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미디어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숙명이 된 민중가수의 삶 넘어, 누군가 빛나게 하는 그림자로

jihuni74 2024. 5. 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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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 '상록수'는 세대를 넘어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고 듣은 우리 가요의 명곡들이다. 이 곡들이 수록된 최초의 음반은 우리 가요사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전 우리 가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는 이 곡들이 꽤 오래전 발표된 곳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곡들은 한때 금지곡으로 불리며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공식 행사 등에서 불리거나 들을 수 없었다. 

곡이 발표된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까지 이 곡들에는 좌익 용공세력이라 불렸던 운동권의 노래, 불온한 노래로 낙인찍혔다. 당시는 5.16 군사정변 이후 권력을 차지한 군인들이 군복을 양복으로 바꿔 입으며 나라를 지배한 군사독재의 시절이었다.

그 군사 독재는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거치며 또 다른 군사독재로 이어졌다. 그 시절 이 독재정권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좌익 용공세력의 딱지가 붙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력들에게 독재권력은 그들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몰았다. 남. 북이 대치하고 전 세계가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구도에서 반공은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권력을 사유화한 세력들에게 반공은 아주 유용한 무기였다. 이를 토대로 독재권력은 사상, 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억압했다. 언론, 출판, 예술 활동의 사전 검열은 일상이었다. 조금이라도 권력에 해가 될 것 같은 창작물은 대중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독재시대, 불온한 이들의 노래 '아침 이슬', '상록수'


그들에게 반정부 시위대, 빨깽이들이 부르는 '아침이슬'과 '상록수'와 같은 노래는 절대 불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노래를 만든 이는 당연히 좌익 용공분자로 취급됐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20대 젊은 대학생 음악가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자신의 의도와 달리 반정부 인사가 됐고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후 그의 삶은 음지를 지향하며 의도치 않게 민중가수로 변화했고 거대한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게 됐다. 

그 이름은 김민기, 얼마 전 폐관된 대학로의 대표적인 소극장인 학전의 대표자였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학전이 폐관하다는 소식은 문화, 예술계, 학전을 아는 이들에게는 큰 충격이자 안타까움이었다. 그중에는 지금도 영화, 드라마, 가요계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스타 예술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발언과 미디어를 통한 인터뷰 등을 통해  학전과 김민기가 다시 조명됐다. 그리고 김민기의 고난 가득했던 삶과 그의 음악,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던 선행들과 음악가, 뮤지컬 제작자 등 문화 예술인으로서 이룬 성과들도 알려졌다. 이는 김민기라는 인물을 결코 민중가수라는 한 가지 단면으로만 볼 수 없게 하고 있다. 

최근 SBS에서 3부작으로 방영한 다큐인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그의 삶을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며 담담히 살폈다.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암 투병 중인 그와 직접 인터뷰를 하지 않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의 인터뷰와 각종 기록들을 통해 충분히 김민기라는 인물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AI 생성 이미지

 




1970년대 대학문화의 상징


김민기는 1970년대 청바지, 통기타로 대표되는 대학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는 노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고 음악을 공부했지만, 작곡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는 그가 다니는 대학뿐만 아니라 당시 가요계의 주류를 이루던 포크 음악계에도 그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다. 음악계의 관심은 1971년 첫 정규앨범 발매와 함께 그를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의 첫 앨범에는 대표곡인 '아침 이슬'을 포함해 그의 자작곡이 대부분이었다. 외국 번환곡이 주류를 이뤘던 음악계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매우 시적인 가사는 노랫말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멜로디나 편곡에서도 기존 포크 음악의 공식을 깨는 신선함이 있었다. 이 앨범은 지금도 가요사를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명반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앨범이 될지는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이 앨범은 그의 고난을 시작점이기도 했다. 1972년 김민기는 그가 다니던 대학교 신입생 행사에 초대받아 민중가요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노래 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공식화하는 10월 유신이 단행되고 사회 각 부분에서 공권력에 의한 통제가 강력해진 상황이었다. 특히, 대학은 박정희 독재에 대한 저항의 중요한 구심점이었고 대학생들은 그 중심이었다. 정권에서는 이런 대학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지속적으로 했다. 대학생 시위대가 부르는 민중가요를 가르치는 건 정권에는 심각한 일이었다. 

10월 유신이 공식화된 이후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시위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유신 정권은 이를 공권력을 통해 힘으로 탄압했다. 그 속에서 시위대가 부르던 아침이슬을 포함한 김민기의 노래는 정권에는 매우 불온한 노래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그의 노래는 발표됐던 해에 아름다운 노랫말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민기는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모든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됐고 앨범 역시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그의 가수 활동도 사실상 금지됐다. 충분히 좌절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민기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각종 공연에서 보이지 않게 역할을 하며 음악인으로 일했다.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뒷것의 삶이 시작됐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음악 활동을 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한 사회 운동가로 살았다. 

 

 

 




부정된 음악인의 삶, 사회 운동가의 삶


김민기는 야학운동에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빈민촌에 건립하는 공공 유아원 건립을 위한 모금 공연에도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모금 공연은 은밀하게 홍보가 됐음에도 크게 성공했고 유아원 건립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됐다. 또한, 김민기는 생계를 위해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중에도 노동자들을 위해 곡을 쓰고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김민기는 가난한 이들의 삶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겪는 부조리와 불평등, 열악한 노동환경 등 현실의 문제들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김민기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라는 앨범을 제작했다. 이는 목숨을 거는 작업이었다. 그의 노래는 금지곡이었고 그는 공안 당국에 의해 항시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주시되고 있었다. 이런 그가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 앨범을 만드는 건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일이었다.  

이에 김민기는 뜻을 함께 하는 지인들과 은밀히 작업을 진행했다. 그들은 위험을 알고도 작업에 함께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카세트테이프로 비밀리에 녹음되고 복제되어 몰래 대학가나 노동 현장으로 보급됐다. 1978년, 유신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이에 김민기의 노래는 대학가를 넘어 노동자들에게도 큰 힘이 됐다. 

공교롭게도 1979년 유신 정권 몰락의 단초가 된 사건은 가발 수출업체였던 YH 무역 여공들이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며 벌인,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사 농성이었다. 유신정권은 야당 당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도 일었다. 유신 정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가택연금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는 조치도 했다. 

이는 전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특히, 김영삼의 정치적 근거지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반 유신 시위가 더 강력히 일어났다. 부마 민주항쟁이었다. 유신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정권의 붕괴의 시계는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유신정권은 절대 권력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측근 인사인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에서 암살당해 서거하면서 막을 내리게 됐다. 

독재정권의 붕괴는 김민기의 음악인생을 다시 꽃피울 기회가 될 것으로 보였지만,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또 다른 독재 정권 시대를 열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권력을 잡게 된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는 날, 김민기는 공익 유아원 건립을 위한 모금 공연을 비밀리에 하는 중이었다. 그 공연을 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군부의 등장은 김민기의 희망을 다시 사라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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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신군부 게속되는 겨울 


신군부가 주도하는 5공화국 시대에도 김민기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계속 위험인물이었고 감시 대상이었다. 사회활동에 대한 제약도 여전했다. 언제든 신변에 위험이 닥칠 수 있었다.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은 그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는 더 이상 그의 노래가 아니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이에 김민기는 5공화국 정권의 그에 대한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그거 불의와의 타협이기 때문이었다. 5공화국 정권은 정권 찬탈에 성공한 이후 국풍 81이라는 대규모 관제 행사를 여의도 일원에서 열었다. 그 행사에는 많은 공연들이 함께 했다. 5공화국 정권은 김민기에게 공연 참가를 요청했고 막대한 보상도 약속했다. 하지만 김민기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가진 무게를 그는 알고 있었다. 

대신 김민기는 현실에서 멀어지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공안 당국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는 그에게는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을 지키는 일이었고 불의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이었다. 그는 도시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경기 연천의 시골 마을로 들어가 정착했다. 휴전선이 멀지 않은 접경지 마을은 사람이 발걸음도 드물었다. 감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사람들과 멀어졌다. 은둔의 삶을 택한 그는 한때 사망설이 지인들 사이에 돌기도 했다. 하지만 김민기는 농촌에서 비로소 많은 고민과 불안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김민기는 그를 모르는 농촌 사람들 틈에서 농사를 지으며 교류를 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김민기는 농촌 마을의 행사에 적극적을 참여했고 소통했다. 그가 담은 시골 학교 운동회 사진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었다. 

이렇게 농부로서 삶에 젖어들어가는 시기, 김민기는 또다시 사회 문제를 접하게 된다. 그는 불공정하고 왜곡된 농산물 유통시스템 속에서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농촌과 산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농산물을 사야 하는 도시인들의 문제에 주목했고 농산물 직거래 시스템을 제안하고 시행했다. 이를 통해 그가 살던 지역민들은 판로를 늘리고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인 판매 시스템이었다. 이는 사회 약자들에 대한 김민기의 관심과 그들을 위한 일에는 적극적인 그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화다. 

하지만 농사꾼의 삶도 그의 뜻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터전이었던 농가가 알 수 없는 화재로 모두 불타면서 그는 더는 그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그가 떠나왔던 도시로 다시 향해야 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음악가로 예술가로 생활인으로 살아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그의 노래가 필요한 곳에 함께 했다. 

 

 

 




민주화, 대중 문화의 중심이 된 학전 


그가 치열한 삶을 사는 사이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정권의 대통력 직선제의 부활과 민주화 요구 수용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그런 승리의 과정에는 박종철과 이한열이라는 두 청년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이들의 죽음은 민주화에 국민들의 의지를 더 불타게 했고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에 시민들이 적극 동참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 시위대를 하나로 묶은 건 그의 김민기의 노래였다. 그의 노래는 수시로 시위대가 함께 합창했고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연대를 강화하도록 하는 매개체였다. 그의 노래는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그의 노래는 금지곡이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노래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를 그는 6월 항쟁 과정에서 더 강하게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쩌면 그가 예술인으로 더 큰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민주화 열망이 실현된 이후 김민기 역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노래는 다시 금지곡에서 풀렸고 그 역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일반적이라면 그동안 발표하지 못했던 곡들을 앨범으로 발매하고 공연과 방송 활동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뒷것으로 계속 남았다. 

김민기는 가수로서의 활동 그 이상의 꿈을 꾸고 있었고 1991년 문을 연 소극장 학전에서 실현됐다. 학전은 젊은 예술인들의 요람으로 기능했다. 당시는 상설 공연장이 극히 드물었고 대중적 인지도가 많지 않은 예술인들이 설 무대도 거의 없었다. 학전은 신예 예술가들의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학전(學田)은 그 한자처럼 예술인들이 더 큰 꿈을 위해 자라나는 공간이었다. 

학전은 김민기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열었고 일체 후원을 받지 않았다. 그의 인맥과 인지도를 고려하면 충분히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독자적인 운영에 제약이 발생할 수 있었다. 김민기는 예술인들이 어떤 간섭도 받지 않은 독립적인 공간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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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의 철학이 투영된 공간 


이와 함께 김민기는 학전을 공연장으로 하는 극단을 창단해 운영했다. 신인 배우들을 키우는 기능이 추가됐다. 그리고 신인 배우들을 모아 김민기는 지금도 우리 뮤지컬의 명작인 '지하철 1호선'이라는 작품을 공연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도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대중들에게 매우 생소한 분야였다.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민기는 독일 원작의 작품을 자신이 가사를 반환하고 편곡해 우리 실정에 맞게 재구성했다. 직접 연출했다. 또한, 원점에서 배우들을 가리켰다. 그렇게 무대에 오른 지하철 1호선은 점점 입소문을 타고 대학로의 인기 작품이 됐다.

이 작품은 서울의 여러 인간 군상들, 바닥 인생들의 면면을 투영하고 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시대상을 반영한 대사는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지하철 1호선은 작품성은 물론이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며 학전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이 작품은 학전은 물론이고 해외공연에 나서기도 했고 4000회를 넘는 공연을 했다. 이 작품을 통해 조승우, 황정민, 장현성, 설경구, 김윤석 등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됐다.

이렇게 우리나라 뮤지컬의 새 역사를 열었던 학전은 이후에도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 공연장으로 대중들과 만났다. 젊은 뮤지션들에 학전은 한 번쯤은 서고 싶은 꿈의 무대이기도 했다. 실제 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학전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광석이다. 안타깝게 요절했지만, 김광석은 영원한 가객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이런 김광석이 자신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무대가 학전이었다. 김광석은 김민기를 만나면서 음악적인 영감을 얻었고 학전을 무대로 점점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켜났다. 김광석은 학전에서 무려 10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김광석의 공연은 티켓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넘쳐나는 팬들로 인해 공연장 좌석은 물론이고 복도, 심지어 무대 바로 앞까지 관객들이 들어차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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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이라는 이름의 악습을 넘어 


학전은 공연장 이전에 대학로의 청년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었다. 학전의 성공 이후 대학로 곳곳에는 많은 소극장이 들어섰고 공연의 메카가 됐다. 김민기의 남다른 해안이 빛나는 장소가 학전이었다. 김민기는 뛰어난 공연 제작자뿐만 아니라 공연계의 문화를 바꾸는데도 앞장섰다. 

그는 극단을 운영하면서 배우들과 별도의 계약서를 작성해 최소 출연료를 보장하고 수익에 따른 러닝 개런티도 지급했다. 지금도 무명의 배우들과 예술인들의 열정 페이라는 이름으로 노력의 대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임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학전은 스태프들과 극장 직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정규직으로 일하도록 하는 등 이전 문화, 예술계의 관행을 깨뜨렸다.

김민기는 그가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힘든 이들의 삶은 실제로 체험하고 그들과 함께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김민기는 성공의 과실을 나누고자 했던 마음을 더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체 후원을 받지 않는 극장의 운영인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았다. 김민기는 학전을 열면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에도 학전은 공연의 수익을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공개하고 수익을 나누는 민주적 운영을 했다. 이는 학전을 예술인들이 선망하는 극장으로 극단으로 만드는 중요한 이유였다. 

김민기의 학전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당대 최고 스타이자 뮤지션인 조용필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땅 위에는 조용필, 땅 밑에는 김민기라는 말이 있었다. 조용필은 1980년대와 90년대 최고 스타였고 김민기는 그와 달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경받는 뮤지션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비슷한 연배였지만, 활동하는 무대가 달라 쉽게 교류가 이루어지 않았다. 

둘을 잘 아는 이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만남은 평소 말이 없고 애주가였던 두 사람의 성향답게 많은 술잔이 오가는 조용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조용필이 한 오래된 카페의 노래방 기기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선곡해 부르는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조용필 공연 사진

 




김민기 그리고 조용필 


조용필은 평소 김민기를 존경하고 있었고 그는 노래도 그 마음을 표현했다.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학전 운영에만 관심이 있었던 김민기 역시 조용필의 음악을 알고 있어고 좋아하고 있었다. 이들의 만남은 조용필이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하면서 더 이어졌다. 거장들의 남다른 만남이었다. 

이렇게 학전이 성공의 길을 가던 시기, 김민기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그는 학전을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변화시켰다. 이를 위해 다수의 어린이 뮤지컬과 연극이 김민기에 의해 만들어지고 학전 무대에 올랐다. 힘들었던 시절 야학에 참여하고 어린이 보육원 건립을 위한 모금 공연에도 나설 만큼 어린이들을 위한 마음이 각별했던 그의 진심이 반영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이 뮤지컬 등의 공연은 공연에 따른 수익금이 상대적으로 적고 준비에도 많은 노력과 정성, 비용이 들어가는 탓에 수익성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민기는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어린이들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학전은 김민기의 오랜 꿈을 이루는 공간이었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한 공간이었다. 이런 학전의 영광은 2000년대 들어 뮤지컬이나 콘서트 등 공연이 대형 무대에서 열리는 것이 보편화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문화 예술계 전반의 변화가 함께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점점 소극장 공연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학전도 다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공연계 전반의 위기 상황에 길어지면서 학전의 재정상황도 더 악화됐다. 김민기의 사재를 털어 운영하는 소극장도 한계에 봉착했다. 여기에 김민기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학전의 위기가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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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의 역사 접은 학전


결국, 김민기는 학전의 폐관을 결정했다. 수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 학전의 역사를 기억하는 공연들이 열였고 대표작들도 대중들과 만났다. 그렇게 폐관의 시계는 계속 돌아갔고 학전은 올해 3월 33년의 역사를 마무리했다. 학전은 그 역사를 끝냈지만, 이곳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관리하면서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공연장과 창작의 장으로 젊은 뮤지션을 공연장으로 그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김민기의 학전은 아니지만, 그의 유지와 정체성은 지켜질 것으로 보인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딱 맞는 인생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던 김민기는 시대의 풍파 속에 민중 가수로 불온한 인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그 무게를 덜 수 있게 된 시점에 김민기는 학전을 열면서 스스로 삶의 무게를 더 짊어지는 선택을 했다. 이제는 그 짊을 내려놓게 됐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의 중요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김민기가 살아왔던 삶과 함께 한 3부작은 나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것,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바보 같은 삶이 되는 요즘, 그의 삶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가 건강을 돌보며 그의 인생을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여력이 된다면 그의 노래와 작품들을 더 늦기 전에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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