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4월 13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4월 11일로 정정되었고 임시정부의 역사는 2019년 100주년을 이미 맞이했고 또 역사를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는 최초의 민주공화국의 시작이라는 점과 나라의 주인, 주권이 국민들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조선의 주인은 임금이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긴 했지만,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다. 그 전에 있었던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시도 등이 무산되고 오히려 전제군주제가 강화되는 역사의 퇴보였다. 이후 봉..
조선 왕실의 이야기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였다. 조선실록을 비롯해 관련 기록이 다수 남아있어 역서적 고증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수백 년간의 기록 속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안에서 여러 이야기 소재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중에서 조선 숙종 임금과 인현왕후, 장희빈 등 얽혀있는 이야기는 그동안 수차례 드라마 소재로 활용되었고 당대 유명 여배우들이 장희빈 역시 캐스팅되어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골을 우려내듯 드라마화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다. 그만큼 그 이야기는 드라마틱 하고 극적인 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숙종의 중전이었던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밀려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배생활을 했고 이후 복권되어 중전 자리로 돌..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 할 수 있다. 두 전쟁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 선조와 광해군, 인조가 임금으로 집권하던 시기 일어났다. 그 피해는 극심했고 조선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피해의 복구는 조선 말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시대 부흥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후 극 소수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사회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변화하는 세계 흐름에도 뒤처지며 조선은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암흑의 역사로 이어졌다. 두 전쟁이 준 상처는 그만큼 크고 깊었다. 역사적으로 두 전쟁은 드라마틱 한 장면이기도 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 교양 예능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중요한 ..
조선 말기 우리 역사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건 중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이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란 정도로 평가절하됐던 동학농민혁명이었지만, 최근 그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녹두꽃은 이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일부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당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이 드라마는 최근 과거사 문제와 연관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와 한층 불편해진 한일관계속에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동학혁명은 드라마에서처럼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은 오래된 차별과 부정부패, 사회구조적 모순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6회에서는 1904년 2월부터 1905년 가을까지 이어진 러. 일 전쟁을 주제로 했다. 러. 일전쟁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본격화한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대국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훗날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어렵게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던 대한제국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과 세력 균형을 이루던 한 축인 러시아가 퇴장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침략을 막을 중요한 수단을 잃었고 비운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러. 일전쟁은 방송에서도 언급됐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강대국들 간의 대결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독일, 프..
1896년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을 일종의 망명을 한 아관파천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과 함께 독립협회가 설립된 연도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었고 독립협회는 일반 대중들이 참여한 자주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5회에서는 독립신문의 창간에서 시작해 독립협회의 활동 그 의의를 다뤘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거사가 실패한 이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서재필이 창간을 주도했다. 서재필은 당시 개화파 정치 세력을 주도하고 있던 인사들의 후원 속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서재필과 개화파 인사들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있음을 공감했다. 그들은 대중들을 계몽하고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