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데뷔 50주년 전국 콘서트 일정이 이제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추워진 날씨 탓에 11월 공연부터는 실내로 그 장소를 옮겼습니다. 실내 공연의 시작은 인천이었다. 프로 농구팀 인천 전자랜드의 홈구장이기도 한 인천 삼산체육관이 콘서트 장소였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많은 실내 경기 종목이 열렸던 이곳은 깔끔한 시설과 관중석에 경기를 잘 지켜볼 수 있는 구조로 공연의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실제 공연에서 뒷자리에 있는 분들도 무대를 잘 볼 수 있는 구조로 공연 내내 관객들이 높은 집중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무대와 관객들이 시종일관 하나 된 느낌의 공연이었다. 그 공연의 사진들을 모아 보았다. 





화려한 공연의 시작, 야외 콘서트와 같은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없어 조용필 콘서트하면 떠오르는 이동식 무대는 없었습니다. 실내 공연에 맞게 무대 조명과 구성이 화려해졌다. 곡의 레퍼토리도 상당 부분 변화가 있었다. 전반부터 빠른 비트의 곡들도 공연장 분위기가 뜨거웠다.





이번 공연에서 조용필은 보다 더 많은 멘트를 하면서 관객들과 함께 하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공연 중간중간 어색해하면서도 소통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는 그 과정에서 관객들과 팬들의 사랑과 성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 그가 대규모 공연을 계속할 수 있을지 농담 섞인 걱정을 하기도 하면서..... 그 역시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세월의 무게를 조금은 느끼는 것 같았다. 





얼마간의 멘트가 있고 그의 공연은 쉼 없이 계속됐다. 직접 연주를 하기도 하면서 그는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신내 공연인 탓인지 사운드는 훨씬 안정적이었고 듣기에도 편안했다. 가깝게 느껴지는 무대는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강렬한 비트의 곡들이 끝나고 조용필은 관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발라드와 트로트로 공연의 열기를 차분하게 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나올 때 그를 비치는 레이저 빛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곡에 대한 감상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절정을 향해는 공연, 관객들의 열기도 한층 더 뜨거워졌다. 관객들이 열기와 조용필의 열창이 어우러진 공연장은 모두가 즐기는 파티와 같았다.





앵콜곡까지 끝나고 맞이한 작별의 시간, 조용필도 관객들도 모두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실외 공연과 같은 화려함과 웅장함을 덜했지만, 가수와 관객들의 소통은 더 긴밀했던 인천 공연이었다. 실내 공연의 장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의 공연은 구미를 거쳐, 부산, 그리고 다시 서울로 이어진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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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의 수다 한 마당, tvn의 알쓸신잡 시즌 3, 제9회에서 찾은 장소는 부산이다. 부산은 대한민국 제2위 도시이자 제1의 항구도시로 경제개발 드라이브가 한창이었던 70년대와 80년대 무역 항구로서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부산은 수. 출입 항구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큰 번영을 이룬 부산이지만, 그 발전의 이면에는 6.25 한국전쟁의 아픔이 함께하고 있었다. 알쓸신잡에서는 한국전쟁과 부산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에 대해 기습적인 전면전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전면전 가능성이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북한은 치밀하게 남침을 준비했고 비밀리에 소련과 중공의 지원까지 받았다. 북한군은 당시 남한에는 한 대도 없었던 탱크를 앞세웠다. 소련제 탱크는 당시 남한 군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탱크를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중과 부족의 상황에서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엄청난 속도로 남한 영토를 점령했다. 

이에 남한의 이승만 정부의 대응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이승만 정부는 안심하라는 대통령의 녹음방송을 라디오를 통해 반복하는 하는 사이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정부를 이동했다. 상당수 서울 시민들은 피난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피난민들도 가득한 한강 다리를 폭파하며 상당수 사상자를 발생시키기까지 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론을 내세웠지만, 이는 허황된 자신감이었다. 실상은 정 반대였다. 






뒤늦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전선에 투입됐지만, 전세는 쉽게 역전되지 않았다. 결국, 북한군은 대구, 부산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한 영토를 차지했다.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을 부산으로 모이도록 했다. 

당시 부산은 지금과 같은 큰 도시가 아니었지만, 엄청난 인구 유입으로 그 규모가 일시에 크게 팽창했다. 부산은 유엔군이 지원하고 임시정부가 있어 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전세가 역전된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파생된 흥남철수는 또 한 번 엄청난 수의 외지인들을 부산으로 유입하게 했다. 당시 흥남철수 당시 마지막 미군 수송선이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수만의 피난민들을 가득 태워 거제로 항해한 일은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이렇게 저렇게 부산은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 됐다. 대부분 연고가 없는 외지인들은 그들의 쉼터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산비탈이나 심지어 공동묘지에까지 판자집을 만들었다. 지금도 부산의 산비탈에 자리한 마을들은 6.25 전쟁 당시 형성된 마을이 그대로 이어져 것이다. 프로그램에서도 지금은 벽화마을로 유명한 부산 감천동을 찾아 당시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맨주먹으로 만든 그 마을의 삶은 고단하고 힘겹기만 했고 지금도 그 상황이 다르지 않다. 벽화 마을로 관광지가 된 곳도 있지만, 현지인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닌 가난한 삶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다만, 관광수익을 현지 주민들을 위한 사업에 투자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쟁 당시 많은 이들에게 부산은 전쟁의 공포를 덜어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지만, 힘든 삶은 이어가야 하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이야기가 모여 부산은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전쟁의 비극이 아이러니하게도 부산을 대도시로 만들었다. 6.25 한국전쟁과 부산은 이점에서 그 연관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한국전쟁과 부산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에 장기려 박사가 있다. 북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장기려 박사는 부산에서 개업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했다. 그는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무료 진료 등으로 의료혜택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에게도 인술을 베풀었다. 

장기려 박사는 의료봉사 외에도 우리 의학계에서 최초로 간암의 절제 수술을 성공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외과 의사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려 박사는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고 남을 위한 사람을 살았다. 그의 병원이 규모가 커졌음에도 장기려 박사는 큰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비를 올려 받아야 하는 현실을 더 걱정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병원을 찾지 못하는 것을 더 안타까워했다. 

영양실조에 있는 환자에게 닭 2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어주라는 처방전을 내린 것이나 돈이 없어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병원 뒷문을 항상 열어두었다는 일화는 그의 환자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다. 또한 장기려 박사는 병원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일체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의 통장에 있어 마지막 돈 역시 그가 병중에 있을 때 그를 돌봐주었던 간병인에게 주었다. 그는 말 그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웠던 건 북에 배우자가 많은 자식들을 남겨둔 실향민으로 있으면서 장기려 박사가 특별 이산가족 상봉을 2차례나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의 상봉 기회가 사라지는 걸 더 걱정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이타적이었다. 장기려 박사는 생의 끝자락에서 북에 있는 가족과의 3번째 상봉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지병으로 쓰러져 뜻을 이루지 못했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려 박사는 6.25 한국전쟁의 비극 그 중심에 있었지만, 그 속에서 휴머니스트로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조치 없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현대에 와서 크게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가 만들었던 사설 의료보험 조합은 지금의 국민 건강보험의 모태가 되는 획기적인 시도로 우리  삶 속에 남아있는 그의 유산이다. 어쩌면 그의 유산이 일상 속에 함께 하기에 그에 삶에 대한 특별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알쓸신잡 부산 편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굴곡진 현대사에서 부산은 그 중심이 있었던 도시였고 지금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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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가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의 불공정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흔들리고 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이끌었던 선동열 감독이 돌연 사퇴하면서 당장 그 자리가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 선동열 감독은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선수 선발에서 특정 선수의 병역 혜택을 위해 선수 선발을 했다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국정감사장에서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국정감사장에서 선동열 감독은 상당한 질타를 받아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모멸감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는 비난 여론도 선동열 감독에게는 부담이었다. 심지어 KBO 총재마저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 자체에 의문을 표하면서 선동열 감독이 설자리가 없었다. KBO에서는 감독 교체를 논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상황은 선동열 감독의 선택을 사실상 강요했다. 

결국, 선동열 감독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국가대표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우리 프로야구 역사에서 다시 나올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대 투수였던 선동열 감독이었고 감독으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던 그였지만, 지도자 생활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됐다. 선동열 감독은 사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스스로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아시안게임 선수 선발 사태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전가되는 상황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들 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동열 감독의 사퇴로 야구 국가대표 감독은 새로운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 벌써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었던 김경문 감독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과연 국가대표 감독을 선뜻 맡으려 할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국가대표 감독 자리에 정치적 외압에 흔들리는 상황까지 초래했다는 점에서 그 부담감을 쉽게 짊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동열 감독의 불명예 퇴진은 국가대표 선발의 불투명성과 불공정성 직접 원인이지만, 이를 감독의 책임으로만 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국제 대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대표 선발에 있어 프로선수들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비시즌 기간 또는 시즌 중 국가대표로 나서는 일은 구단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 맞는 보상이 필요하지만, 그 수단이 마땅치 않다. 과거와 같이 국가대표의 사명감에 호소해서는 힘든 일이 됐다. 당연히 대표팀 구성에 있어 구단들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선수 차출에 부정적이다. 다만, 병역혜택의 기회가 있는 올림픽, 아시안게임만은 예외다. 특히, 금메달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아시안게임의 경우 구단들은 내심 자기 팀 소속 선수가 더 많이 선발되기를 기대한다. 선수 선발에 있어 구단들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올해 아시안게임 역시 이런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몇몇 선수의 경우 상무나 경찰청 입대를 통해 퓨처스리그 경기에 나서면서 병역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포기하고 국가대표 선발에 도전하기도 했다. 선수 개인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지만, 구단과의 협의가 없이 이런 결정을 했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이런 사례는 대표팀 선수 선발에 있어 국가대표 감독에게 큰 압력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KBO가 구단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은 국가대표 감독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런 구조는 국가대표 선발의 중요한 객관성과 공정성 자체를 유지하지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 과연 감독이 소신껏 선수 선발을 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지게 한다. 선동열 감독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을 수 없는 이유다. 

물론, 국가대표 감독의 자리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고 선수 선발과 운영 선반을 책임지는 자리다. 선수단에 비난은 감독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번 아시안게임 대표팀의 경기력이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점은 비난을 더 가중시키는 요인이었다. 

시즌을 중단하면서까지 아시안게임에 올인했던 KBO였다. 그 때문에 리그 일정이 뒤로 밀리고 이에 따른 각종 부작용이 상당했다. 흥행에도 큰 악재로 작용했다. 금메달의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부실한 경기력은 금메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일본과 대만이 프로선수들을 출전시키지 않거나 일부만 출전시키는 현실에서 리그를 중단하면서까지 정예 선수들의 선발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비난 여론도 커졌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악재로 작용하면서 선동열 감독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말았다. 비난 여론을 홀로 떠안은 채 감독 자리에 연연할 수 없었다. 선동열 감독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사퇴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선수 선발 과정의 문제점은 여전히 그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고 언제든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구단의 이해관계에 크게 좌우되는 KBO의 현실은 여전하다.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의 본래 취지가 지켜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과거처럼 뜨거운 감자인 국가대표 감독을 서로 양보하는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선동열 감독의 사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선동열 감독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고 떠나는 식으로 사태를 유야무야한다면 야구팬들은 물론이고 국민적인 불신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운영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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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시시 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 86회에서는 조선에서 탄핵된 군주 2번째 이야기로 광해군을 다뤘다. 광해군은 과거 역사에서 폭군으로 간주되고 평가 절하된 군주였지만, 최근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상당수가 그를 임금에서 축출한 서인 세력들에 의해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 대한 역사 기록이 과연 객관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에서는 광해군에 대한 긍정, 부정적 모습을 모두 다뤘다. 

광해군은 유년시절부터 영특하고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선조의 아들 중 광해군은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저했다. 광해군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중전의 소생이 아니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선조는 자신 역시 장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붕당 정치가 본격화된 상황에서 왕권이 약해지는 것에도 부정적이었다. 

선조로서는 장자를 세자로 책봉해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고 왕권을 보다 더 굳건히 하고 싶었다. 선조는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강해진 신권이 달갑지 않았다. 선조는 동인과 서인을 나뉜 붕당정치 구조를 활용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선조에게 신하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광해군은 일종의 정적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광해군은 왕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음에도 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던 광해군에게 임진왜란은 중요한 기회였다. 임진왜란 초기 대비가 부족했던 조선은 일본군의 공세를 막지 못했고 전 국토에 전쟁에 휩싸였다.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의 대응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결국, 선조는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하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위급한 국가 상황에서 세자 자리를 더는 비울 수 없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전란의 혼란 속에 성대한 의식도 없이 급히 세자에 책봉됐다. 이후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는 와중에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의 임무를 맡겼다. 이는 조정을 둘로 나눠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조치였는데 세자에 오른지 얼마 안 된 광해군에서 최전선에서 조정을 이끌도록 하는 처사는 무책임한 일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국가 경영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광해군으로서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광해군은 일본군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최 전선에서 일본군의 전쟁을 이끌었다. 광해군은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군수 물자를 확보하는 한편, 무너진 행정 시스템을 복원했다. 세자가 최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 실망했던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광해군의 전쟁 대처와 위기관리 능력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더 공고하게 했다. 당연히 세자로서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이 선조를 뒤를 차기 권력이라는 점은 기정사실과 같았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아버지 선조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여기에 명나라의 세자 책봉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입지가 흔들렸다.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세자 책봉, 왕위 계승에 있어 명나라의 승인이 필요했고 이는 왕의 정통성 확보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이에 더해 뒤늦게 중전을 얻은 선조가 아들을 얻으면서 광해군의 세자 지위는 더 흔들렸다. 선조가 그토록 원했던 정실부인으로부터의 아들은 장자 상속이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성리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장자 상속의 명본을 얻은 선조의 늦둥이 아들 영창대군은 왕위 계승에 있어 중요한 변수가 됐다. 대신들의 여론도 점점 영창대군으로 쏠렸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어느새 소수파로 전락했다. 

이런 광해군에게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또 다른 위기 탈출의 기회가 됐다. 선조는 아직 3살밖에 안되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수 없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힘겨운 과정을 거쳐 조선 제15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집권 초기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나라의 전후 복구와 함께 유실된 서적 편찬과  무너진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등에 있어 능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당시 야전에서 생활에서 몸소 겪은 경험들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공납 제도를 개편하는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조세개혁도 단행했다. 대동법은 공평과세의 방편으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책이었다. 광해군은 이 과정에서 집권 세력은 북인의 대북 세력과 함께 남인 출신의 이원익 등 반대파들도 포용하는 정치력까지 발휘하며 성군의 면모를 보였다. 

광해군은 내치는 물론이고 외교에서도 기존의 사대를 하던 명나라와 신흥 강국 후금 사이에서 교묘한 중립외교로 전쟁의 위험을 극복하는 수완을 보였다. 이는 명나라를 사대하는 조선의 기본 정책에 배치되고 대신들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전후 복구 등으로 힘겨운 조선으로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집권 초기 광해군은 여러 면에서 치적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군의 이미지가 퇴색됐다. 아버지 선조의 적장자라 할 수 있는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 항상 큰 위협이었다. 영창대군을 배경으로 한 반정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했다. 그를 보필하는 대북 세력은 소수파 정권이었던 탓에 광해군의 왕위는 불안했다. 이는 왕권 유지를 위한 무리수를 불러왔다. 

대북 정권은 영창대군을 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유배 후 살해했다. 아직 10살도 채 안 된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북 정권을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를 궁궐에서 내보내 별도의 별궁에 유폐시켰다. 공식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인목대비에 대한 탄압은 성리학적 사고로는 폐륜이었다. 이는 광해군에 대한 반정에 있어 중요한 명분이었다. 광해군은 이후 포용의 정치를 버리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또한, 광해군은 궁궐을 새롭게 건축하는 대규모 공사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가져오게 했다. 전후 복구에 시급한 조선에게 궁궐 건축은 시급한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이를 강했다. 이는 당연히 백성들의 원성을 불러왔다. 부족한 공사비용 충당을 위해 관직을 매관매직하는 일도 생기면서 그에 대한 여론은 점점 악화됐다. 이런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 세력의 독단과 전행, 주변을 둘러싼 간신들의 존재는 그의 총명함을 잃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됐다. 

이에 서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세력은 1623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결행했고 광해군은 그들에게 밀려 권좌를 내주고 긴 귀양 생활을 하게 됐다. 광해군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배우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고통과 강화도와 교동도, 제주도로 이어지는 고단한 일정의 긴 귀양 생활에도 이를 견디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후에도 폭군으로 기록되며 긍정적인 면이 철저히 가려졌다. 

하지만 최근 광해군은 조선시대 또 다른 탄핵 군주인 연산군과 달리 재평가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의 전후 복구 노력과 전쟁의 위험을 방지한 실리 외교정책, 대동법 시행을 통한 민생을 돌보는 모습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다. 그가 그의 이복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왕실의 법도상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인목대비를 박해한 점, 집권 후반기 무리한 토목공사와 함께 통치의 난맥상을 보인 점은 분명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인척과의 권력 투쟁은 조선 시대 내내 있어왔고 수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희생됐다는 점에서 광해군만의 문제로 볼 수 없다. 이런 비극의 원인 제공자는 오히려 아버지 선조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세자에게 분조를 맡기고 의주를 거쳐 명나라로 피신하여 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임금이었다. 






선조는 적장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고 광해군에 대한 견제를 집권 내내 이어갔다. 수많은 선위 파동을 일으킨 것도 광해군에 대한 견제가 주원인이었다. 이런 선조가 남겨둔 어린 아들은 태생부터 권력 투쟁의 중심 설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되지 못한 이복동생의 입지는 항상 불안했고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광해군으로서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 의지를 버리지 않는 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반정의 가능성을 항상 마음속에 가져야 했다. 영창대군이 점점 더 성장하면서 그 우려는 그를 더 옥죄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소수파 정권이었던 광해군에게는 이런 위험요소가 큰 부담이었다. 어쩌면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와 걱정 근심이 쌓게 성군의 자질이 있었던 그를 폭군의 모습으로 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가 권력의지를 버리고 영창대군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하기도 어렵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우호적인 기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광해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 정권은 오히려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했다. 그 서인 정권과 함께 했던 임금 인조는 결코 광해군보다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임금이었다. 이점에서 광해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기는 무리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흘러도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인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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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프로야구 정규리그 우승 팀은 두산이었다. 두산은 올 시즌 내내 타 팀을 압도하는 전력으로 선두를 질주했고 큰 위기 없이 일찌감치 정규리그 1위를 확정했다. 2위 SK와의 승차는 14.5경기로 엄청난 차이였다. 두산의 독주 탓에 올 시즌 순위 경쟁의 관심은 마지막까지 치열했던 5위 경쟁에 모아질 정도였다. 그만큼 정규리그에서 두산은 강력했다. 

두산은 특유의 화수분 야구를 기반으로 한 풍부한 선수 자원과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구단 운영으로 장기 레이스에서 최적의 팀을 만들었다. 베테랑과 그들을 위협하는 신진 세력의 경쟁과 조화는 시즌 내내 팀 내 긴장감을 유지하며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다. 외국인 타자의 활약이 사실상 없었음에도 그 공백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마운드도 단단했다. 특히, 선발 마운드는 리그 최강이었다. MVP급 활약을 한 외국이 투수 린드블럼과 후랭코프는 강력한 원투펀치로 마운드를 시즌 내내 잘 이끌어주었다. 두산 선발 마운드의 중심이었지만, 올 시즌 부진했던 장원준, 유희관의 부족함은 이용찬, 이영하 등이 잘 메워주었다. 상대적으로 고심이 많았던 불펜진은 국가대표로 선발됐던 마무리 함덕주와 사이드암 박치국, 그밖에 젊은 투수들의 활약으로 경쟁력을 유지했다. 김승회와 이현승도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보탬이 됐다. 






이런 투. 타의 조화 속에 두산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순조롭게 정규리그를 보냈다. 두산은 올 시즌 통합우승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경쟁팀들의 전력이 약화됐고 두산은 변함이 없었다. 정규리그 1위를 조기에 확정하면서 한국시리즈 준비기간도 충분했다. 두산은 일본 교육리그에 참가하는 등 경기 감각 유지에도 신경을 썼다. 완벽하다 여겼던 준비였다. 

그사이 플레이오프는 내년 시즌 키움증권으로 메인 스폰서가 바뀌는 히어로즈의 선전으로 5차전의 접전이 펼쳐졌다. 그나마 두산에 대항마로 손꼽혔던 SK는 한국시리즈 진출의 꿈을 이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SK는 지쳐있었고 노수광이라는 재능 있는 리드오프를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내야수비는 불안감을 플레이오프 기간 노출했고 타선도 기복이 있었다. 마운드 소모도 많았다. 모든 것이 두산의 우승을 예상케 하는 요소들도 가득한 한국시리즈였다. 

하지만 시리즈 흐름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두산은 정규 시즌과 달리 곳곳에서 허점을 노출했다. 우선 불펜진에서 필승 불펜 김강률의 공백이 예상보다 컸다. 마무리 함덕주까지 가는 과정이 힘겨웠다. 경기 후반 승부처에서 내세운 불펜 자원이 부족했다. 이는 경기 후반 뒷심 부족과 연결됐다.

여기에 4번 타자 김재환의 부상이라는 악재가 겹쳤다. 김재환은 올 시즌 홈런과 타점 1위를 차지했고 리그 최고의 4번 타자였다. 김재환은 3차전부터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대타 출전을 위한 준비도 했지만, 의지와 달리 몸이 따르지 않았다. 결국, 두산은 3차전부터 4번 타자 없이 시리즈를 치러야 했다. 두산은 양의지를 4번 타자로 기용하고 김재환의 자리는 외야수 정진호로 채웠지만, 중심 타자의 공백을 완전히 메울 수 없었다. 이는 한 방 능력이 있는 외국인 타자의 공백을 더 크게 했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압축된 승부에서 4번 타자와 필승 불펜의 부재는 정규 시즌 이상의 악재였다. 이는 분명 경기력에 영향을 주었다. 이에 더해 두산은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에서도 허점을 보였다. 두산은 매 경기 승부처에서 실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실책은 대부분 실점과 연결됐다. 오히려 정규 시즌 수비에서 불안감을 노출했던 SK가 유격수 김성현, 2루수 강승호가 공. 수에서 맹활약하면서 시리즈 흐름을 유리하게 가져왔다. 

두산은 자신들의 강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고 SK는 강점은 유지하면서 단점을 보완했다. 정규 시즌과 전혀 다른 승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두산은 6차전 0 : 3으로 뒤지던 경기를 4 : 3으로 역전시키는 뚝심을 발휘하며 저력을 보였지만, 마무리 린드블럼 카드가 피홈런으로 무너지면서 어떻게 보면 마지막 기회를 잃고 말았다. 두산은 연장전까지 승부를 이어갔지만, SK의 기세를 막지 못했다. 

두산은 지난 시즌 정규리그 2위로 도전자의 입장에서 치렀던 한국시리즈 패배의 아픔을 올 시즌 정규리그 1위의 유리함으로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두산은 또다시 한국시리즈에서 패자로 남고 말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팀을 공식적인 챔피언으로 기록하는 우리 프로야구에서 두산은 정규리그 압도적 1위를 하고도 웃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정규리그 우승 팀의 자격으로 받을 포스트시즌 배당금으로도 아쉬움을 달랠 수 없는 두산의 한국시리즈였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승자가 되지 못했지만, 두산은 그동안 효율적인 팀 운영과 선수 육성 등으로 거품론이 일고 있는 FA 시장에서 구매자가 안되고도 최강팀으로 자리를 잡았다. 두산의 팀 운영은 타 팀에게도 좋은 본보기다 되고 있다. 지난 시즌 한용덕 수석 코치에 이어 올 시즌 이강철 수석 코치가 타 팀 감독으로 선임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 시즌 두산은 분명 챔피언이었다. 한국시리즈 실패가 정규 시즌 우승의 가치를  흔들 수는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두산은 최강팀의 자격을 성적으로 보여주었다. 내년 시즌에도 지금의 전력을 유지한다면 두산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다. 두산으로서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의 아쉬움이 더 강한 팀이 되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올 시즌 두산은 성공의 기억이 더 많다는 점이다. 


사진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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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 13회까지 이어진 승부, 양 팀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고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투지를 발휘했다. 하지만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마지막에 웃은 팀은 SK였다. 연장 13회 승부를 이겨낸 SK는 한국시리즈를 4승 2패로 마무리하며 2018 시즌 마지막 승자의 기억을 남겼다. 

SK는 11월 12일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연장 13회 초 터진 한동민의 솔로 홈런에 힘입어 5 : 4로 승리했다. 정규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를 거쳤던 SK는 플레이오프 5차전 접전의 피로감을 이겨내며 한국시리즈 6차전까지 11경기의 대장정 끝에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2위로 올 시즌 SK와 마찬가지로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 진출했지만, 정규리그 1위 KIA에 패하며 정규리그 1위의 유리함을 몸소 느꼈던 두산은 정규리그 1위의 이점을 안고도 반전의 희생양이 되면서 마지막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번 한국시리즈는 두산의 절대 우세 전망 속에 플레이오프 5차전 접전의 후유증을 SK가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SK는 자신의 장점을 단기전에서도 잘 발휘하며 시리즈를 주도했다. SK는 한국시리즈 우승의 높은 확율을 선점할 수 있는 1차전과 3차전을 승리하며 이변의 가능성을 높였다. 5차전에서는 불리한 선발 투수 매치업을 이겨내고 경기 후반 역전승으로 두산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2승 3패로 밀린 두산의 저력을 믿는 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두산은 6, 7차전을 홈구장인 잠실에도 하는 이점이 있었다. 정규리그에서 시즌 초반부터 독주하며 압도적 1위를 차지했던 두산이 이대로 물러설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두산은 6차전에서 선발 투수 이용찬의 난조에 따른 초반 3실점으로 어려운 경기를 했지만, 이를 반전시키며 8회 말에는 경기를 역전시키기까지 했다. 두산은 선발 투수 이용찬의 부진을 이영하, 박치국, 두 젊은 투수가 대신하며 경기 중반까지 대등한 마운드 대결을 했고 경기 초반 위력투를 선보이던 SK 선발투수 켈리의 구위가 떨어지는 시점은 6회 말 최주환, 양의지의 연속 적시타로 3득점하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두산은 이 기세를 이어가며 8회 말 양의지의 희생 플라이로 4 : 3의 리드까지 잡았다. SK는 경기 초반 상대 선발 투수의 난조와 하위 타선의 강승호가 2점 홈런을 때려내며 3 : 0으로 앞서갔지만, 이후 타격의 집중력이 떨어지며 추가 득점을 하지 못한 것이 두산이 되살아나는 원인이 됐다. 

SK는 켈리에 이어 김태훈, 정영일까지 필승 불펜진을 모두 소진하며 맞섰지만, 8회 말 역전 허용으로 우승의 길목에서 길을 잃는 듯 보였다. 8회 말 실점은 8회 초 2사 후 적시 안타 때 홈으로 들어오는 주자가 상대의 멋진 홈 송구에 아웃된 직후여서 그 여파가 상당했다. 이대로 경기를 내준다면 7차전 승부는 오히려 두산이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산은 7회 초 조기에 마운드에 오르며 투구 수가 많았던 함덕주를 대신해 에이스 린드블럼에게 9회 초 경기 마무리를 맡겼다. 4차전 100개를 넘은 투구 수를 기록했던 린드블럼에게 2일 휴식 후 등판은 무리가 있었지만, 두산은 에이스를 믿었다. 린드블럼이 경기를 마무리하고 시리즈 전적 3 : 3패를 만든다면 린드블럼의 투혼은 빛날 수 있었다. 

두산의 이런 바람은 SK의 홈런 공장장 최정의 한 방으로 무너졌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타격으로 고심했던 최정은 9회 초 2사후 린드블럼의 변화구를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과 연결했다. 계속되는 부진에도 그를 중심 타선에 중용한 SK의 신뢰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두산 마무리 투수로 나선 린드블럼은 앞선 두 타자를 변화구를 앞세워 삼진 처리했지만, 최정과의 승부를 이겨내지 못했다. 최정은 린드블럼의 변화구를 노렸다. 올 시즌 처음 2일 휴식 후 등판을 감행한 린드블럼의 투혼은 결과적으로 무리였다.  

극적인 동점 이후 승부는 긴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이미 필승 불펜투수를 모두 소진한 양 팀은 남은 불펜 투수들로 연장전 매 이닝을 긴장 속에 보내야 했다. 양 팀은 득점 기회를 주고받기만 할 뿐 승부를 결정지을 한 방이 나오지 않았다. 불펜진의 호투인지 타선의 집중력 부재인지 헷갈리는 승부의 마침표는 SK가 찍었다. 연장 13회 초 타석에 선 한동민을 한국시리즈에서 첫 등판한 두산 좌완 유희관의 공을 홈런과 연결했고 SK는 5 : 4로 재 역전에 성공했다. 

1차전 두산 에이스 린드블럼을 상대로 결승 홈런을 때려내며 SK가 시리즈 분위기를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한 한동민은 시리즈를 SK의 승리로 마감할 수 있는 한 방으로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연장 13회 초 솔로 홈런으로 결국 그를 한국시리즈 MVP로 이끌었다. 

연장전에서 리드를 잡은 SK는 연장 13회 말 등판이 가능할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거듭됐던 좌완 에이스 김광현을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광현 역시 4차전 선발 등판 이후 2일 휴식 후 등판의 부담이 있었지만, 특유의 역동적 투구폼으로 강하게 두산 타자들을 힘으로 상대했고 삼진 2개를 곁들이며 팀의 승리를 지켰고 우승의 순간을 마지막에 지키는 투수의 영광을 안았다. 

극적 우승과 함께 SK는 하위 순위 팀의 반전 시리즈를 만들어내며 2018 시즌 챔피언의 이력을 남기게 됐다. 정규리그 1위 두산은 통합 우승으로 최강 두산의 시대를 열어가려 했지만, 4번 타자 김재환과 필승 불펜 김강률의부상 공백, 수석 코치였던 이강철 코치의 KT 감독 선임에 따른 어수선한 분위기 등 악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두산 특유의 근성 있고 집중력 있는 야구를 하지 못하면서 SK에 이끌려 가는 한국시리즈를 하고 말았다. SK는 그들 특유의 홈런포를 앞세운 빅 볼 야구에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세밀함이 더해진 공격야구와, 한층 안정감이 높아진 수비, 효과적인 마운드 운영, 수 많은 가을야구를 경험한 베테랑들의 분전이 결합하면서 거함 두산을 상대로 이변을 연출했다. 


SK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올 시즌 후 팀을 떠나는 힐만 감독에게 외국인 감독 최초의 우승 감독의 영광을 안겼고 힐만 감독은 한. 일 프로야구에서 모두 우승 감독이 되는 독특한 이력을 남기게 됐다. 여기에 긴 부상 재활을 이겨내고 돌아온 에이스 김광현이 우승을 확정 짓는 투수가 되면서 또 다른 가을 전설을 만들었다. 이렇게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KBO 리그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남은 스토리를 양산했다. 


사진 : SK와이번스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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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을 일종의 망명을 한 아관파천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과 함께 독립협회가 설립된 연도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었고 독립협회는 일반 대중들이 참여한 자주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5회에서는 독립신문의 창간에서 시작해 독립협회의 활동 그 의의를 다뤘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거사가 실패한 이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서재필이 창간을 주도했다. 서재필은 당시 개화파 정치 세력을 주도하고 있던 인사들의 후원 속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서재필과 개화파 인사들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있음을 공감했다. 그들은 대중들을 계몽하고 근대사상을 전파할 수단으로서 신문 발행을 착안했다. 

그들은 임금인 고종과 방송에서는 상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지원, 당시 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외교가의 내. 외 인사들의 후원을 얻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신문을 발간했다. 독립신문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한글 신문으로 기사의 한 면은 영문으로 인쇄하여 외국인들에게도 우리의 소식을 알렸다. 






독립신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뜨거웠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언문이라고 칭해지며 천대받았던 한글로 만든 신문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독립신문에 구독 열기가 상당했다. 독립신문은 근대화 사상과 함께 자주독립 사상을 보다 알기 쉽게 전달했고 중요한 정책과 사안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대중을 계몽하는 대 큰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은 이 과정에서 당시로는 획기적인 광고를 개재해 운영자금을 충당하는 등 독립 운영을 위한 시도도 함께 했다. 

독립신문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정부와 일본 등 외부의 도움에 크게 의지하면서 독립적 운영에 한계가 있었지만, 우리 한글도 보다 더 대중들에게 다가선 활자 매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독립신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은 이어진 독립협회 설립과 운영에도 큰 힘이 됐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을 중심을 설립된 독립협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시민단체였다. 독립협회는 초기 사교적 단체로 시작했지만, 이후 일반 대중들이 참여하는 시민단체로 그 성격이 확장됐다. 독립협회는 민중계몽과 함께 나중에는 국민들의 참정권 주장과 함께 입헌군주제로의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등 개혁세력을 대표하는 일종의 정당적 성경까지 띄게 된다. 

독립협회는 이름 그대로 당시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침탈당하는 등 자주성이 흔들리고 있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독립문은 그들의 의지를 표현한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물론, 한계점은 있었다. 독립협회 중요 인사들 중 상당수는 정부 관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관변 단체의 성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여기에 정부 관료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외세 의존성이 강한 인사들이 상당수존재했다. 한때는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도 독립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정도였다. 그들의 세운 독립문도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주성을 표현하는 건축물이라 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이런 독립협회가 보다 더 대중들과 가까워진 계기는 만민공동회를 비롯한 대중 집회를 활발히 열면서 일반 대중들과 활발히 소통하면서부터였다. 만민공동회는 단순한 집회가 아닌 중요 현안에 대한 공론화와 함께 여론 조성의 장이었고 일종의 참여 민주주의 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민 공동회의 규모는 커졌고 참여자들 역시 크게 늘었다. 이와 동시에 독립협회의 발언권도 한층 강화됐다. 

독립협회는 이후 고종의 환궁과 대한제국의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고 서구 열강들의 국권 침탈에 대한 강한 저항 운동을 통해 일부 성과를 내기도 했다. 독립협회를 통해 대한제국은 자생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중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역사의 주역으로 나섰다는 점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프로그램에서도 그 의미를 크게 다뤘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주장은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고종에게는 큰 위협으로 느껴졌다. 이미 고종은 자신에 대한 독살 미수 사건의주범에 대한 처벌에 있어 전 근대적인 연좌제를 반대하는 독립협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에게 독립협회는 일종의 반대 정치세력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내놓은 중추원 설립을 통한 의회 구성안에 합의 한 직후 독립협회를 강하게 탄압했다. 그 이유는 독립협회가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 공화정을 설립한다는 이유였다. 물론,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가짜 뉴스였다. 이는 수구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모함이었다. 고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상설 개최하고 계속된 철야 집회로 맞섰지만, 수구 세력을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를 통하 폭력사태를 유발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독립협회는 1899년 해산되는 비운을 맞이했고 독립신문 역시 운명을 함께 했다.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했던 서재필 역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로써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 운동은 그 싹을 다 틔우기도 전에 힘을 잃었다. 이는 분명 대중들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무시한 처사였다. 고종은 전 근대적인 전제 군주제를 고집하면서 대중들의 정치 참여와 함께 민주적 정치제도로의 정치개혁을 끝내 거부했다. 

고종은 격변기에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가 효율적이라 여겼을 것으로 보이지만, 봉건제적 사상을 버리지 못한 한계점을 노출했다. 독립협회 역시 대중들을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여기기보다는 계몽하고 자신들이 이끌어야 하는 약한 존재로 여겼다. 고종과 독립협회 모두 대중들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정치권력 다툼 속에서 외세에 대응한 내부 역량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만약 독립협회의 운동이 수용되고 대한제국이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작동하는 나라가 되었다면 나라를 일본에 강탈당하는 비운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낮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열었던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작된 광장 민주주의는 이후 3.1운동과 6.10. 만세운동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한 4.19. 의거, 부마항쟁, 광주민주화 운동 6월 항쟁, 최근에는 국정 농단 세력을 끌어내린 촛불 혁명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당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참여 민주주의 정신과 역량은 역사를 통해 쌓였고 불의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표현됐다. 그 점에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할 수 있다. 역사저널 그날 195회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점을 잘 짚어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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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리그 2위 SK의 이변 연출이 눈앞에 다가왔다. SK는 11월 10일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두산에 4 : 1로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3승 2패를 만들었다. SK는 6, 7차전 중 한 경기만 승리하면 한국시리즈의 승자가 된다. 두산은 남은 2경기 모두 내일이 없는 경기를 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는 한국시리즈가 시작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다. 정규리그 1위 두산은 2위 SK에 무려 14.5경기를 앞서 여유 있는 우승을 했고 충분히 한국시리즈에 대비했다. 포스트시즌의 경험도 풍부한 두산이었다. 공. 수의 조화는 물론이고 외국인 투수 린드블럼, 후랭코프가 이끄는 마운드도 단단했다. 상대 팀 SK는 플레이오프 5차전의 접전으로 체력적인 부담이 상당했다. 어떻게 보면 SK가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가는 시리즈였다.

하지만 뚜껑을 연 한국시리즈는 접전이었다. SK는 홀수 차전을 모두 승리로 가져가면서 우승을 위한 높은 확률을 선점했다. 두산은 외국인 투수 린드블럼, 후랭코프가 활약한 2, 4차전을 승리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경기력에서 정규리그 우승 팀의 면모를 찾기 어렵다. 

1차전은 오랜 휴식으로 인한 경기 감각 저하가 두산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두산은 2차전 승리로 본래 모습을 되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인천에서 열린 3, 4, 5차전에서 두산은 두산의 야구를 하지 못하면서 3경기 2승 1패로 밀렸다. 그 결과는 시리즈 전적 2승 3패의 열세다. 





두산은 3차전에서 SK 우완 에이스 켈리에 완벽하게 타선이 막히고 SK 타선의 홈런포에 마운드가 무너지면서 완패했다. 두산에 살짝 위기감이 감돌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늦가을 비로 한 경기가 순연되면서 두산은 한숨을 돌렸다. 일정 변경으로 두산은 린드블럼, 후랭코프 원투 펀치는 4, 5차전에 내세워 분위기를 반전시킬 기회를 잡았다. 4차전에서 두산은 린드블럼의 역투와 정수빈의 극적인 2점 역전 홈런으로 2 : 1로 승리했다. 시리즈 분위기를 두산으로 가져올 수 있는 의미 있는 승리였다. SK의 불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산체스를 상대로 홈런 타자와 거리가 먼 정수빈이 역전 홈런으로 경기를 가져왔다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아는 두산이라면 그 기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컸다. 두산의 5차전 선발 투수는 2차전 승리의 주역 후랭코프였다. SK의 선발 투수는 언더핸드 박종훈이이었다. 선발 투수의 무게감은 두산이 크게 앞섰다. SK는 4차전 역전패의 후유증을 극복해야 했다. 

두산은 경기 초반 정진호의 솔로 홈런으로 1 : 0 리드를 잡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두산은 추가 득점 기회에서 집중력을 보이지 못했고 불안한 리드를 계속 이어갔다. SK 선발 투수 박종훈은 수차례 위기를 넘기며 5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박종훈이 5회를 버티면서 SK는 필승 불펜 조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SK는 6회 초 산체스, 7회 초 김태훈으로 마운드를 이어가며 추가 실점을 막았다. 

두산이 추가 득점 실패는 7회 말 SK의 반격을 불러왔다. SK는 7회 말 1사 후 하위 타선이 김성현의 1타점 2루타와 두산 실책에 편승한 3루 진루, 김강민의 희생 플라이로 순식간에 2 : 1로 역전에 성공했다. 6회까지 SK 타선을 압도하던 두산 선발 후랭코프는 SK 하위 타선에 발목이 잡히며 7회를 넘기지 못한 채 마운드를 물러났다. 

SK의 공세는 8회 말에도 이어졌다. SK는 8회 말 상대 실책으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가 2득점과 연결했다. 두산은 7회 말 외야수 정진호의 실책, 8회 말 유격수 김재호의 실책이 모두 실점과 연결되며 아쉬운 실점을 연발했다. 리그 최고의 수비력이라 평가받던 두산의 모습은 아니었다. 두산은 한국시리즈 내내 실책이 거의 매 경기 나오면서 어려운 경기를 하고 있다. 2승 2패로 맞선 5차전에서 두산은 실책이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했다. 

두산은 9회 초 1사 1, 2루의 기회에서 정수빈은 잘 맞는 타구가 라인드라이브 아웃과 병살타로 이어지며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두산은 4차전과 5차전에서 SK보다 더 많은 득점 기회를 잡고도 이를 득점과 연결하지 못했다. 4차전에서 정수빈의 깜짝 2점 홈런이 없었다면 승부는 알 수 없었다.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4번 타자 김재환의 공백이 느껴지는 두산이다. 

두산은 이를 메워줄 좌타자 오재일과 중심 타자 박건우마저 부진하면서 포수 양의지가 4번 타순에 들어서고 있다. 이는 중심 타선은 물론이고 하위 타선의 약화까지 가져오고 있다. 두산은 정규 시즌 내내 주전들의 부상 공백에도 백업 선수들의 활약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압축된 승부에서 주전 부상 공백이 예상 이상으로 크다는 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던 외국인 타자 부재도 SK 4번 타자 로맥의 활약과 비교되면서 커 보인다. 

정규 시즌에서 두산은 중심 타선 외에도 상. 하위 타선 할 것 없이 해결사가 등장하고 단단한 수비를 상대 공격 흐름을 끊는 야구로 높은 승률을 유지했다. 불펜진의 불안은 있었지만, 강력한 선발 투수진의 힘으로 불펜진의 부담을 줄였다. 하지만 단기전에서 두산은 강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불안한 불펜진은 승부처에서 두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고 타선은 주전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SK는 불펜진이 예상외로 선전하며서 지키는 야구가 가능해졌고 공격에서는 승리하는 경기마다 새로운 해결사가 등장하며 공격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김강민, 박정권은 팀 내에서 가장 많은 포스트시즌 경험의 선수답게 필요할 때 역할을 해주고 있다. 5차전에서는 정의윤이 3안타 활약을 하면서 팀 공격을 이끌었고 유격수 김성현이 해결사 역할을 했다. 

여기에 SK는 불안하다고 여겼던 수비가 예상외로 선전하면서 접전의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SK는 비로 한 경기가 순연되면서 6차전에서 에이스 켈리가 선발 투수로 나설 수 있다. 이미 3차전에서 호투했던 켈리는 5차전에서도 호투가 기대된다. 두산의 6차전 선발 투수 이용찬도 3차전 초반 실점 이후 좋은 투구를 했지만, 켈리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 사실이다. 

SK는 7차전으로 시리즈가 이어진다 해도 김광현 카드가 남아있다. 김광현은 4차전 등판 이후 3일 휴식 후 등판이지만, 4차전 투구 수가 90개로 많지 않았다. 초반 분위기를 이끌 여력이 충분하다. 두산으로서는 6차전에서 선발 투수 이용찬이 초반 무너진다면 마운드 운영에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외국인 투수 린드블럼, 후랭코프를 당겨서 마운드에 올릴 가능성이 크고 마무리 함덕주의 조기 등판도 불가피하다. 타선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마운드의 부담의 더 가중될 수밖에 없다. 

두산으로서는 정규리그 압도적 1위의 원동력이 된 두산 특유의 집중력과 근성을 겸비한 야구가 되살아나야 한다. 이미 5경기를 치른 상황에서 경기 감각 저하는 더는 통하지 않는 변명이다. 2승 3패로 밀리고 있지만, 여전히 두산의 저력을 무시할 수도 없다. 과연 두산이 2위 반란의 희생양으로 올 시즌을 마감하게 될지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이제 두산에게 패배 후 다음 기회는 없다. 


사진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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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정규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SK의 가장 큰 고민은 불펜진이었다. 타선은 홈런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상. 하위 타선 가리지 않고 폭발할 수 있는 홈런 타선의 위력은 큰 장점이었다. 선발 투수진은 원투 펀치 김광현, 켈리에 박종훈, 문승원까지 확실한 4인 로테이션을 갖췄다. 

하지만 불펜진은 의문이 있었다. 마무리 신재웅은 정규 시즌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마무리 투수 경험이 그에게 처음이었다. 신재웅 외에도 불펜진을 구성하는 선수들 상당수가 경험이 부족했다. 베테랑 윤희상이 있지만, 그 역시 불펜 투수로 포스트시즌 나선 건 처음이었다. 

SK는 준비기간 불펜진의 새로운 카드로 외국인 투수 산체스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산체스는 올 시즌 초반 선발 투수로 150킬로를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 에이스 못지않은 활약을 했지만, 후반기 급격히 힘이 떨어지면서 고전했다. KBO 리그에 오기전 주로 불펜 투수로 활약한 탓에 풀타임 선발 투수로서 체력적이 부담이 있었다. 여기에 비교적 단조로운 구질이 분석되면서 타 팀의 공략 해법을 찾은 것도 원인이 됐다. 난타 당하는 경기가 늘어나면서 산체스는 자신감마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결국, 산체스는 시즌 막바지 선발 로테이션에서 빠지고 말았다.






SK는 산체스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 선수 출전 규정한 한 경기에 외국인 선수 출전은 2명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산체스를 선발 투수로 활용할 수 없다면 선수 엔트리에서 손해를 봐야 했다. 준비 기간 산체스의 투구 내용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SK는 산체를 불펜 투수로 엔트리에 등록했다. 하지만 승부처에서 그를 중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런 우려와 달리 불펜 투수 산체스는 포스트시즌에서 성공적이었다. 산체스가 쌓아온 불펜 투수의 경험은 큰 힘이 됐다. 짧은 이닝 동안 그의 150킬로를 넘는 강속구와 140킬로를 넘는 고속 변화구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구위에 자신감을 가진 산체스는 적극적인 승부로 타자들을 상대했고 결과도 좋았다. 포스트시즌 경기를 거듭할수록 산체스의 비중은 높아졌다. 승부처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불펜 카드가 됐다. 

SK는 산체스를 시작으로 좌완 김태훈, 우완 정영일로 새롭게 필승 불펜진을 구성했다. 마무리 신재웅이 불안감을 노출했지만, 그 여파도 최소화됐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산체스는 필승 불펜 카드로 중요한 역할이 기대됐다. 산체스는 플레오프 3차례 등판에서 무실점 투수를 한 데 이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승계 주자 득점을 허용하긴 했지만, 1.2이닝 무실점 투구로 구원을 기록했다. 여전히 그의 구위는 위력적이었다. 

SK는 4차전 승부처에서도 그를 마운드에 올렸다. SK는 1 : 0 리드를 지키기 위한 카드로 우선 그를 선택했다. SK는 6이닝 무실점 투구를 하고 있었던 선발 투수 김광현의 투구 수에 90개 불과한 상태에서 김광현에게 1이닝을 더 책임지게 할 수 있었지만, 산체스를 신뢰했다. 산체스가 1차전 등판 이후 상당한 휴식기를 가졌다는 점도 고려할 결정이었다. SK는 산체스가 멀티 이닝을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7회 초 마운드에 오른 산체스는 1이닝을 가볍게 막아내면서 기대에 맞는 투구를 했다. 하지만 8회 초 산체스는 1사 후 두산 정수빈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정수빈은 한국시리즈에서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장타력을 갖춘 타자는 아니었다. 산체스도 이를 알고 있었고 적극적인 승부를 했다. 정수빈은 산체스의 몸 쪽 승부구를 우측 담장으로 넘기는 홈런과 연결했다. 산체스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역전 홈런의 허용은 그를 흔들리게 했다. 산체스는 남은 8회를 마치지 못하고 마운드를 물러나야 했다. 산체스의 강판은 SK에게도 충격이었다. 1 : 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한 SK는 2 : 1로 4차전을 내줬다. SK는 에이스 김광현이 나서는 4차전 승리로 시리즈 전체 분위기를 가져오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산체스가 무너졌다는 점이 아프게 다가왔다. 

산체스는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도 승부처에서 기용되야 하지만, 4차전 역전 홈런 허용의 잔상이 남아있다면 앞으로 등판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구위는 위력이 있다. 1경기 실패로 그의 남은 경기 등판 내용을 단정할 수 없다. 산체스가 4차전 기억을 잊을 수 있을지 한국시리즈 산체스의 남은 투구 내용은 SK의 한국시리즈 우승 희망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 : SK와이번스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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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가 3차전을 승리하면서 시리즈 전적 2승 1패의 우위와 시리즈 승리의 높은 확률을 선점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늦가을에 내린 많은 비로 뜻하지 않은 휴식 일을 가졌다. 이로 인해 경기 일정이 밀리고 투수 로테이션 등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두산과 SK 모두 전략 수정이 필요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두산은 3차전 완패로 가라앉을 수 있는 팀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릴 시간을 벌었다. 두산은 절대 우세라는 예상과 달리 공격수 수비, 마운드에서 허점을 드러내며 예상외로 고전하고 있다. 공격에서는 타선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으면서 특유의 집중력이 나오지 않고 있다. 

두산의 1차전은 경기 감각을 떨어졌다는 이유를 들 수 있었고 2차전 7득점으로 완전히 제 모습을 되찾는 듯했지만, 3차전 SK의 에이스 켈리에 완벽하게 공격이 막혔다. 1번 타자로 중용되고 있는 허경민이 부진하고 클린업에 자리한 박건우가 정규 시즌의 모습이 아니다. 

두산은 중심 타선의 집중 견제를 덜어줄 카드인 오재일은 깊은 부진에 빠져있다. 그나마 최주환이 맹활약하고 있지만, 뭔가 두산답지 않은 공격력이다. 여기에 4번 타자 김재환이 3차전을 앞두고 연습 과정에서 부당을 당하면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하루 휴식이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플레이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다. 






두산은 공격뿐만 아니라 SK에 비해 큰 장점으로 여겨졌던 수비에서도 매 경기 실책을 하면서 불안감을 노출했다. 경기 감각 문제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수비에서 아쉬움이 자주 보였다. 마운드에서는 마무리 함덕주까지 과정이 쉽지 않은 모습이다. 경기를 할수록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우완 불펜 김강률이 생각날 수밖에 없는 두산이었다. 불펜진의 히든카드로 생각했던 베테랑 좌완 장원준이 전혀 보탬이 되지 않으면서 불펜진 운영이 더 힘들어졌다. 이런 팀 상황에서 3차전 패배에 이어질 4차전은 큰 부담이었다. 

두산으로서는 4차전을 예상대로 했다면 정상 로테이션으로 마운드에 오를 SK 좌완 에이스 김광현에 고전할 수 있었다. SK는 김광현의 뒤를 충분한 휴식으로 힘을 비축한 외국인 투수 산체스와 포스트시즌에서 안정감 있는 투구를 하고 있는 김태훈, 정영일로 이어갈 수 있었다. 두산이 많은 득점을 하기 힘들었다. 

두산의 4차전 선발 투수로 예정됐던 이영하는 시즌 후반기 발전된 모습을 보이며 10승에 성공했지만,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한 단점을 피할 수 없다. 1승 2패로 몰린 팀 상황과 SK의 강타선은 그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두산으로서는 이영하에 이어 유희관을 곧바로 마운드에 올릴 수 있었지만, SK의 김광현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건 분명했다. 두산으로서는 4차전이 비로 연기되고 4차전 선발 투수로 에이스 린드블럼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천 연기가 반갑다. 

린드블럼은 1차전서 홈런포 2방을 허용하며 4실점했지만, 나쁜 컨디션은 아니었다. 오히려 1경기 등판으로 떨어진 경기 감각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두산은 린드블럼에 이어 2차전 승리 투수 후랭코프, 3차전에서 패전을 기록했지만, 투구 내용이 나쁘지 않았던 이용찬으로 로테이션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 김광현에 이어 박종훈, 문승원으로 이어질 SK의 선발 로테이션보다 더 힘이 느껴진다. 이미 충분한 휴식으로 체력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두산으로서는 분위기 반전과 마운드 정비라는 측면에서 늦가을 비가 긍정적이다. 

3차전 승리로 시리즈 분위기를 선점한 SK는 홈구장에서 계속되는 4차전이 예상대로 진행됐다면 분명 좋은 흐름에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김광현이 나서는 4차전은 선발투수 대결에서 확실한 우위를 가질 수 있었고 타선의 좋은 흐름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늦가을 비는 SK에 아쉬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루의 휴식은 SK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플레이오프 5차전을 치르고 이어진 한국시리즈는 SK 선수들에게 체력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베테랑들의 활약으로 2승 1패의 우위를 점했지만, 경기를 치를수록 힘이 떨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홈에서의 하루 휴식을 체력적으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4차전 선발 투수 김광현 역시 하루 더 휴식을 가지는 것이 나쁘지 않다. 김광현은 부상 재활 후 첫 시즌인 만큼 관리가 필요했고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도 무리한 투구를 자제하고 있다. 3차전 선발투수가 켈리로 정해진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미 4차전이 비로 연기될 가능성이 컸던 만큼 김광현은 하루 더 휴식을 가지면서 더 나은 구위로 경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플레이오프부터 잦은 등판을 했던 SK의 불펜진도 하루 휴식을 분명 긍정적이다. SK는 남은 경기에서 불펜진을 더 적극적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3차전 승리로 한껏 달아오른 타선의 흐름이 끊긴 건 아쉬움이다. SK는 3차전에서 1, 2차전에서 주춤했던 4번 타자 로맥이 홈런포 2방을 때려내며 승리의 주역이 되는 등 전체적으로 타격에서 활발함을 보였다. 4차전 두산 선발 이영하가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하지만 두산이 선발 투수가 린드블럼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린드블럼이 정규 시즌 SK 홈 문학구장에서 내용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명실 상부한 두산의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두산은 분위기 반전, SK는 체력 비축이라는 효과를 얻었다. 그대로 3차전 승리로 2승 1패를 만든 SK가 조금은 더 아쉬움이 큰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절대 우세라는 평가를 받던 두산이 우천 취소가 반갑다는 사실은 그만큼 SK의 기세가 상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산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흐름인 건 분명하다. 늦가을 비가 가져다준 휴식이 어떻게 작용할지 한국시리즈에 변수가 되는 건 분명하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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