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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리그를 지배했던 마무리 투수 정대현이 2001시즌부터 시작된 프로야구 선수 이력을 스스로 마무리했다. 정대현은 소속 팀 롯데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올 시즌 1군에서 단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면서 팀 내 입지가 크게 줄었던 정대현은 내년 시즌 사실상 전력 외로 분류된 상황이었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 한다면 타 팀 이적 등의 모색해야 했지만 정대현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을 선택했다. 

정대현은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였다. 정대현은 언더핸드 투수로 마무리 투수하면 연상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언더핸드 투구에서 나오는 낮은 궤적의 직구는 엄청난 체감 속도를 자랑했다. 여기에 날카로운 싱커볼은 땅볼 유도에 제격이었다. 솟아오르는 커브볼은 그의 투구에 위력을 더했다. 

정대현이 이름을 알린 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대현은 대학교 재학 중으로 야구 대표팀에 포함됐다. 언더핸드 투수가 낯선 미국이나, 중남미 팀을 상대로 한 비밀병기였다. 예상대로 정대현은 최강 전력이라 평가되던 미국전 표적 선발 투수로 등판했고 위력적인 투구를 했다. 미국 타자들은 정대현의 공을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정대현의 호투를 바탕으로 대표팀은 미국과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야구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렇기에  이름조차 생소한 젊은 투수의 호투는 더 인상적이었다. 당시 대표팀은 정대현의 호투에도 미국과의 4강전에서 분패했지만, 3, 4위전에서 일본 에이스 마쓰자카를 무너뜨리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국제경기 야구 대표팀 선전의 시작이이었다. 

이후 정대현은 국가대표팀의 필수 전력으로 함께했다. 어느새 정대현은 국제경기용 투수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실제로 정대현은 국제경기에서 위력적이었다. 그의 국제경기 이력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정점을 이뤘다. 정대현은 쿠바와의 결승전 마무리 투수로 나서 1사 만루의 위기를 병살타로 막아내고 금메달의 순간 마운드에서 포효했다. 

당시 상항은 주심의 석연치 않은 볼판정으로 볼넷이 이어지면서 경기장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포수 강민호가 심판 판정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장을 당했고 호투하던 선발 투수 류현진도 마운드를 물러났다. 포수 자리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기 힘들었던 진갑용이 있었다. 여기에 1점 차 리드를 지켜야 하는 정대현은 부담감을 상당했다. 하지만 정대현은 이를 이겨내고 팀 승리를 지켰다. 대표팀은 전승 우승의 신화를 이룰 수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뒤로하고 정대현의 국제 경기 활약은 WBC와 2015 프리미어 12 우승까지 계속됐다. 

정대현은 국제경기뿐만 아니라 리그에서 활약도 대단했다. SK 시절 정대현은 팀 전성기를 중심 선수였다. SK는 강력한 불펜진을 극대화하는 일명 벌떼 마운드 전략으로 강한 마운드를 구축했다. 정대현은 SK 불펜의 마무리 투수로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벌떼 마운드의 핵심이었던 그는 여왕벌로 불렸다. SK의 우승이 등 영광의 순간 정대현은 그 마지막을 책임지는 투수였다. 

정대현은 투구 내용도 최상급이었다. 2003시즌부터 2011시즌까지 정대현은 단 한 번도 3점대 이상의 방어율을 기록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방어율이 치솟는 불펜 투수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가 얼마나 안정적인 투수였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정대현은 국제경기와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FA 자격을 얻은 2012시즌 국내외 구단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정대현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택했다. 언더핸드 투수로서 위력적인 투구를 하는 정대현은 불펜 투수로 경쟁력을 보일 것으로 기대됐지만, 메디컬 테스트에서 문제가 나타나며 계약이 무산됐다. 이런 정대현에 롯데는 과감한 베팅을 했고 정대현은 정들었던 SK를 떠나는 결정을 했다. 

롯데는 정대현이 고질적인 불펜 고민을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 롯데는 정대현과 함께 SK 불펜의 핵심 선수였던 좌완 이승호까지 영입해 불펜진을 더 단단히 했다. 하지만 SK 출신 두 불펜 투수의 활약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정대현은 무릎 부상으로 이승호는 갑작스러운 노쇠화로 투자 대비 효율성이 크게 떨어졌다. 그나마 이승호는 얼마 안가 2차 드래프트를 거쳐 팀을 떠나고 말았지만, 정대현은 재활을 반복하면서도 마운드에 올라 힘을 보탰다. 롯데는 그의 명성과 경험을 믿고 기다림을 지속했다. 

FA 첫해였던 2012시즌 정대현은 전반기를 부상 재활로 날렸지만, 후반기 24경기 등판에 0.64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역시 정대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잠깐의 반등이었다. 2013시즌부터 올 시즌까지 정대현은 과거 전성기의 모습을 끝내 재현하지 못했다. 무릎 부상의 후유증은 투구폼의 변형을 가져왔고 주무기 싱커의 위력을 반감시켰다. 특유의 떠오르는 커브도 사용하기 힘들었다. 정대현이라는 이름값만으로도 상대 타자에 위압감을 주던 모습도 점점 사라졌다. 정대현은 마무리 투수 자리를 내주고 우타자 전문 불펜 투수로 그 역할을 축소됐다. 두 번째 FA 기회도 잡을 수 없었다. 

정대현은 2015시즌 후 열린 프리미어 12에서 대표팀 투수로 활약하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지만, 끝내 반등하지 못했다. 급기야 올 시즌에는 1군 등판을 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 정대현의 경험은 후반기 순위 경쟁 과정과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롯데에 새로운 플러스 요소가 될 것으로 기대되기도 했지만, 정대현은 등판 일지는 6월 16일 퓨처스리그에서 멈춰지고 말았다. 

정대현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은 희망 대신 현실을 인정했다. 정대현은 롯데에서 선수로서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한 채 그의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여정을 마감하고 말았다. 정대현은 지도자로서 새로운 야구 인생을 열 것으로 보인다. 롯데로서는 분명 아쉬운 일이다. 정대현은 롯데의 또 하나의 이 FA 실패 사례로 남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팀에 부족한 언더핸드 투수 자원이 사라지는 건 팀 전력에도 분명 마이너스 요인이다. 롯데는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두산으로부터 언더핸드 투수 오현택을 영입했지만, 올 시즌 부상 재활에만 매달렸던 그가 정대현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렇게 국제용 잠수함 투수 정대현은  화려한 은퇴식도 없는 쓸쓸한 선수 생활 마무리를 하게 됐다. 정대현은 롯데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선수 이력에 있어 분명 큰 오점이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헌신과 그 결과물은 리그 전체를 놓고 본다면 크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은 확정하는 순간 마무리 투수였던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그가 쌓았던 경험과 노하우를 지도자로서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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