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김영철의동네한바퀴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3회] 동계 올림픽 도시 평창, 스스로 삶 꽃피워 가는 사람들

jihuni74 2022. 6. 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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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우리나라에서는 사상 최초로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그 장소는 강원도 평창군이었다. 평창은 3번의 도전 끝에 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했고 훌륭히 올림픽을 치러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남. 북 관계를 대화국면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멀게만 느껴지던 평창군을 한층 가깝게 느껴지게 했다. 올림픽을 전후로 조성된 고속 열차와 고속도로 등 교통망은 도시인들이 이곳을 더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실제 평창은 태백산맥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졌고 평균 해발 고도가 600미터에 이른다. 이런 평창에 동계 올림픽은 머나먼 산천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던 지역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3회에서는 여름의 길목에 있는 평창을 찾아 그곳의 명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화면에 담았다. 

산 정상 부근에 넓은 평원이 펼쳐진 청옥산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화창한 날씨 속 초록의 평원과 그 평원에 자리한 거대한 풍력 발전소 단지가 대조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청옥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랭지 채소 재배 단지인 육백마지기가 있다. 과거 산지가 많은 이 지역에 살던 화전민들이 일대를 개간하고 밭을 만들었다. 지역민들의 강인한 삶의 의지가 담겨있는 곳이었다. 이곳 말고도 강원도 산지의 고랭지 채소밭은 배추, 무 등 중요한 채소들을 공급하는 주요 생산지이기도 하다. 

육백마지기에는 최근 일부 지역에 야생화 단지가 조성됐다. 넓은 군락을 이룬 야생화들과 초록의 대지, 푸른 하늘이 함께 하는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제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점에 만나는 봄꽃들이 인상적이었다. 산지 아래 지역보다 계절이 느리게 흘러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봄이 되돌아온 듯한 풍경과 함께 했다. 

 

 


산 아랫마을을 찾았다. 평창의 중요한 물줄기인 평창강이 함께 하는 마을이었다. 좌측으로는 거대한 암석들이 병풍처럼 자리한 평창강의 풍경이 우측으로는 마을 길을 따라 피어난 꽃들이 걷는 길을 즐겁게 했다. 그 마을에서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이 보였다. 

이 집은 주인 부부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은퇴하고 이곳에 터를 잡아 전원주택을 지었다. 처음에는 도시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이곳에 자리했지만, 마을의 멋진 풍경을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 펜션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 덕분에 편안하게 여유 있는 전원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멋진 전원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부부에게는 더 행복으로 보였다. 최근 이 부부에서 큰 선물 같은 일이 찾아왔다. 딸이 아이를 가졌고 얼마 안가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멋진 정원이 있는 그들의 집에서 손자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상상만으로도 즐겁기만 하다. 노년에 또 하는 행복을 만들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평창 읍내로 들어섰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결혼식장 건물과 오래된 간판의 상가들을 따라 걸었다. 그 길에 빛바랜 간판이 걸려있는 오토바이 수리점이 보였다. 1980년 대 부터 문을 연 이 수리점은 이 자리에서 40년 넘게 운영 중이라 했다. 수리점의 사장님은 인근 강릉에서 기술을 배웠고 평창에서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수리점은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다. 농촌에서 산촌에서 오토바이는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고 많은 이들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평창 읍내에는 3개 수리점이 성업했다. 하지만 점점 자가용이 보급되고 사람들의 교통수단이 달라지면서 수리점의 수요가 줄었고 지금은 이 수리점과 남아있다. 사장님은 남들이 떠나가는 와중에서 수십 년 세월 수리점을 지켰다. 평창 읍내의 유일한 오토바이 수리점은 지역의 오토바이 운행자들에게는 너무 소중한 곳이었다. 

사장님은 과거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원했던 학업을 하지 못했다. 그는 초등학교마을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후 그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오토바이 수리점을 열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배우지 못한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과거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제 그에게는 잊지 않고 그를 찾는 단골손님들과 그의 일생을 함께 한 수리점이 있다. 그는 오늘도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의 삶을 또 다른 기억들로 채워가고 있었다. 

읍내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통시장에 가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먹거리가 이곳에서 있었다. 특히, 지역의 특산물인 메밀을 재료로 하는 메밀전 골목은 구수한 향기로 가득했다. 무쇠솥뚜껑에 각종 야채가 곁들여져 구워낸 메밀전이 침샘을 자극했다.

메밀전 가게 한곳을 찾았다.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부부는 식당을 운영하다 메밀전 가게를 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식당보다 일이 덜 복잡할 줄 알고 시작했지만, 막상 해보니 더 손이 가고 바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세월이 겹겹이 쌓이면서 메밀전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과거 쌀이 귀했던 지역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메밀이었다.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 됐고 메밀로 만든 요리들이 별미로 통하는 세상이 됐다. 평창의 한 전통시장에는 그 메밀을 구수한 전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평창의 한 공원을 찾았다. 초록의 잔디 정원에 거대한 바위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살피니 기묘한 모양의 수석들이었다. 과거 평창 읍내를 개발하면서 발견한 수석들을 챙겨 이 공원에서 전시했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바위공원은 평창의 명소로 자리했다.

공원을 지나 봉평 전통시장을 찾았다. 봉평장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문인지 여느 시장과 다른 느낌이었다. 지역에서 나는 표고버섯이나 즉석에서 튀겨내는 도넛, 강원도의 또 다른 특산물인 옥수수를 삶아낸 먹거리를 맛보며 걸었다. 그 길에 메밀껍질이 들어간 베개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메밀의 찬 성질은 한 여름 베개를 시원하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 

베개는 물론이고 각종 침구류를 판매하는 가게는 이 시장에서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노포였다. 지금 사장님은 시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았다. 시 아버지는 40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고 사장님은 30년 세월을 보냈다. 시아버지는 다른 지역에서 농사일을 하다 이곳에 정착해 가게를 열었다.

처음 자신의 가게를 연 시아버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를 열었다. 그 근면함으로 가게는 자리를 잡았다. 며느리는 이런 시아버지 밑에서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당시는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의 빈자리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며 만들었던 시아버지의 메밀베개를 이제는 며느리가 만들고 있다. 메밀베개는 가게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렇게 수십 년 가게의 역사는 대를 이어가며 이어지고 있었다. 

읍내 길을 다시 걸었다. 그 길에 청년 사장이 운영하는 분식집이 보였다. 주메뉴는 떡볶이였는데 요즘 트렌드에 맞게 치즈가 듬뿍 들어가거나 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이 청년은 어린 시절 가족이 귀촌하면서 평창에서 자랐다. 그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는 아픔이 있었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런 그에게 할머니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소중한 존재였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각별했다. 고기가 가득 들어간 떡볶이는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담긴 요리였다. 그때 손자는 지금 떡볶이집 사장님이 되어 할머니의 떡볶이를 만들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다른 가족들은 평창을 떠났지만, 그는 이곳에 남았다. 홀로 남겨진 그에게 막막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할머니의 체취 가득한 평창을 떠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맛을 재현하며 분식집을 차렸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에게 이 떡볶이는 할머니와 그를 연결하는 존재로 보였다. 그렇게 그는 할머니와 함께 하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평창강으로 흐르는 시원한 계곡물이 있는 공원을 찾았다.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니 잘 정돈된 농원이 있었다. 다양한 꽃들과 허브가 자라는 농원은 찾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줬다. 이 농원의 주인은 노부부는 30여 년 전 오랜 세월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귀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정착했다. 농원 역사의 시작이었다. 부부는 땅을 개간하고 공원을 만들고 꽃을 키웠다. 

그러면서 농원의 규모도 커졌다. 이제는 지역의 중요한 명소로 자리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도 이 농원을 지역 명사로 지정했다.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지금도 이 농원에 오면 멋진 정원과 함께 허브를 이용한 각종 체험을 할 수 있다. 처음 이 농원은 부부의 귀촌 꿈을 이루는 장소였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장소로 발전했다. 지금은 부부와 함께 딸이 힘을 더하며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공한 삶을 살아온 부부였지만, 부부의 소원은 소박했다. 남편은 과거 암 투병을 하는 등 큰 고비가 있었지만, 강한 의지를 이를 극복했다. 그런 남편은 소망은 아내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라 했다. 아내는 이런 남편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기만 하다. 어쩌면 부부에게는 돈과 명예보다 가족들이 건강하게 멋진 풍경 속에서 매일매일 함께 일하는 게 최고의 행복으로 보였다. 

세상은 여름의 길목에 있었지만, 평창군의 시간은 조금 늦게 흘러가고 있었다. 높은 산지로 이루어진 탓에 봄이 늦게 찾아온 탓이었다. 대신 매년 빠르게 지나가는 봄 풍경을 놓친 인들에게 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주는 곳이 평창이었다. 그리고 평창에는 자신들의 삶을 조금 느리게 꽃피워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창의 자연 속 그 이웃들의 삶을 살펴본 여정은 그래서 아름다운 시간들로 채울 수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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