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김영철의동네한바퀴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7회] 세월 흐름 속, 한결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 의정부

jihuni74 2022. 7. 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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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중북부에 자리한 도시 의정부시는 경기 북부지역의 행정, 교통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 자리했다. 의정부시에는 경기도 북부청사와 경기도 교육청 제2청사, 의정부 지방법원, 경기도 북부경찰청 등 다수의 관청들이 있다. 의정부시는 북으로 군사 접경 지역과 접하고 남으로는 서울시와 경기를 접해 6.25 한국전쟁 후 군사도시로서의 기능도 담당했다. 실제 최근까지 미군 기지가 의정부에 있었다. 

의정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중요한 행정기관인 의정부와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조선시대 각 행정관청은 물자 공급과 경비 충당을 위해 논밭인 둔전을 지방에 두고 관리했다. 지금의 의정부는 조선시대 의정부의 둔전이 있었고 그것이 지역명의 유래가 됐다고 하는 게 정설이다.

그 외에 야사라 할 수 있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에 밀려 왕위를 내주고 함흥에 칩거하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의정부 호원동에 머물렀고 이런 이성계를 만나 국정을 논하기 위해 관리들이 찾아 머물렀다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렇게 조선시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던 의정부를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7회에서 찾았다. 그곳에서 의정부의 변화와 함께 하며 이곳을 지킨 이웃들과 만났다.

이른 아침 의정부의 중심지 의정부역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역사 주변의 도시 중심가를 걸었다. 걷던 중 앞서 언급한 이성계의 설화와 관련한 이야기가 함께 하는 이성계 동상을 만났다. 잠시나마 역사의 한 장면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의정부 중심 상가 거리를 찾았다. 이른 아침 문을 열지 않은 점포가 많아 한적한 느낌이었지만, 그 길을 따라가다 만난 의정부 제일시장은 하루 장사를 위한 바쁜 움직임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 시장은 6.25 한국전쟁 후 활성화됐고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는 지역의 대표적 시장이었다. 그 시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에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반찬가게 그리고 젊은 사장님과 만났다. 이 반찬가게는 외할머니,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를 이어받아 함께 운영 중이라 했다. 3대가 함께 하는 반찬가게로 수십 가지의 다양한 반찬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 사장은 외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아 직접 반찬도 만들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20대 젊은 나이로 학창 시절부터 다양한 경험과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반찬가게에서 일을 시작했고 점점 일이 익숙해지고 이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직 젊은 나이고 또 다른 기회를 찾을 수도 이었지만, 그는 가업을 잇는 게 가치 있고 비전 있는 일임을 확신했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이 흘렀고 그는 능숙한 장사꾼이 됐다. 외할머니는 이런 손주를 보면 그저 흐뭇할 뿐이다.

처음에는 외할머니, 어머니의 조력을 받았던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가게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 그 가게의 중심이 된 청년 사장님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하길 기원하며 장소를 옮겼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한적한 동네를 찾았다. 그 동네의 골목에서 오래된 부대찌개 식당이 보였다. 부대찌개는 미군부대 인근의 식당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의정부지역이 원조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소시지나 햄을 넣어 끌인 찌개는 애초 먹을게 부족했던 시절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먹었지만, 이제는 보편적인 찌개가 됐다.

이 부대찌개 식당은 부대찌개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었다. 식당의 주인은 90살이 넘은 어머니와 70살이 넘은 딸 두 모녀였다. 노년이 된 두 모녀는 이 식당에서 거의 평생을 함께 했다. 어머니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식당을 시작했고 딸은 그 어머니의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밟혀 시집을 간 이후 얼마 안가 이곳으로 돌아와 살았다. 남편과 오래전 사별하는 아픔을 겪은 이후 모녀는 식당을 터전 삼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그렇게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와 딸은 그 세월 속에 노년의 나이가 됐다. 그 사이 어머니는 치매를 앓으면서 최근의 기억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가끔 자신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지만, 딸은 건강하게 어머니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했다. 그리고 이 식당은 어머니의 기억을 지탱하는 소중한 장소였다. 어머니는 식당에서만큼은 더 활력이 넘쳐 보였다. 이 모녀가 하는 부대찌개 식당은 그들의 인생이 함축된 곳이었다. 그 인생이 담긴 부대찌개와 부대 볶음이 더 특별했다. 

다시 의정부 구도심의 골목길을 걸었다. 마침 공원에서 마을 주민들이 음악에 따라 함께 율동을 하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마을 주민들을 이끄는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지역 청년 조합의 구성원들이었다. 이 마을의 청년조합은 의정부 지역 청년들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걸 지원하고 점점 노령화되는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과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취지로 설립됐다. 

이 마을의 청년조합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지방이 점점 공동화되고 인구 감소로 지역 소멸의 우려가 커지는 시기에 지역을 살리고 청년들이 떠나는 곳이 아는 정착하고 돌아오는 지역으로 만들려는 노력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청년들과 마을 주민들은 함께 더 나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토론하고 고민하며 공동체로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노력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면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는 미군들이 떠난 미군 부대 주변의 한마을을 찾았다. 거리는 미군들을 상대로 한 상업시설과 편의 시설 등의 간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한때 미군들로 북적였을 이곳의 풍경은 사라지고 적막감만 남아있었다. 한때 크 번성했을 마을은 쇠락하고 지친 노인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한적한 마을이지만, 이곳을 지키는 주민들이 있었다. 대부분 노년의 나이가 된 주민들은 6.25 한국 전쟁 후 많은 변화를 겪었던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떠나가는 마을이지만, 그들의 인생을 함께 한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오랜 추억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를 의지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는 3개의 가게 중 한 가게를 찾았다. 철물점이었다. 

철물점의 사장님은 20대 나이에 먼 곳에서 이 마을도 시집을 왔고 70살이 넘은 나이가 됐다. 초창기에는 살아오면서 만나지 못한 미군들이 마을 곳곳에 보이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마을에 정을 붙이고 살게 됐고 철물점에서 남편과 일하면서 웬만한 기계 수리가 가능할 정도의 기술자도 됐다. 주 고객인 미군들을 상대로도 능숙하게 장사도 했다. 

지금은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미군도 떠나면서 조금은 외롭게 가게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 가게와 동네를 떠날 수 없다. 그의 삶과 함께 한 장소에 너무나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찾는 이들도 거의 없지만, 사장님은 반찬가게를 겸하면서 가게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사장님에게 돈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와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한 이웃과 가게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미군 부대 인근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 역시 미군들이 떠나고 공허함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과거 이 마을의 풍경을 재현한 벽화들이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추억하게 하고 있었다. 그 마을 길을 걷다고 오래된 클럽이 있어 들어가 봤다. 한 노인분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이 클럽은 미군들을 상대로 운영되던 클럽으로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은 클럽이라 했다. 그는 이 클럽의 마지막 지배인이었다. 그는 6.25 한국전쟁 당시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됐다. 그런 그를 한 미군이 돌봐주며 미군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그 외에도 많은 고아들은 미군부대에서 그들의 심부름을 해주며 살았다. 그 역시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 등 일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그는 1970년대 인연을 맺었던 미군이 미군들을 상대로 한 클럽을 열자 이곳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게 됐다. 미군 부대에서 오랜 세월 일한 탓에 그는 미군들과 친분이 있었고 쉽게 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클럽 안에는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미군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는 노인이 됐고 고아가 된 그의 손을 잡아준 미군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미군 클럽도 미군이 떠나면서 활기를 잃었다. 하지만 지역의 문화원에서 이 클럽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클럽을 인수해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클럽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됐다. 

의정부의 신도시 지역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를 걷다 도넛 가게를 만났다. 아담한 그 가게는 영국식 도넛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 가게의 청년 사장님을 만났다. 그는 과감히 대학을 중퇴하고 성공을 위해 사회의 경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았고 수차례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기 보다 실패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는 독학으로 제빵 기술을 익혔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도넛 가게를 열었다. 이전 실패를 교훈 삼아 보다 체계적으로 가게를 알리고 지역에 정착했다. 이제는 맛을 아는 단골들도 생기고 가게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의 진짜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그는 지금도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가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인근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오래된 마을을 찾았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빈 집과 상가가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에 세월의 흔적 가득한 가게가 보였다. 옛날 말로는 구멍가게라고도 불리는 이 가게는 노년이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부부는 이 마을 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80살을 훌쩍 넘겼고 인생의 황혼기를 함께 보내는 중이었다. 

가게와 주인은 세월의 흐름 속에 늙었지만, 부부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찾는 이는 크게 줄었지만, 부부는 부지런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인근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와 야채, 할머니가 직접 만든 도토리묵은 어디에서도 없는 이 가게만의 상품이었다. 

부부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인 이 가게지만, 이 가게를 얻기까지 부부는 가난과 치열하게 싸웠다. 5남매를 키워내기 위해 부부는 밤낮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이제 자식들이 모두 장성해 그들 품을 떠났고 부부는 이 가게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생의 끝자락을 함께 하고 있었다. 내세울 것도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온 부부였다. 하지만 부부는 자식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게 한스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라도 더 잘해주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을 이 노부부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이 노부부는 늘 그러했듯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일할 힘이 있는 게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 의정부에는 변함없이 그리고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시대는 변하고 많은 것이 변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삶의 가치가 지켜지는 건 이런 이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의정부시에서의 여정은 일상과 그 일상을 오랜 세월 지켜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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