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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59회] 제5공화국 대표적 종교 탄압 사건, 10.27 불교 법난

jihuni74 2022. 5.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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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5월 8일은 음력으로 4월 8일은 초파일 석가 탄신을,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매년 봄의 정점에 찾아오는 부처님 오신 날에는 그동안 거리를 수놓은 화려한 연등과 연등 행진 등 행사가 있었다. 연등행사는 고려 시대 나라의 가장 큰 행사였고 숭유억불 정책, 불교에 대한 억압 정책을 펼쳤던 조선 시대에도 왕실과 민간에서 중요한 행사로 여겨지며 많은 이들이 연등행사를 즐겼다.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그동안 코로나 사태로 실시하지 못했던 거리 연등 행사가 열렸도 많은 이들이 보다 편하고 자유롭게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하고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종교를 초월해 부처님 오신 날은 봄의 화사함과 어울리는 날이고 불교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날이다. 

이런 불교계에는 현대사 속 가장 아프고 치욕적인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1980년 10월 27일 일어난 불교 법난이 그 사건이었다. 10.27 법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며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이 제5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자행한 일이었다.

그 10월 27일은 7년 단임에 간선제 선출의 대통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반포되는 시점이었다. 실질적인 권력 기관이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본부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합동수사본부의 합동수사단은 군을 동원해 10월 27일을 기해 전국의 사찰과 암자 수백 곳을 수색해 승려와 불교계 인사들 100여 명을 체포했다. 10월 30일에는 그 범위를 더 넓혀 전국 수천 곳의 사찰과 암자를 수색했다. 그 수는 5,731곳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합동수사단은 1700여 명의 승려와 불교계 인사를 검거했다. 이유는 불교계 내부의 수배자 및 불순분자 검거였다.  또한, 불교계 비리 승려 색출과 반정부 인사들의 색출도 겸했다. 

하지만 이는 애초 무리한 일이었고 증거나 근거가 없었다. 합동수사단은 구속한 승려들과 인사들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함께 했다. 구속된 많은 승려들이 이에 고통받았다. 수사를 위해 공안 기관들이 동원됐다. 이를 통해 관련자들의 사임을 유도하고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이를 위해 종단과 사찰의 재산을 승려 등의 개인 축재 재산으로 연결하는 등 무리가 수사가 이어졌다. 당국에 의해 이런 상황들이 발표되고 언론 보도가 잇따르면서 불교계의 신뢰 상실로 이어졌다. 

이런 소란이 있었지만, 정작 신군부 세력이 원했던 범죄 행위를 거의 없었다. 대부분 구속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고 재판으로 넘어간 이들도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았다. 신군부가 명분으로 삼았던 불교계 비리 척결, 불교정화라는 명분은 완전히 힘을 잃었다.

대신 불교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신도 수가 줄었고 종단의 지도부 역시 신군부에 협조하는 이들도 재편됐다. 이후 불교계는 제5공화국 기간 침묵을 강요받았다. 이런 신군부의 종교 탄압이 밝혀진 건 오랜 세월이 흐른 이후였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불교계에서 진상 규명을 원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2005년 과거사 위원회가 세워지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었다. 

10.27 불교 법난은 신군부 세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제5공화국 세력의 사회 정화 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게 정설이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맞이한 민주화 분위기를 짓밟고 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은 그들의 집권 명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사회 정화 운동을 전개했다. 마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벌인 사회악 소탕작전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신군부는 우선 박정희 정권의 중요 인사였던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숙청했다. 이후 깡패들과 불량배들은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운영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에는 무고한 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고통받았다. 삼청교육대는 인권유린과 탄압의 현장이었다. 이런 사회 정화 운동의 실체는 신군부 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감시와 탄압, 사회 전반의 공포 분위기 조성을 통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회 정화 운동은 종교계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 천주교와 기독교 등 종교계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고 마지막 보루였다. 몇몇 성직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투옥되기도 했지만, 군사정권은 그런 종교계는 쉽게 공권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 속에 있는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한 억압은 자칫 외교 문제로 비하될 수 있는 정권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컸다. 신군부 세력 역시 이점을 모를 리 없었다. 

 

양양 낙산사 부처님

 


하지만 불교계는 달랐다. 상대적으로 국제적인 네크워크가 강하지 않았다. 또한, 불교는 대중들과 함께 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산속 사찰과 암자 등에서 수행을 전념하는 정적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조선시대 이후 계속된 불교 억압정책의 이유도 있었고 해방 후 들어선 미 군정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정권의 불교에 대한 이해 부족도 원인이었다. 이 점에서 불교는 타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교는 많은 신자들이 있는 종교였다. 

신군부로서는 불교계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수월하다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반정부 성향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여전히 넓은 저변의 종교라는 점은 신군부가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였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불교 최대 종파인 조계종에 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월주 스님은 전두환에 대한 지지 성명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월주 스님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위한 성금을 지급하는 등 지역민들을 지원했다. 신군부 세력은 이런 움직임을 만류했지만, 월주 스님은 굴하지 않았다. 조계종 지도부의 이런 모습은 자칫 불교계 전체의 반정부 움직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신군부 세력은 이런 불교계의 움직임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나라 3대 종교 중 하나인 불교계의 비리 척결과 정화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성역 없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명분을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신군부 세력이 원하는 불교계 지도부 구성도 가능했다. 실제 10.27 법난 과정에서 월주 스님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고 조계종 지도부에서 밀려났다. 일각에서는 신군부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방편으로 이를 이용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를 위해 신군부 세력은 사전에 이를 계획하고 신속하게 일을 진행했다. 관련 자료는 훗날 밝혀졌다. 

이후 상당 기간 불교계는 정권의 그림자 속에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유신시대부터 서서히 일어나던 불교계내 민주화 운동의 열기도 사그라들었다. 이는 불교를 다시 대중과 거리가 먼 종교로 만들었다. 이런 불교에 실망해 떠나는 신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10.27 법난은 불교계에는 아주 아프도 치욕적인 역사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교 법난의 총책임자인 전두환은 퇴임 후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퇴임 후 재임 시절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권력 남용 등의 문제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대통령 선거 이후 여당이 참패하며 여소 야대 정국으로 정치 지형이 재편됐다. 그의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도 그를 지켜주기 힘들었다. 

이에 전두환은 자청해 은둔을 결정했다. 그가 향한 곳은 설악산의 고찰 백담사였다. 불교 탄압의 주역이었던 독재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장소로 고찰을 택했다는 점은 큰 역설이었다. 마침 백담사는 일제 강점이 불교계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독재자가 의탁한다는 사실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 뻔뻔하게도 전두환은 10.27 불교 법난과 관련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하지만 불교계는 이런 전두환을 포용했다. 전두환도 이순자 부부는 백담사에서 귀거하며 그의 지지자들을 만나고 편안한 생활을 했다. 역사적 화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백담사에서 있었다. 

 

양양 낙산사 연등

 


이후 불교계는 민주화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는 시점에 이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며 대중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에서도 불교계 인사들이 적극 참여했다. 이렇게 불교계는 긴 암흑기를 벗어나 대중들과 함께 하는 종교로서 다시 자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종교는 대중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등 순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사회 속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과거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 종교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고 사회 소수자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이는 종교가 경제적 이익과 권력에 오염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를 통해 종교는 대중들의 존경을 받고 그 군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우리 종교는 일부이긴 하지만, 정치권과 유착되어 정치판의 플레이어가 되거나 종교를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등의 잘못된 행태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각종 사이비 종교가 대중들을 현혹하거나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도 볼 수 있다. 종교가 어떤 세속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종교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위치에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그 순기능을 포기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10.27 법난은 그런 정교의 순성과 가치를 국가권력이 파괴한 일이었다.  결코 특정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과 종교의 자유에 관한 문제였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없는 문제다. 부처님 오신 날의 기쁨 속에 숨겨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진 : 프로그램 / 지후니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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