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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범 김구의 마지막 함께 했던 역사의 현장, 경교장

지후니74 2022. 6. 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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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은 백범 김구다. 그는 중국 현지에서 임시정부를 해방 때까지 이끌었고 임시정부는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큰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노선 갈등과 일제의 압박과 방해 공작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와해 위기에 있었던 임시정부를 새롭게 세운 건 김구였다. 그는 무장 독립투쟁을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애국지사들의 의거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일왕의 암살을 시도했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가 있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안타깝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일본군 장성 및 중요 요인들의 폭사에 성공하며 큰 성과를 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다시 국. 내외에서 주목을 받았고 우리 독립의지를 알릴 수 있었다. 아울러 중국 장개석 정부가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는 데 있어 큰 계기가 됐다. 

 

 

 

 

경교장 외관

 

 

백범 김구 흉상

 

 

과거 경교장 모형

 


임시정부는 이후 일본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며 발발한 중일 전쟁 과정에서 장개석 정부를 따라 상해에서 중국 내륙의 충칭까지 장거리 이동을 하며 고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김구는 이런 임시정부를 이끌며 중요한 구심점이 됐고 이후 광복군을 조직해 연합국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한편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전이 시행되기 전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지만, 김구 선생을 웃을 수 없었다. 우리 손으로 우리 광복군이 해방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전승국의 지위를 얻고 해방 후 자주권을 더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김구의 우려대로 해방 후 나라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속에 남북으로 분단되고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렇게 시작된 분단의 역사는 6.25 한국전쟁을 통해 더 고착화됐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구가 소망했던 통일된 조국은 여전히 미와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런 김구가 그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 서울에 있다. 지금 강북 삼성병원 내에 자리한 일본식 건물 경교장이 그곳이다. 경교장은 김구가 고국으로 귀국한 이후 그가 안두희 흉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 경교장은 김구의 마지막 거처이기도 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청사이기도 했다. 또한, 임시정부 세력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의 본부이기도 했다.  

경교장은 애초 일제강점기 광산 사업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친일파 거부 최창학의 소유였다. 최창학은 해방 후 김구가 귀국하자 이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친일파였던 그로서는 이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구로서는 이 건물을 사용하는 게 내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내에 전혀 기반이 없었던 김구는 자신의 물론이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 장소가 필요했다. 

 

 

1층 이모저모

 

 

지하층으로

 

 

고국으로 귀환전,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충칭에서의 기념사진

 

 

경교장 구조

 

 

임시정부 관련 자료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귀국을 하려 했지만, 과정은 어려웠다. 미국과 소련 모두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장개석 정부만이 임시정부를 인정했을 뿐이었다. 장개석 정부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 들어가면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방이 된 이후 한참을 지난 1945년 11월의 일이었다.

김구는 존경받은 독립운동가였지만, 이미 국내에는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구 역시 정치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김구는 정치가로서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경교장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할 수 있다. 대신 김구는 과거 이 건물을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이 아닌 경교장으로 개명해 사용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이렇게 시작된 김구의 경교장 시대는 1949년 6월의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 해 6월 26일 젊은 장교인 안두희가 통보 없이 김구를 찾았다. 이른 아침의 방문이었지만, 김구를 그를 맞아들였다. 안두희는 김구와 대면하자마자 준비했던 권총을 난사했고 김구는 그 자리에서 서거했다. 독립 영웅이자 민족 지도자의 허망한 최후였다. 이후 그의 암살과 관련한 배후와 관련한 여러 추측이 있었지만, 사건은 안두희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이 났다.

 

 

2층

 

 

김구가 머물렀던 장소

 

 

당당히 서있는 김구

 



안두희는 이후 가석방되어 군납 공장을 운영하는 등 부유한 삶을 살기도 했지만, 그의 악행을 단죄하려는 이들을 피해 긴 세월 은거 생활을 했다. 한때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암살의 배후 등에 대해 진술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돌연 마음을 바꾸는 등 진정한 참회와 반성을 보이지 않았다. 1996년 10월 안두희는 김구를 존경하던 인물에 의해 몽둥이로 맞아 사망했다. 그렇게 김구 암살과 관련한 진실은 묻히고 말았다. 

김구의 삶만큼이나 경교장도 여러 평지풍파가 있었다. 김구가 서거한 이후 경교장은 다시 최창학에게 반납됐다. 김구의 유족들은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후 경교장은 중화민국 지금의 대만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가 6.25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사용하기도 했다. 1960년대 경교장은 재벌 그룹이 매입했고 병원의 현관으로 사용됐다. 2,000년대 들어 경교장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465호로서 그 위상이 커졌고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복원작업이 마무리되고 병원 내 건물로 남아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는 김구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 가면 당시 건축 양식과 함께 임시정부 그리고 김구와 관련한 자료를 살필 수 있다. 김구가 암살됐던 현장의 모습도 재현되어 있고 해방 후 우리 역사의 단면들이 함께 하고 있다. 뒤늦게라도 이런 역사적 장소가 열린 공간으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 흔적

 

 

이 경교장을 살피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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