 이런 영토분쟁의 성격이 강해졌다.

 또 다른 쟁점은 각종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보도된 나토의 확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와의 갈등이다. 러시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 친. 서방 정권이 추진하는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했다. 아울로 군사 연합체 성격의 나토의 동진에 대해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러시아는 나토의 영역이 그들의 영토에 접하는 데 큰 위협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서방이 약속한 나토의 확대 자제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지속 부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하면서 서방과 러시아 사이 완충지대로 남아있었다. 친. 러 정권이 지속하면서 그 우크라이나는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됐다. 막대한 농업생산 능력과 지하자원, 공업시설이 있었음에도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이전이 원활하지 않았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소수 기득권층의 부패가 나라의 발전을 막았다.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져만 갔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시절 그들 영토에 남겨진 핵무기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다. 이에 핵 확산에 민감했던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경제적 원조와 지원을 약속하며 우크라이나 지역의 핵무기를 폐기하도록 했다. 1994년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핵 폐기 비용을 보존 받고 경제적 지원을 얻어냈다. 당시로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핵 폐기는 우크라이나의 실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핵무기 운영 기술이나 미사일 기술이 뒷받침 안되는 상황에서 핵무기 보유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도 있지만, 핵무기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런 변화 속에도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국민적 갈등이 커졌다. 친서방 성향의 서부지역과 친 러시아 성향의 동부지역이 나뉜 우크라이나의 민심은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켰다. 급기야 친 러시아 정권이 친서방 성향의 국민들의 주도하는 시민혁명에 붕괴됐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는 지역적 대립 속에 정치 혼란이 지속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면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천연 가스관을 차단하는 등 경제제제로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감을 더 크게 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유럽연합 가입과 나토 가입이 국민적 여망도 있지만,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줄이고 경제 발전을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함께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의 경제 블록보다는 더 큰 기회가 있는 서구 유럽, 서방의 경제체제 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마침 이런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혼란 속에 새로운 지도가가 등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그 인물이다. 그는 코미디언이고 TV 시리즈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한 인물로 폄화되기도 하지만, 명문대 법학과 출신의 엘리트다.

물론, TV 시리즈가 대통령 당선에 큰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다. 그 시리즈의 주인공인 젤렌스키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권에서 정의로운 정치인으로 등장해 기득권 정치의 벽을 뚫고 대통령에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로 등장했다. 드라마의 내용은 결국 현실이 됐다. 그만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를 갈망했다.

2019년 젤렌스키는 대통령 당선 직후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을 더 강하게 추진했고 나토 가입을 가속화하려 했다. 이는 러시아의 강한 반발과 함께 결과적으로 러시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이에 젤렌스키의 외교력 부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는 친서방 정책 추진을 공약해 압도적 표차로 당선이 됐다. 나토 가입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의미도 있다. 그 이면에는 이런저런 역학관계가 함께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얽히고 설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전쟁의 종결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다시 그들의 영역 안으로 포함하려 하고 최소한 전략적으로 이점이 큰 영토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물러서지 않고 자주권을 지키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맞서고 있다. 이런 전쟁의 장기호는 필연적으로 전쟁과 상관없는 민간인의 피해를 키우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무차별 폭격과 포격 등을 통해 파괴행위를 하고 있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까지 내비치며 전 세계를 긴장하게 하고 있다. 또한, 내부 여론전을 전개하며 전쟁의 실상을 숨기도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 실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특별 군사작전으로 통칭되고 있다. 그들의 전쟁 범죄를 숨기도 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민관이 함께 힘을 합쳐 대항하며 전쟁 양상을 대등하게 이끌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실상을 알리고 여론전을 전개하고 러시아의 만행을 고발하며 세계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다. 하지만 전쟁의 장소는 우크라이나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크라이나의 몫이다. 

서방은 러시아에 반대하며 우크라이나에 각종 지원을 하고 있지만, 전쟁의 종식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은 주저하고 있다. 세계대전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그저 무기와 군수물자를 우크라이나에 전해주며 그들의 잘 싸우도록 응원을 할 뿐이다. 또한, 그 한편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움직임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제 속에도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등 구입이 이루어지고 그에 필요한 돈이 러시아로 흘러 들아가고 있다. 이는 대 러시아 제제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고 전쟁을 장기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을 포함한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대리전이 되고 있다.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쉽게 끝내기 어려운 상황에 몰려 있다. 그러면서 각종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 안에는 인간의 탐욕이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인 전쟁 앞에서도 변하지 않은 진리인 자국 우선주의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전쟁 후 국제 질서와 경제와 관련한 흐름 변화 등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다. 전쟁을 말하면서 그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따라온다. 보통 사람들의 대화에도 전쟁의 비극보다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 각종 악재가 주류를 이룬다. 전쟁의 비극은 그 뒤로 밀리고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원칙이 있다.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무고한 이들의 희생은 범죄라는 점이다. 전쟁의 득실 이전에 사람이 먼저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다면 전쟁의 승리도 의미가 없다. 그저 일부 권력자들의 영광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여전히 강대국들의 역학 관계 속에는 남북이 대치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전쟁의 비극에 눈 감으로 안되는 이유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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