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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깊어가는 봄 그리고 5월의 밤에 만난 덕수궁 야경

jihuni74 2022. 5. 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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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조선시대 축조된 5개의 궁이 있습니다. 조선의 법궁 역할을 했던 경복궁, 가장 많은 왕들이 거처로 삼았던 창덕궁, 이후 추가로 축조된 창경궁에 광해군이 축조했으나 그 흔적이 사라졌다 최근 일부 복원이 된 경희궁, 그리고 시청 앞에 자리한 덕수궁이 있습니다. 

이 궁들은 모두 조선의 흥망성쇠를 함께 했던 유적이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조선의 궁들은 구시가지와 건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는 유럽과 시대 흐름과 개발의 파고 속에 많은 유적들이 사라져간 서울에서 아주 귀한 유적입니다. 고층 빌딩과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 초록의 쉼터로 또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5월의 깊어가는 어느 날 밤, 그 궁궐 등 중 덕수궁을 찾았습니다. 문화해설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참여했고 야경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덕수궁의 전각 사진

 



덕수궁은 비운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과거 덕수궁은 왕족들의 살던 일반 사가였지만, 임진왜란 이후 궁궐이 모두 소실되고 피난을 떠났던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자리했습니다. 이후 기존 궁궐 중 창덕궁과 창경궁이 재 건축되면서 점점 궁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가 조선 말 고종 임금 시기 다시 궁궐이 됐습니다. 

고종은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고 중전 민씨,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 러시가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이후 친일 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낸 고종은 백성들의 궁궐로의 복귀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가 향한 곳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덕수궁에 자리했습니다. 당시 덕수궁은 경운궁으로 불렸습니다. 고종은 성대한 즉위식과 함께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하고 조선이 왕조 국가가 아닌 황제국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대한제국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고종은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고종은 인근에 각국 공사관이 밀집한 덕수궁에서 외교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었고 유사시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덕수궁을 궁궐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국운이 크게 기운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일제의 침략은 더 노골화되고 구체화됐습니다. 각지의 의병들이 일어나고 고종 역시 외교적 방법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을 통해 국권을 잃었습니다. 그런 치욕의 역사가 덕수궁에서 모두 일어났습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과 관련하여 강제 퇴위당했고 이후 경운궁으로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덕수궁의 유일한 복층 목조건물 석어당, 이 건물은 보기 드문 복층 한옥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생을 마칠때까지 머물렀던 곳이고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슬픈 역사가 함께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새어 나오는 빛 

 

 

인적 없는 순간

 

 

궁궐내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동.서양 양식이 혼재하는 정관헌

 

 

석조전 서관 분수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에 얽힌 비운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덕수궁의 밤 풍경은 그저 평화롭기만 합니다.  덕수궁은 동.서양의 건물이 혼재하는 독특함이 있지만, 역사의 모든 풍파가 있었습니다. 그 풍경들을 마음 가득 담아 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 속에 숨겨진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궁궐을 살핀다면 그 곳에서의 시간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멋진 야경을 보는 마음 한 편이 무거워 짐을 느꼈습니다. 

 

이런 궁궐의 야경과 함께 봄도 깊어 가고 있습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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