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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미국의 힘,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달러, 그 역사

jihuni74 2022. 7. 2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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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공부하다 보면 나라 간 돈거래, 외환시장의 영역에 닿게 된다. 그 외환시장에서 미국 돈, 달러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달러에는 기축통화라는 별도의 명칭이 더해진다. 기축통화는 사전적 의미로 각 나라의 돈이 교환될 때 수단이 되는 통화를 말한다. 즉, 수출과 수입에 있어 대금의 결제를 이루는 수단은 대부분 달러다. 이에 달러를 교환할 때 그 비율을 정하는 환율은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준다. 

이는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과 인하 정책에 전 세계가 집중하는 이유다. 미국이 달러는 시장에 얼마나 풀지 그리고 다시 회수할지에 따라 각 나라의 환율이 요동치고 그 환율에 따라 돈의 흐름이 결정되고 주식시장과 일반 시민들의 생활물가 등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달러 환율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 경제 동향을 주목해야 하는 세상이다. 

실제 코로나 팬데믹 기간 미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이 정부 차원에서 각종 현금 지원을 활발히 하면서 많은 돈이 시중에 풀렸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했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양적완화를 통해 많은 달러를 공급했다. 그렇게 풀린 달러는 최근 큰 인플레이션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석유 등 원자재 가격 급상승 등의 변수가 더해졌다. 이에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빅스텝이라는 불리는 큰 폭의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시중에 풀렸던 달러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의 도미노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금리 인상은 경제 전반에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만큼 미국의 달러는 미국의 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달러가 그만큼의 지위를 가지는 건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이 그 바탕에 있다. 달러와 함께 기축통화로 유로, 엔화, 파운드, 위안화 등이 공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달러의 영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달러의 영향력은 초강대국 미국의 성장과 그 역사를 함께 한다. 

 

 

 



미국의 달러는 그들의 건국 역사과 함께 하지 못했다. 영국 식민지와 독립전쟁, 미합중국으로 독립을 하는 과정에서 달러는 없었다. 

미국 화폐의 역사는 영국 식민지 시절 건국 초기 미국 상. 공업의 중심지 보스턴에서 시작됐다. 미국에는 다수의 이민자들이 유입됐고 그들은 각 나라의 화폐를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각 나라의 금화와 은화는 경제 활동 시 지불 결제수단으로 활용됐다. 한때 미국 내 자체적인 화폐 발행 움직임이 있었지만, 미국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던 영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사회적 문제가 됐던 위조화폐의 유통도 새로운 화폐 발생에 걸림돌이었다. 

영국은 위조화폐 문제 해결을 위해 당대 최고의 과학자인 뉴턴을 조폐국장에 임명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뉴턴은 화폐의 중요한 수단인 동전의 위조와 변조를 막기 위해 동정 테두리에 톱니바퀴 모양의 홈을 파도록 고안했다. 이 방식은 지금도 각국의 동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내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고 경제규모가 크게 확대되면서 화폐 부족 현상이 심화됐다. 미국에서는 영국 외에 프랑스와 스페인 화폐도 함께  사용했다. 상대적으로 물량이 풍부한 스페인 화폐가 점점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각 주에서 발행하는 지금의 약속어음 형태의 지폐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지폐는 통일된 규격도 없었고 위조에 취약했다. 또한, 각 주마다 무분별하게 발생되면서 문제가 됐다. 

미국 화폐제도에 전환점이 된 사건은 미국의 독립전쟁이었다. 미국은 전쟁을 위해 막대한 군비가 필요했다. 중앙 정부 차원의 군비 조달 방안이 마련됐다. 정부가 발생하는 지폐인 콘티넨탈 노트가 대량으로 발행됐다. 콘티넨탈 노트는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면 스페인 화폐와 교환하도록 했다.

하지만 1775년부터 3년간 지속된 전쟁 중 대량의 화폐가 발생되고 유통되면서 화폐가치가 크게 하락했다. 전쟁 기간 영국이 미국의 경제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위조 콘티넨탈 노트를 다량으로 유통하면서 혼란이 더해졌다. 이에 물가는 크게 올랐고 국민들은 지폐 사용을 꺼려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통화 상황은 독립전쟁 승리 후 들어선 미합중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됐다. 독립 후 미국에는 다수의 민간 은행이 설립됐고 금융시장이 활성화됐다. 그 와중에 미국 정부는 전쟁 기간 다량으로 유통된 콘티넨탈 노트의 처리와 난립하는 민간은행들의 통제를 위한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미국 초대 재무 장관에 임명된 해밀턴이 이를 주도했다. 그는 중앙은행 설립을 통해 국채를 발행해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미국 자체 화폐 발행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개인과 각 주의 자유를 중시하는 반대 여론과 충돌했다. 중앙은행 설립은 논란 끝에 의회의 승인을 받아 1791년 이루어졌다. 하지만 20년 기간을 정한 한시적 기구였다. 미국인 비로소 연방 주조국을 통해 자체적인 금화와 은화를 발생했고 중앙은행을 통해 정부의 재정관리와 세금 관리, 은행들을 감독했다. 순기능이 적지 않았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 침해라는 반대 여론은 여전히 강했고 중앙은행은 20년의 존속 기간이 지나고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미국에는 우려했던 대로 다수의 은행이 난립하고 은행마다 자체적인 화폐를 발생하면서 시장 전반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그렇게 발행된 화폐의 종류를 무려 9천여 개에 이르렀다. 이에 각 화폐의 교환가치를 알려주는 별도 경제지가 등장하기도 했다. 다양한 화폐에 비례해 위조화폐도 함께 증가했다. 9천여 개의 화폐에 5천여 개의 위조 화폐가 공존하는 시기가 1830년대부터 1860년까지 계속됐다. 지금의 화폐, 통화 시장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경제 상황이었다. 

다시 한번 미국 경제에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생했다. 북부와 남부의 정부는 전비 조달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다량의 화폐를 발행했다. 링컨의 북부 미연방 정부는 그린백이라는 불렸던 지폐를 발생했다. 지금의 달러의 원형이 그때 만들어졌다. 그린백은 상대적으로 복제와 위조가 어려운 녹색의 화폐였다. 하지만 대량의 화폐 발행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물가 상승 등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전쟁 후 미 정부는 그린백을 지속적으로 회수 소각하면서 화폐 유통을 줄였다. 지금의 통화조절과 같은 모습이었다. 한편으로 남북 전쟁 후 미국에서는 통화의 기준을 놓고 금본위제, 은본위제 대한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결국 미국은 1900년대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금 보유가 월등한 미국 동부지역, 금융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 외 미국의 농민 등 하층민들에게 금본위기에는 크게 불리했다. 금본위제는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과 함께 빈. 부의 격차를 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대한 풍자는 유명한 소설이자 만화나 영화로도 제작되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에서도 드러나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 도로시는 미국의 농민이나 중산층 이후 일반 국민을 상징한다. 그가 살았던 캔자스는 금본위제 채택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미국 농업지역이다.

도로시는 미지의 세계로 날려버린 토네이도는 미 동부에서 밀려오는 경기 침체 또는 자본가 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도로시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 중 허수아비는 서부지역의 농민, 양철 나무꾼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도시 노동자, 겁쟁이 사자는 말과 행동이 다른 미국의 정치인, 서쪽 마녀는 당시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 정치인, 동쪽 마녀는 JP 모건이나 록펠러, 카네기 등 미국의 대 자본가들, 주인공들이 향하는 에메랄드 성은 그 색이 그린백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오즈의 마법사는 당시 미국 대통령을 나라의 이름 오즈는 금의 무게 단위인 온즈를 주인공들이 걸었던 노란 벽돌 길은 금본위제, 도로시가 신었고 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지는 매개체가 된 은 구두는 은본위제를 상징하다. 물론, 이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금본위제와 은본위제를 둘러싼 논란이 얼마나 미국 사회에서 큰 이슈였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금본위제가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금융 통화 전반을 통제할 기구의 필요성은 여전히 강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다시 커지는 상황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진이 일어났고 그 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 지역의 건물들 상당수는 영국의 보험사에 보험을 가입하고 있었다. 영국 보험사에서 막대한 자금, 금이 보험금 지급을 위해 미국으로 유입됐다. 영국으로서는 국부의 유출을 막아야 했다. 영국은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미국의 자금이 다시 영국으로 향했다. 이는 미국의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 

 

 

 



미국의 대자본가 그룹인 JP 모건 등이 막대한 자금을 금융 시장에 공급해 위기를 넘겼지만, 금융 시장을 더는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중앙은행 설립이 다시 논의됐고 마침내 연방준비제도로 불리는 중앙은행이 설립됐다. 이 중앙은행에서는 1914년 미국의 화폐 달러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달러 역사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초기 달러는 금과의 동과 교환 태환제도를 기반으로 했다. 금본위제의 원칙이 유지됐다. 발행하는 화폐에 비례해 금을 은행이 예치하고 있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금본위제를 흔들었다. 미국은 전쟁 초기 유럽의 전장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지만, 생산기지의 역할을 했다. 군수품 생산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화폐 통화량이 증가했다. 화폐가치 하락이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유럽에서 막대한 금이 유입됐다. 어느새 미국인 세계 최대의 금 보유국이 됐다. 이를 통해 금본위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이 경제 전반에 큰 침체를 불러왔다. 다수의 회사와 은행이 파산하고 대량 실업사태가 발생했다. 다시 한번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한 통화 제도가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전쟁이 세계 경제를 흔들었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받으며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본토에 피해가 없었다. 대신 군수 생산기지로서 큰 역할을 했고 세계 최대 공업국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전까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었던 영국을 밀어내고 세계 최고 경제국으로 발전했다. 유럽을 포함한 세계 각국이 전후 복귀 등으로 고심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자유로웠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다. 이는 세게 경제에서 미국의 위상을 끌어올렸고 달러의 가치도 급상승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질서가 만들어지면서 달러는 중요한 통화 결제 수단으로 자리했다. 1944년 미국 주도로 세게 주요 나라들이 모여 경제 질서를 정립했다. 브레턴우즈로 불리는 세계경제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달러는 국제 결제 기존이 되는 기축통화로 공인됐다. 전 세계 금의 70프로 이상을 보유한 미국이었고 화폐를 금으로 태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다. 이와 함께 달러를 기준으로 한 고정환율 제도가 만들어졌고 국제 통화량을 조절하는 국제통화기구 IMF가 설립됐다. 전후 부흥과 개도국 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 부흥은행 IBRD도 설립됐다. 이런 일들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 

이렇게 세계경제를 이끄는 중심 국가가 된 미국은 전후 유럽의 재건을 위해 마셜플랜을 통해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분야에 막대한 지원을 했고 세계 각국의 개발도상국에도 상당한 원조 및 지원을 했다. 미국과 소련 중심으로 냉전체제가 들어서면서 양 강대국은 경쟁적으로 그들의 우방에 경제적 지원을 했다. 하지만 그 한편에서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의 충분한 공급을 위해 무역과 재정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트리핀 딜레마로 불리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미국 주도의 브레턴우즈 체제의 역설과도 같았다. 

이런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됐다. 미국은 만성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막대한 달러가 발행되고 유통됐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달러의 유통량을 더 확대했다. 점점 보유한 금을 훨씬 능가하는 달러가 발행되면서 금본위제가 흔들렸다. 이는 달러 가치의 하락과 각 나라의 금선호 현상을 부추겼다. 달러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깜짝 선언을 했다. 그는 브레턴우즈 체제를 지탱하던 달러와 금태환 제도를 폐기했다. 당시 미국은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경기 침체가 동반된 상황이었다. 달러의 가치 방어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자국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달러 가치의 하락도 감수했다.

 

 

 



이후 세계 경제질서도 재편됐다. 1976년 킹스턴체제가 들어섰다. 이 체제 속에서 각 나라의 환율 제도는 고정환율과 변동환율 제도를 선택하도록 했다. 금의 통화 기능도 폐지됐다. 금본위제의 포기였다. 이와 함께 달러는 그 자체만으로 기축통화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됐다. 금본위제는 사라지고 최대 경제대국 미국의 신용만으로 달러가 기축통화의 기능을 유지한 셈이었다. 이로써 미국의 경제 상황과 통화 시장의 상황에 따른 세계 경제의 유동성은 한층 더 심화됐다. 

단적으로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는 전 세계가 경제 대공황과 같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미국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대폭적인 금리 인하와 대량의 달러를 시장에 공급했다. 그전까지 하지 않았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의 기업 주식 매매 등 시장 개입을 하기도 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경제 위기를 넘겼지만, 시장에 과잉 공급된 달러는 세계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최근의 코로나 사태로 달러 공급량이 더 크게 늘었다. 

결국, 코로나 팬데믹 상항이 완화되고 경제활동이 정상화되면서 큰 폭의 인플레이션이 현실이 됐다. 미국은 자국의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금리를 크게 올리고 통화량일 줄이는 조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인플레션 압력과 함께 미국의 재정적자는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이는 전 세계 경제에 큰 변수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경제의 작은 날갯짓이 전 세계 경제에 큰 폭풍을 일으키는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는 미국의 엄청난 힘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지만, 특정 국가의 경제 상황에 종속된 세계 경제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달러의 역사는 세계 경제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달러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따라 세계 경제의 역사도 계속 변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과거 달러의 급속한 유출로 IMF 경제 위기의 아픈 역사를 경험했다. 이는 우리 삶 전반을 변화시켰다. 달러는 단순히 미국 돈이 아닌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달러의 역사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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