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현대사에서 격변을 가져왔던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유신헌법을 통해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그의 최 측근의 총탄에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분명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후 맞이한 절대 권력의 붕괴는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 대한민국의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시대에 맞이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비극이 역사로 남았다. 그리고 그때의 아픔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에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잃었고 이후 친일파들의 협력 속에 정부의 기능을 하나하나 일본에 내준 상황이었다. 여기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에 저항했고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해 국제사회에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열강들이 주도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의 외침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이렇게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국내외 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었고 지금도 일본에서 그 업적을 칭송받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1대 통감을 지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고 독립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들에게는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그가 홀로 주도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연해주 일대로 들어온 독립운동가와 해외 독립운동 조직의 치밀한 계획과 협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치밀하게 준비됐다. 하지만 의거를 직접 실행에 옮긴 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안중근 의사 역시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나라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우선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투신한 모든 이들의 생각이 그와 같았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을 대신해 침략자 그리고 전 세계에 나라의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전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독립의지를 담은 외침을 토해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의연함을 보였다. 그는 독립군의 장교로서 교전 중 적장을 사살한 것으로 살인자가 아님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은 그의 재판을 서둘러 마쳐야 했다. 일본은 안중근을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저항하는 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를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그들의 침략행위가 더 알려지는 일이 초래됐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철저히 불공정한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1살의 젊은 나이에 그 삶을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지 전까지 옥중에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정리해 집필하는 열정을 보였다. 당시 그를 감시하던 감옥의 간수들조차 그에게 감복했음을 익히 전해진 일화다. 그 때문에 안중근이 남긴 기록들은 지금도 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100년의 세월의 더 흘렀다. 그의 사후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모두가 하나가 되어 조선의 독립을 외쳤고 이후에도 일제의 억압 속에도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도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안중근 의사가 염원하던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졌지만, 대한민국은 수많은 격동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그 시련의 역사를 넘어 지금의 대한민국은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소망했던 독립된 조국에 묻히는 일은 지금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 후 그의 유해가 있는 장소를 철저히 숨겼다. 그의 유해가 묻힌 장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수 있고 그의 정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두려웠을 지도 모른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하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지만, 원하는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안중근 의사의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에 가묘 상태로 남아있다.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의 정신은 계속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10월 26일 그의 의거에 대해 언론이나 방송 매체에서 큰 언급이 없다는 현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향했던 그의 총알은 또 다른 일제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향했을 것이다. 

그의 의거를 더 기억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상세히 알려야 하는 건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와 친일의 역사를 향한 강한 경고와 함께 후세의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더 발굴하고 알리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나라의 전통성을 바로 세우고 우리가 불의에 저항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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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는 조선 후기 암울한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세도 정치는 개혁 군주였던 정조 사후 그의 아들인 순조 임금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가문과 그와 관계된 특정 집단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한 시기를 말한다. 


60년 넘게 지속된 세도정치 기간 조선은 이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에 시달리며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소수의 특정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과거제도와 같은 공정한 관리 등용 역시 무의미해졌다. 권력의 독점은 왕권마저 무력화시켰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정도로 세도정치의 힘은 막강했다. 


세도정치가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기반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매관매직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행태는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의 백성들에 대한 극심한 수탈로 이어져 민생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는 민심의 이반과 더불어 국가 경제를 위축시켰다. 국가 운영의 시스템이 왜곡된 상황에서 나라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영, 정조시대 어렵게 만들어 놓은 국가 부흥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들의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것도 모자라 개혁 정책들을 모두 후퇴시키는 반동 정치로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 절대적인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개혁과 변화, 새로운 문물의 도입은 그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뒤처지며 패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선을 병들게 한 세도정치의 기원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안동김씨 김조순에서 시작된다. 김조순은 조선 후기 집권층을 이루던 노론의 명문가 출신으로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영조가 왕위 오르는데 일조하면서 왕가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정조, 순조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노론 중에서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동정하는 온건 시파에 속했다. 이는 영조 사후 집권한 정조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조순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노론의 중심인물이었지만, 정조는 그를 신뢰하고 집권 말기에는 크게 의지했다. 김조순 역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처신으로 정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적을 만들지 않은 처세를 통해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치 9단의 면모를 보였다.


정조는 특정 정파의 권력 독점을 경계하고 두로 인재를 기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운영의 기조로 삼았지만, 이를 위해 자신을 뒷받침할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각 정치세력에 고루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김조순은 이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급기야 정조는 편법을 사용하면서까지 김조순의 딸과 세자와의 혼례를 강력히 추진할 만큼 김조순에 강한 신뢰를 보였다. 


정조는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고 그의 사후 세자의 든든한 뒷 배경을 만들어주려 했다. 문제는 정조의 특정인에 대한 편애가 결국, 세도 정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김조순도 정치는 위기는 있었다. 혼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찾아온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혼례 추진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김조순은 철저히 몸을 낮추며 위기를 벗어났고 정조의 유훈에 힘입어 순조의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김조순은 순조를 도와 국정을 사실상 주도했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시작이었다. 물론, 김조순이 권력을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이면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고 조력자 역할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그가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안동김씨 세력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됐다. 한때 풍양조씨를 비롯한 몇 몇 세도가와 권력투쟁을 겪기도 했지만, 고종 때까지 그들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중전을 연이어 배출하며 권력기반을 더 공고히 하는 한편 요직을 독점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반하는 왕족들을 죽음으로 내몰며 자신의 권력에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작용이 있었지만, 붕당정치를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의 기본은 옛말이 됐다. 결국, 정조의 김조순에 대한 깊은 신뢰가 결과적으로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앞서 밝혔지만, 세도정치의 폐해는 극심했다. 국가 운영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계속된 수탈에 참다못한 백성들을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동학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 등 신흥 종교의 급속한 세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런 백성들의 불만을 세도 정치는 힘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당연히 나라의 혼란은 더 극심해졌다. 게다가 세도정치 세력은 지나친 수구 정책으로 발달된 서양의 문물 수용에도 소극적이었다. 나라의 발전 역시 더딜 수밖에 없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며 섭정을 한 대원군의 개혁정책과 이어진 개방정책으로 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지만, 한 때의 바람에 불과했다. 세도정치의 폐혜는 조선의 멸망에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런 세도정치의 시작이 개혁군주로 칭송받는 정조때부터라는 점은 반전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갑작스로운 죽음도 원인이었지만, 자신의 정치 세력을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인물을 지나치게 신뢰하면서 새로운 독재 권력이 만들어질 빌미를 주었다는 점은 정조가 남긴 많은 치적이 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사진, 글 : 지후니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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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2일은 우리나라 독립 운동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의 일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이사건은 일제의 우리 민족 탄압의 중심이었던 종로경찰서를 직접 공격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 거사를 실행한 김상옥 열사는 젊은 나이에 그 삶을 다하고 말았다. 


우리 독립 운동의 큰 전환점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었다. 우리가 3.1절이라고 부르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 강제 합방으로 인해 나라를 잃었던 조선의 국민들이 성별, 계층, 종교를 망라해 일제에 맞서 항거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에 따른 여러 의혹으로 촉발된 국민들의 분노는 주춤하고 있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동력이 됐다. 민족 대표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위한 비밀 움직임은 조직화됐고 마침내 지금의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운동으로 폭발했다. 이 만세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된 3.1 만세 운동은 한계가 있었다. 일제의 무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은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무고한 국민들이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만세 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강압적 수단으로 이에 맞섰다. 결국, 3.1운동의 기운은 우리나라의 독립이라는 염원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온 국민의 독립의지를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갔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3. 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제의 탄압에 주춤하던 국내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힘을 잃어가던무장 독립운동도 다시 이어졌다. 만주를 기반으로 한 독립군이 일제와 맞섰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의사들의 의거도 이어졌다.


이런 독립운동의 전개에 있어 김상옥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김상옥은 앞서 언급한 1923년 1월 12일 일어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홀로 결행했던 인물이다. 당시 종로 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 모진 고문으로 악명이 높아 일제 강압 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다. 이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제애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김상옥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었다. 


1890년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난 김상옥은 어려서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근면 성실함으로 바탕으로 자신의 가게를 열고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에 귀의하고 야학을 통해 지식을 쌓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상옥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만의 치열한 삶 속에서 일제 통치하 힘겨운 우리 국민의 삶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청년 김상옥은 자신의 부를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고 여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는 신물을 제작하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곧바로 일제에 발각되었고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김상옥 역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김상옥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더는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움을 인지하고 상해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김상옥은 여러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무력투쟁의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김상옥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일제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20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기위해 방문하는 미 의회 방문단의 방한을 즈음해 독립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거사를 추진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됐고 김상옥은 다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중국 상해에서 자금을 모으는 등 준비 과정을 거친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 폭파와 일본 총독 암살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 폭발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전의 폭탄 의거와 달리 해외에서 치밀하게 준비한 폭탄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가 사용한 폭탄은 일제의 수사 기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거사를 성공시킨 김상옥은 이후 일본 총독 암살을 시도했지만, 거사 전 조선인 순사들의 밀고로 은신처가 일제에 파악되며 뜻을 이루지 못 했다. 그는 수백 명 일제 경찰과 홀로 맞서며 항거했다. 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지붕을 오가며 고군분투했다. 그의 신출기 몰한 움직임에 일제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수백명을 홀로 상대해야 하는 그의 무기는 얼마 안 가 바닥을 드러냈다. 사방이 포위돼 더는 항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김상옥의 선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하는 것이었다. 삶은 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김상옥은 일제 경찰에 잡혀 굴욕을 당하는 대신 조선 독립의지를 그의 죽음으로서 보여줬다. 우리 민족의 기백을 보여준 의로운 죽음이었다. 이후 그는 가족들과 소수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다. 독립 영웅의 쓸쓸한 최후였다. 이후 독립이 되었지만, 김상옥은 1962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을 추서 받을 수 있었다. 독립영웅에 대한 뒤늦은 예우였다.


김상옥은 사후 그의 공훈을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을 뉴스로 접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빈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있다. 그 반대로 일제에 협력에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에도 요직에 등용되고 부를 더 축적해 나라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에서 일제의 잔재가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도 당장 급한 현실의 삶 속에 갇혀 정작 중요한 역사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앞으로 누가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해마다 3.1절, 광복절만 되면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그 후손들에 대한 처우가 관심을 가지지만, 불합리한 현실은 매 년 반복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제2, 제3의 김상옥과 같은 인물이 앞으로 나오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앞으로 이런 씁쓸한 현실이 나아지길 기대해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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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는 과거 사극에서 자주 사용됐던 소재 중 하나였다. 비리와 폭정을 일삼으며 일반 국민들을 수탈하고 못살게 하는 탐관오리들을 벌주고 무고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일종의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암행어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이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악을 응징하는 모습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권선징악의 드라마 소재로 그만큼 극적인 소재도 그리 흔치 않았다.

실제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왕명을 받고 지방을 순시하며 비리 관리를 벌주고 잘못된 지방행정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암행어사의 존재는 일반 국민들에게 희망이었다. 이들은 이런 사찰 업무와 동시에 민심을 살피고 왕에게 전달하는 가교 역할까지 했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중앙의 지방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암행어사의 임무는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신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까닭에 높은 지방관리들에 즉시 공권력을 행사할 수 막강한 권한이 있었음에도 수행자를 최소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야 하는 일이었다. 가는 길에 산짐승이나 산적들에게 봉변을 당하거나 오지에서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기에 그들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지방관들의 자객들에 의해 희생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붕당정치에 가속화된 이후에는 반대파를 견제하고 무고하는 수단으로 그 임무가 변질되기도 했다. 하지만 암행어사는 조선 말기 고종 때까지 그 존재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중앙에서 지방행정을 사찰하고 감독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암행어사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박문수를 꼽을 수 있는 실제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드라마가 과거 인기리에 방영될 정도로 박문수는 암행어사 그 자체를 상장하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다양한 설화는 지방 곳곳에서 구전되어 전해질 정도로 그의 이름은 조선시대 일반 국민들에 크게 회자됐다.

하지만 조선시대 실록에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한 기록은 없다. 대신 그는 조선 영조 시대 어사라고 하는 왕명을 수행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한 적은 있었다. 박문수는 당시 영남지역에서 어사로 활동하면서 빈민들을 구휼하고 지방관리들의 비리를 처벌하는 한편 지역의 현안들을 잘 해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그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라기보다는 행정가로 더 이름이 높았다. 박문수는 젊은 시절 관직에 등용된 이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주요 요직에 기용됐다. 그는 노론 세력이 조정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던 영조 시대 소론에 속해있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영조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탕평책의 수혜를 입은 인물이었다.



그만큼 영조의 박문수에 대한 신뢰는 컷을 가능성이 높다. 박문수는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판서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맡아 영조를 보필했다. 특히, 호조판서로서 박문수는 당시 문제가 되던 조세 제조 개편이나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것과 동시에 일반 국민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박문수는 이와 동시에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국가가 소금 생산을 관장해 필수품은 소금의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재정 확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는 대다수 조정 대신들의 반대와 조롱을 받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를 꾸준히 밀어붙이는 뚝심을 보였다.



여기에 양반과 평민 모두에게 균등하게 군역을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 도입을 주장하면서 조세정의의 실현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군포를 부담하지 않는 것은 양반들의 특권이라 여기던 시절, 집권층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박문수는 그 자신이 양반이었음에도 이를 주장하며 일반 국민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이런 과감한 정책 추진과 더불어 박문수는 정치적으로 반대파에 있던 인물이 무고를 당해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구명하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처리로 왕의 강한 신임을 받았다.

 

박문수가 추진했던 정책들은 당시대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정책은 일반 국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치열해지는 붕당정치의 와중에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던 당시 정치환경 속에서 박문수는 몇 안되는 일하는 정치가였다. 그가 죽자 영조는 깊은 슬픔은 드러내며 이를 애도할 정도였다.



박문수가 일반 국민들의 희망의 이름이 된 것은 암행어사로의 활동 이전에 진심으로 민생을 챙기고 고민했던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당시 국민들에게 민생정치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쉽게 체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다르지 않다.


선거때만 되면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겠다고 하면서 굽실거리던 국회의원 후보들이 막상 당선이 되고 나면 갑질을 일삼거나 애초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이 현실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도 정책에 이에 대한 베려는 없고 사회적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요즘에 박문수와 같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가의 존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2017년 연말, 세상은 더 발전하고 첨단 기술의 발달이 눈부시지만, 뉴스에서는 각종 비리와 부정들 판을 치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이는 박문수가 정치가로 활동하던 시기가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삶과 갑의 횡포에 지쳐갈 뿐이다. 어쩌면 우월한 직위를 이용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을 시원하게 응징할 누군가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속 소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문수는 조선시대 이런 소시민들의 삶 속에 함께 하는 영웅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실제 암행어사로서 비리 관리를 혼내주는 드라마 같은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삶에서 일반 국민들은 분명 큰 존재였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박문수와 같은 정치인은 분명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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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현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로 현대들에게 친숙한 시기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드라마의 소재로 조선시대, 왕이 있는 궁궐의 이야기는 자주 사용된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료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지만, 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향한 대결과 갈등, 그 안에서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보게 된다. 그것에서 파생된 왕권과 신권의 대립, 신하들 간 당쟁, 왕위 계승을 위한 왕자들의 대립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대결을 불러왔다. 그 대결에서 승리한 자는 역사의 중심에 섰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거나 그의 진면모가 왜곡되는 패배자의 역사를 감수해야 했다.

   

이는 권력의 2인자 세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왕위 계승 1순위 후보들이었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세자라는 직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우도 있었다. 왕에게 세자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존재이고 했지만, 반대로 권력을 약화하는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세자는 항상 왕에 의해 견제되고 그 충심을 의심받아야 했다. 즉, 왕과 세자는 부자 간이 아닌 정적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이는 비극적인 역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군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비운의 세자들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아는 3인의 세자는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조선 초기 성군, 세종대왕의 형이었던 양녕대군, 병자호란이 혼란기의 왕이었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조선 왕조 최고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가 그들이다.





양녕대군은 폐세자의 비운을 겪긴 했지만, 대신 편안한 말련을 보냈다. 양녕대군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 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둬야 했다. 조선 초기 왕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태종은 악역을 자처하며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을 거쳐 승자의 자리에 올랐다. 피로 세워진 정권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을 불러왔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친, 인척이던 공신이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태종의 맏아들로 일찍이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 역시 자신들의 처가 쪽 인사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역사서에서 나오는 양녕대군은 왕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행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도피의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자의 왕위 계승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던 태종이었지만, 세자의 계속되는 귀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양녕대군은 폐세자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권력을 내려놓은 댖가는 달콤했다. 양녕대군은 이후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의 보살핌 속에 왕실의 좌장으로 자리했다.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 사후에도 그는 왕실의 종친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주변의 친. 인척들도 더는 화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초기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도 권력의 달콤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그는 세조의 권력찬탈때 상당 역할을 했었다. 이후 언급할 사도세자와 소현세자와 달리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어찌보면 스스로 군왕의 길에서 벗어난 양녕대군과 달리 사도세자와 소현세자는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 대립이 소현세자 역시 아버지 인조와의 불화가 그를 힘들게 했다. 공통적으로 두 세자의 아버지는 신권에 맞서 왕권 강화를 위해 고심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던 태종과 달리 그들은 왕권에 버금가는 신권과 힘겨운 파워게임을 해야했다. 여기에 붕당정치가 심화되던 시기에 왕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치력 발휘가 필수적이었다.  

 

영조는 집권 초기부터 선대 왕인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렸고 후궁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큰 컴플렉스가 있었다. 노론이라는 거대 정치세력과의 힘겨루기도 이겨내야 했다.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을 막고자 탕평책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신권의 약화를 노린 측면이 강했다. 영조로서는 자신의 후계자가 보다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하길 바랐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숨막히는 권력다툼에 부정적이었고 이는 마음의 병으로 이어졌다. 역사 기록에는 사도세자의 기행이 많이 실려있기도 하자. 이런 사도세자의 처지를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세력이 동정하고 동조하면서 신, 구 권력 간 다툼이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당장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자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집권층도 자신들에 비협조적인 사도세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해도 사도세자에게는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강경파는 사도세자를 탄핵했고 영조는 이에 동조했다. 영조는 더 나아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영조는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권력을 더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자신에 반하면 아들마저 피의 숙청을 하는 왕에게 대응할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이 영조에 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당시의 억울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지만, 권력의 냉혹함을 마음 깊이 느끼며 생을 마감해야 하는 비운의 왕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사도세자와 함께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또 한 명의 왕자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의 탐욕이 만든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인조는 조선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황제에 항복의 예를 했던 왕이었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채 복구되기 전에 당한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선을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에 예속됐고 일반 서민들을 삶은 더 피폐해졌다. 왕과 집권층은 이런 현실을 극복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전쟁에 패하고 적장에 항복을 한 왕이 그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긴 힘들었다. 그를 둘러싼 집권층마저 때에 맞지 않게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미 없는 대의 명분에 빠져 있는 강경파 뿐이었다. 패전국 조선에는 변화가 필요했지만, 인조를 비롯한 집권 세력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던 시절 청나라에 유입된 발전된 서구의 문물과 기술에 관심을 보였고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적 사상과 다른 서양의 문화에도 개방적이었다. 그는 조선의 발전적 변화를 통해 나라를 부국강병에 이르도록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이와 별도로 청나라의 실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후 조선이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덜어내는데 힘 섰고 배우자인 세자빈과 더불어 직접 무역 등을 통해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조선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렇게 열린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였지만, 이는 아버지 인조와의 불화를 불러왔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돼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병 치료를 받던 중 돌연 사망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의 죽음은 독살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아버지 인조는 석연치 않은 아들의 죽음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도리어 세자빈과 손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인조는 조선의 변화를 꿈꾸는 아들이 자신과 집권층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에게 권력은 부자 간의 정보다 더 소중했다.  


소현세자의 사후 조선은 변화의 동력을 잃고 영.정조때까지 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반응하지 못하면서 근대화된 서구와의 국력 격차가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의 지연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소현세자의 황망한 죽음이 아쉬운 이유다. 
 

 

이렇게  조선시대 왕의 후계자들은 결코 모두가 행복하지 못 했다. 아니 대부분이 세자가 된 이후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세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앞서 언급한 3명 외에도 불운한 삶은 살았던 왕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희생의 기반 위에 조선은 그 역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패배한 이들의 기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양녕대군, 사도세자, 소현세자 이 세 명의 후대에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행운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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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배우면서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가 당파싸움이다. 분명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대립과 분열을 강조하는 듯 한 단어의 조합은 부정적인 면이 강하다. 이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 사관의 영향이 강하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파를 갈라 싸우기를 좋아하고 단결하지 못한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실제 우리 역사에 있어 당파싸움, 지금은 붕당정치로 칭해지는 정치권의 대립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붕당정치에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과한 부분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붕당정치의 일부분만을 보고 그것을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진 정치와 거리가 먼 당파 간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이루고 수준 낮은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는 우리 정치의 행태가 오버랩 되면서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더해지는지도 모른다.

붕당정치는 조선 중기 본격화됐다. 조선 초지 정치의 주도 세력은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공신들과 태종 이방원과 권력 쟁취를 함께 한 측근들이 중심이 된 훈구세력 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대를 이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관직은 독점되었고 왕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 왕들은 훈구세력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이들과 맞설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지방을 기반으로 한 사림세력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성종 때 이후 왕들 역시 사람 세력을 적극 기용했다. 하지만 사람 세력들이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기득권을 가진 훈구세력은 그들을 끊임없이 견제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사화가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 세력들이 숙청당했다.

그럼에도 사람 세력을 꾸준히 그 세력을 넓혔고 선조 때에 이르러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사람 세력은 공공의 적이었던 훈구세력을 몰아낸 이후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됐다. 한정된 관직에 늘어난 양반의 수는 권력을 향한 대결을 불가피하게 했다. 애초 성리학 사상적 차이로 갈라져 있던 사람 세력이 정치적 대립관계가 더해졌다. 이는 붕당정치의 시작을 불러왔다.


선조 때 조정의 중요 관직을 놓고 시작된 대립에서 시작해 동. 서 양당으로 갈라진 정치 세력을 지금의 여당과 야당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붕당정치를 본격화했다. 한때 율곡 이이와 같은 인물이 동. 서 양당의 공존을 모색하며 이를 위해 힘쓰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인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기반으로 동인은 퇴계 이황의 사상을 기반으로 더 강하게 대립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서론으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 등으로 다시 분화되며 붕당정치는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초기에는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 독점화 경향이 강화되면서 상대당을 숙청하는 식의 정치 보복이 난무하는 식으로 변질됐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대립이 정파 간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면서 국가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수행원들이 동인과 서인의 입장에서 다른 의견을 내면서 일본의 야욕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부분은 붕당정치의 폐해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렇게 붕당들의 대립은 나라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정파의 이익과 권력투쟁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물론, 붕당정치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용한 왕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끈 영조와 정조는 특정 정당에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인재 기용으로 정파 간 대립을 완화했다. 이를 통해 정치 안정과 함께 왕과 권력을 지난 붕당과 그렇지 않은 붕당이 상호 견제하에 공존했다. 이런 구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이처럼 붕당정치의 본래 목적은 권력의 쏠림 현상을 막고 다양한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발전된 정치 형태였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 붕당정치는 강력한 왕권이 있을 때만 제대로 작동했다.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왕권이 미약할 때 정파 간 이해관계는 다시 심화됐고 권력 투쟁은 다시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상호 공존의 원칙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일반 국민들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마치 오늘날 우리 정치의 모습과 같았다.


정조 사후 붕당정치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면서 그 명맥마저 끊어지게 됐다. 그나마 존재하던 견제세력마저 사라진 세도정치는 나라를 더 병들게 하고 조선을 쇠락시키는 원인이었다. 즉,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식의 논리는 다소 비약한 측면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던 붕당정치 시스템의 붕괴가 더 큰 문제였다.


이렇게 붕당정치는 당파싸움으로 매도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조선의 역사다. ​근대적 정치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사장시켰다는 점이다. 붕당정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조선 시대 붕당정치의 나쁜 이면을 그대로 닮은 우리 정치의 모습을 보면 붕당정치에 대해 무조건 비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할 원인이었을지 아직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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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방영이 잘 안되고 있는 정통 역사 드라마지만, 과거 재미있게 봤던 역사 드라마 중 정도전은 통해 고려말, 조선 초의 역사적 흐름과 각종 사건, 그 안에서 펼쳐진 인물들의 지략 대결을 볼 수 있었다. 이전 왕이 중심인 드라마와 달리 정도전은 조선개국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당한 정도전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도전은 고려만 조선 초기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이후 역사의 뒤편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가 기틀을 세운 조선이 수백 년을 이어갔지만, 그는 언급조차 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대신 고려를 지키기 위해 그와 대립했던 정몽주가 추앙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의 복권은 조선말 고종 때가서야 이루어졌다.

드라마 정도전은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대해 재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물론 드라마 속 정도전의 모습이 모두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정도전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아직 우리의 삶에 뿌리 내려있는 유학의 이념이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 편에 정도전과 대조되는 인물이 눈길을 끌었다. 하륜​이 그 인물이다. 하륜은 정도전과 같이 고려말 대학자 이색의 제자였다. 신흥 정치 세력인 신진사대부였지만, 걸어간 길은 많이 달랐다. 고려말 고려 귀족세력의 중심이었던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의 수하에 있었다. 권문세가들과 날카롭게 대립하던 신진사대부와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는 권력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받는 것은 시류에 따른 능수능란한 처세와 대응력에 있다. 그는 이인임의 실각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재기에 성공했다. 이인인을 대신해 권력을 잡은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에 반대하며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사대부세력과 입장을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의 왕조를 바꾸려는 역성 혁명론에는 거리를 두었다. 정몽주가 중심이 되어 고려를 지키려했던 온건파 사대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행보를 했다. 강경파와 온건파 사대부의 다툼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그는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그는 새 나라에서 다시 한 번 관직을 얻고 기회를 잡았다.

하륜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역학과 풍수에도 조회가 깊어 조선의 한양 천도에도 일정 영향을 미쳤고 조선 초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시행되는 나라 만들기에 일정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존재감이 빛난 건 이방원과의 만남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주창하던 이방원은 신권 중심의 재상정치를 주장하던 정도전에 밀려 그가 원했던 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사병혁파 정책으로 권력기반마저 흔들릴 상황이었다.

하륜은 이방원이 정도전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책사로서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또 다른 2인자 생활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방원, 즉 조선 3대 왕 태종의 강력한 지원 속에 조정의 요직에 머물며 왕권 강화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지는 조선초 상황에서 천수를 누리는 행운까지 잡을 수 있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이후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친.인척을 비롯한 공신들에 대해 처절한 숙청을 단행했다. 하륜 역시 공신으로 그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하륜은 태종의 의중을 잘 읽어냈고 절대적인 신임 속에 소용돌이 속에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즉,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 그는 항상 태풍의 눈에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그는 조선 초 정치가로 권력자로 그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조선 건국의 중심에 있었던 정도전의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다가 죽임을 당한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스스로 1인자가 되기보다는 2인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모나지 않은 2인자로 견제의 눈길을 피했고 권력자에게 필요한 인물로 자신을 만들었다. 그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 탄핵을 받았지만, 태종은 그를 비호할 정도였다. 그는 태종의 의중을 잘 알 고 있는 몇 안되는 공신이었고 태종은 그를 버릴 수 없었다.


이렇게 하륜은 성공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았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임을 고려하면 하륜은 항상 승자의 편에 있었다. 살아남는 자가 진정한 승자임을 보여준 하륜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역사의 패배자였던 정도전을 더 많이 기억한다. 그가 남긴 유산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그 삶을 다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과 신념은 곳곳에 유적에 그 흔적을 남기도 있다. 하지만 하륜의 족적은 기록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 승리한 하륜이었지만, 역사의 승자라고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당시의 삶에서 그는 조선의 공신이고 위인이었지만, 지금의 하륜은 그의 남다른 처세와 전략가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이렇게 영원한 2인자로 각인된 그의 삶이 역사적으로 성공적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륜이 성공한 정치인이고 2인자였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치열한 경쟁에 있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 적용해도 될 정도로 치밀하고 전략적이었다. 정치적 타협을 포기하고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넣은 정도전보다는 지혜로운 삶을 산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하륜과 정도전의 비교되는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좋은 예가 될지도 모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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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 그에 대해 현대의 평가는 개혁군주였다는 점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정치, 사회적으로 조선의 부흥을 이끌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해 다양한 정치 세력의 공존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양반이면서도 관직 등용에서 철저히 배격됐던 서얼, 후처 소생의 자녀들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또한 정조는 소수 기득권층만을 위한 정치가 아닌 일반 백성들을 삶에도 관심을 가지는 민생정치를 추구했다. 정조는 노예제도 개선에도 힘썼고 지방의 토착 비리 근절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함에 있어 부역에 나서는 이들에게 일정 보수를 지급했고 농업 외에 상공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자들도 권력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최고 지도자의 이런 움직임은 조선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부흥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어린 나이 때부터 치열한 권력 암투에 노출되어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권력 투쟁에 밀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는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조는 영조에 의해 세손이 되고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반대 세력에 견제와 감시를 당하고 살해 위협을 이겨내야 했다.






정조는 이런 위험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무예를 익히고 다방면에 지식을 쌓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영조 역시 정조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견제했지만, 결과적으로 후계자로서 그의 자리를 지켜줬다. 사도세자가 죽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론 강경파들이 조정의 중요 자리를 차지한 현실에서 영조의 후원이 없었다면 정조는 진작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노론 강경파는 정조가 집권할 경우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의 왕위 계승을 막아야 했다. 그럴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정조를 죄인의 아들이라 칭하며 정통성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조는 어려서부터 터득한 정치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이런 공격을 피해 가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왕위에 올랐다.


물론, 그것으로 정조가 정치적 입지를 다진 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암살 위협은 계속됐고 관직의 상당수는 반대파들로 채워져있었다. 정조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과감한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노론 세력에 맞설 학문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는 하면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군사적인 힘을 키웠다.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 노론 강경파와 끊임없이 대결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집권 19년이 되는 1795년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이벤트를 마련하며 왕권의 위엄을 보였다.

그해 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유로 대규모 행사를 추진했다. 그것은 수도 한양에서 지금의 수원에 건립한 화성 행차를 실행에 옮겼다.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수천 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대규모 행사였다. 그 행차의 과정에서 한강을 도하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함께 했다. 정조는 이 행사 진행의 준비와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그리고 그 기록인 "원행을묘의궤"는 최고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만큼 그 안에 기록은 상세했고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했다.


정조가 수원 화성 행차에 공을 들인 데는 이유가 이었다. 화성은 정조에 있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었고 당시 최고 기술을 집약한 화성과 더불어 왕위 친위 부대 장용영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 이벤트를 통해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일종의 무력시위를 했다.


그곳에서 정조는 장용영 부대 1만 3천 명이 모두 동원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장용영의 군세를 만천하에 보였다. 당시 화성에는 일반 국민들보다 장용영 부대원들이 더 많았을 정도로 정조를 위해 건립된 성이었고 그의 권력을 지탱하는 군사적 기반이었다. 이런 장용영 부대의 위력을 실감한 반대 세력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포용의 정치를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 행차 마지막에 대규모 연회를 베풀며 행사에 참여야 한 모든 이들을 위로했다. 반대파 세력들도 차별이 없었다. 그는 연회를 일종의 화합의 장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통합의 정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했다. 힘 있는 왕이 추진하는 통합의 정치는 명분도 있었고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화성 행차가 끝난 후 정조는 반대파들도 관직에 등용하며 통합의 정치를 실현했다.

정조로서는 8일간의 화성 행차를 통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죄인 낙인을 지워내고 왕실의 정통성을 굳건히 했고 그의 권력적 기반을 공고히 했다. 아울러 행사 과정을 일반 국민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하면서 모든 이들이 함께 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사회적 통합을 이루도록 했다. 화성 행차는 그의 개혁 정치에 있어 하이라이트였다. 이런 사회통합의 기운을 발전의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면 조선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성 행차가 있은지 5년 후인 1800년, 정조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 세자의 나이는 10살이 체 되지 않았다.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립할 시간도 없었다. 그의 사후 왕위에 오른 순조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었다. 보수적인 집권 세력은 정조가 추진하던 개혁 정책과 그 성과물들은 대부분 폐기했다.

정조시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실학자들 역시 숙청당했다. 신흥 종교였던 천주교 역시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보수 반동의 움직임 속에 조선은 부흥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선의 정치 역시 일부 외척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면서 정치 세력가 견제와 토론의 문화는 모두 사라졌다. 물론, 정조의 개혁이 왕권 강화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혁이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선 부흥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도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결국,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그의 개혁뿐만 아니라 조선 부흥의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대형 이벤트였다. 비록 그때의 불꽃이 오래가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그 기록들이 상세히 남아있어 정조의 개혁 정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사진, 글 : 지후니(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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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사에 있어 몽고와의 전쟁은 사상 유례없는 장기간의 투쟁이었다. 당시 아시아는 전체는 물론이고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몽고군은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이 침공한 나라는 예외 없이 굴복당했다. 하지만 고려는 30여 년을 버티며 그들과 맞섰다. 하지만 긴 전쟁으로 인해 일반 백성둘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몽고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고려는 장기간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몽고군이 육지에서 세계 최강이지만, 해전에 약하는 점을 이용한 결정이었다. 강화도에 자리한 고려 정부는 대몽 전쟁을 이끌었다. 문제는 강화도 고려 정부가 민생을 외면한 그들만의 삶을 영위했다는 점이었다. 



강화도 고려정부를 이끈 건 최씨 무신 정권 세력이었다. 최충헌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러 세습된 최씨 정권은 대의 명분을 앞세워 대몽 전쟁을 주도했지만, 실상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전쟁을 이용했다. 그들은 강화도에 자리를 잡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그들에 동조하는 집권 세력들도 다르지 않았다. 전 국토가 전쟁에 신음하는 사이에도 강화도에서는 풍악이 울렸다. 그들은 전쟁에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했고 그들의 호화생활과 권력 기반인 사병을 유지하는 데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군대가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애초 최씨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병조직으로 친위부대였다. 그 역할도 몽고군과의 전쟁보다는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대한 단속과 치안 유지가 주를 이뤘다.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무신 정권 기간 이들은 기득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며 빈곤과는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씨 정권이 붕괴되고 몽고와이 화친이 성사되면서 삼별초의 위상이 크게 약화됐다. 최씨 정권에 이어 무신 정권을 이끌었던 이들도 하나 둘 제거되면서 유명무실했던 왕권이 강화됐다. 고려 왕은 몽고의 힘을 등에 엎고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무신정권의 흔적들을 지워냈다. 무신정권 유지에 선봉에 있었던 삼별초 역시 그들의 장래가 불투명했다. 



삼별초는 이에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배중손이 중심이 되어 거병한 삼별초는 대규모 병력을 강화에서 남해안의 진도로 옮겨 근거지로 삼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한 삼별초는 진도에 대규모 군사시설과 궁궐을 짓고 또 다른 정부임을 선언했다. 그들의 세력은 남해안은 물론, 호남에까지 이르렀다. 몽과와의 전쟁이후 고려는 2개의 정부가 함께 존재하는 사실상의 내전상태가 됐다. 



비록 삼별초가 무신정권 치하에서 백성들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들이 주장한 대몽항쟁의 지속이라는 명분은 상당 수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른 지지세를 바탕으로 삼별초는 고려의 남부지방에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삼별초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독자적인 사신을 파견해 대몽 항쟁을 함께 할 것을 요청하는 등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런 삼별초는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정부와 그들과 화친을 맺은 몽고 모두에 상당한 위협이었다. 당연히 고려와 몽고 연합군은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무신정권 하에서 정예 군대로 양성된 삼별초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해전에 약한 몽고군은 그들을 상대하기 더 버거웠다. 이에 몽고는 강화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는 등 회유책을 펼치기도 했다. 삼별초는 이런 시도를 그들의 전쟁 기반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강성했던 삼별초 세력은 고려, 몽고 연합군의 기습공격에 급격히 무너졌다. 방심이 문제였다. 고려, 몽고 연합군의 기만술에 솎은 삼별초는 순식간에 방어선이 무너지며 궤멸됐다. 이 과정에서 지도부 대부분이 사망했고 그들의 세력을 급격히 위축됐다. 그 과정에서 일부 삼별초 군은 제주로 근거지를 옮겼고 수년간 항쟁을 지속했지만, 끝내 그 나머지 세력마저 궤멸되며 그 존재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몽고에서 원나라로 이름을 바꾼 친원세력이 득세하고 자주성을 상실한채 원나라에 사실상 복속되는 암흑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실패는 그 점에서 분명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그들의 태생이 비정상적이었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항쟁을 시작했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지만, 외세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하는 등 고려의 항전 의지를 각인시켰다는 점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점에서 삼별초의 항쟁은 몽고에 의한 침략의 역사에서 한 줄기 빛이 되는 사건이었다.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삼별초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삼별초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의 접근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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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멀기만 제국 발해에 대해 다뤘다. 멸망하 고구려를 계승하고 그들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에 대한 이겨기는 마음을 뜨겁게 했지만, 이후 우리 민족에서 만주 지역이 남은 땅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만주 지역은 과거 요동, 요서라 불리던 곳으로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었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는 이 지역을 근거지로 중국의 대제국과 당당히 맞서며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고 주변 이민족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에는 눈엣 가시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신흥 제국 당나라와 신라의 지속적인 공세와 함께 지도층의 내분이 겹치며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다. 고구려가 사라지면서 요동은 우리 민족에게서 멀어졌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 차지하는 것에 만족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오려가지 못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부흥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 지역의 유민들을 자신들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구려 유민들은 삶은 터전을 잃고 낯선 곳에서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다. 패망국 국민의 삶이었기에 그 삶은 비참하고 열악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대륙경영 희망이 희미해져 갈 무렵, 대외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요동지역에서 자리하고 있던 거란족들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곳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고 요동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권이 느슨해지는 계기가 됐다. 이는 숨죽여 살아온 고구려 유민들에게는 큰 기회였다. 


이들은 혼란을 틈을 타 당나라를 탈출했다. 그 중심에는 과거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있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통합해 당나라에 맞설 수 있는 독자 세력을 만들었다. 대조영은 당나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이동해 나라를 건국하려 했다. 당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대조영은 이를 물리치며 건국에 탄력을 받았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하며 만주 지역에 새 나라를 세웠다. 발해의 시작이었다. 발해는 고구려계 유민들이 지배층을 구성했지만, 말갈족과 여타 주변 여러 이민족을 통합한 국가였다. 발해는 건국초기 당나라의 계속된 침략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를 강하게 맞받아치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수군을 활용한 중군 본토 공격은 우리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결코 중국 통일 왕조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발해는 외교적 고립을 막기 위해 왜와 통교를 강화하고 주변과의 교역을 통해 나라의 부를 축적했고 군사력 또한 한층 강화됐다. 


발해를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음을 느낀 당나라는 발해에 유화책을 제시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꿨다. 발해는 당나라와 사회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면서 나라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문물을 더해 독창적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다. 


나라가 안정되자 발해는 주변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했고 지금의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전성기의 발해는 과거 고구려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발해의 건국과 융성은 우리 민족에게 잃어버린 대륙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 영역을 지금의 러시아 지역까지 확대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발해를 두고 중국에서 해동성국이라 극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역사 학계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하는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발해였지만, 다민족 국가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국가의 내분이 심화되고 지도층마저 분열되면서 나라가 쇠약해져 갔다. 결국,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혼란해진 국가 사정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했고 발해는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다. 발해 유민 중 일부가 당시 새롭게 건국한 고려에 흡수되기는 했지만, 대륙의 영토는 잃고 말았다. 


이후 대륙 경영에 대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고려 시대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은 위화도 회군을 불러오며 고려왕조의 몰락을 불러왔고 조선 초기 정도전이 주도했던 요동 정벌 시도 역시 이방원이 주도한 정변에 정도전이 희생당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후 조선이 명나라에 철저히 사대외교를 펼치면서 우리 민족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지 못했다. 


당연히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대륙 경영의 역사도 묻히고 말았다. 남북, 분단의 현실 속에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 있는 고구려, 발해에 대한 역사 연구고 충실히 진행될 수 없었다. 중국이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시도를 노골화하고 했음에도 그 사실을 뒤늦게 알 수밖에 없었다. 최근 고구려,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부족함이 있는 건 사실이다.


과거 찬란했던 역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과거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재현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기록들을 재현하고 우리 역사로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이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중요한 무형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는 발해에 대해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사진, 글 : 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Posted by 지후니74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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