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쟁하던 고대 삼국시대를 재 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17회에서는 642년 대야성 전투를 중심으로 삼국시대 후반기 백제와 신라의 핏빛으로 물든 대결사와 삼국과 국제 관계까지를 살폈다. 그중에서 신라 태종무열왕이 된 삼국시대 역사의 중심인물 김춘추와 백제 마지막 왕인 비운의 왕 의자왕과의 관계 역시 여러 시각에서 다뤘다. 삼국시대 역사에서 642년은 중요한 분기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해에는 고구려에서 정변이 발생해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권력자로 새롭게 등장했다. 그의 등장은 그가 살해한 고구려 영류왕의 대당 온건노선이 강경노선으로 바뀜과 동시에 삼국의 역학 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는 한편 백제의 개로왕을 참..
1971년 우리 고고학계를 흥분시키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고대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백제의 역사를 눈앞에서 살필 수 있는 고분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그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이었다. 무령왕릉은 우리 역사에서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몇 안 되는 왕이고 이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백제의 역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가치가 큰 일이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무령왕릉과 관련한 역사적 의의, 당시 시대적 상황 등을 살펴봤다.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분의 발견은 공주 송산리 일대 백제 고분군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부에 의해 우연히 이루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얼마..
우리 고대 역사에 있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치열하게 대결하며 고대 역사를 써 내려갔다. 삼국은 상호 대결과 함께 교류하기도 했고 강해진 나라를 두 나라가 연합해 맞서는 등의 방법으로 균형을 이루며 적대적인 공생을 했다. 그 관계 속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의 지형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른 색깔로 발전했고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시대는 대결의 역사였다. 누군가는 최후의 승자와 나와야 끝나는 대결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신라였고 그 북쪽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등장과 함께 남북국 시대로 변화를 겪었다. 이런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대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한강유역이었다. 한강은 드넓은 토지가 비옥한 농토를 형성해 농업이 산업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고대 국가에서 중..
조선의 역사에서 태종 이방원은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소재가 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신권과 왕권의 대립하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며 왕권으로 힘은 균형추가 완전히 기울게 했다. 태종 시대 조선은 제왕 중심의 중압 집권제로 강력히 시행했다. 이런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의 희생이 뒤따랐다. 조선 건국을 이끌었던 정도전이 그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건국에 일조했던 공신들 상당수가 피의 숙청을 피하지 못했다.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꿨다. 권력의 중심은 3정승이 중심된 의정부에 있었고 왕권은 제한됐다. 이성계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태종은 생각이 달랐다. 이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태종은 정도전 세력의 숙청에 이에 세자였던 이복동생..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 후 조선은 국가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다.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고 피해 복구는 더디기만 했다. 이를 해결한 권력층의 노력도 있었지만, 극심한 대립으로 치달은 붕당정치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국가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대부 양반들은 한계에 다다른 국가 시스템을 개선하고 변화를 모색하기 보다 구시대적인 사고를 벗어나 못했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더 몰두했다. 그 사이 조선은 더 수구화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이 있었다. 영조와 그의 손자 정조 시대 조선은 반등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존의 성리학의 한계를 탈피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실학이 일어났다.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왕의 시호조차 받지 못한 채 폭군으로 기록되었지만, 후대에 와서 그 평가가 다라진 임금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제2의 정부인 분조를 이끌며 전쟁 극복에 큰 역할을 했고 왕위로 올라 전후 복구와 신흥 강국 후금과 명나라 사이 중립 외교를 통해 조선을 또 다른 전란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가 살던 시기 실패한 임금이었고 긴 유배생활 끝에 그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왕위에서 폐위된 이후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고 일체의 이동과 사람들과의 만남이 통제된 가택연금 상태로 18년을 보냈고 그가 왕으로 집권한 15년보다 더 긴 세월이었다. 비운의 왕이었던 광해군의 삶에 있어 대척점에 있는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