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191회는 조선이 최초로 국제 외교무대에 나선 그 뒷이야기를 다뤘다. 1883년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이 당시 조선 주변국인 일본과 청나라를 제외한 서양 국가에 최초로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보빙사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미국으로 파견된 조선의 외교 사절단은 1882년 체결된 조미 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에 파견된 미국 공사 푸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고종의 명을 받아 미국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구성원의 고위 관리들의 자재들로 젊고 당시 조선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에 긍정적인 이들이었다. 고종은 이들로 하여금 외교관의 역할뿐만 아니라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토대로 이들이 개화정책을 이끌어가기를 기대했다. 

보빙사 일행의 미국행은 험난했다. 당시 배편을 이용해야 했지만, 조선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들은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넜고 미국 서부에서 미국 대통령이 있는 뉴욕까지 긴 기차 여행을 거치는 몇 달간의 여정을 견뎌내야 했다. 통역이 가능한 조선인이 없었던 탓에 영어가 가능한 일본, 청나라 통역관을 함께 대동해야 했다. 

한 마디로 산 넘고 물 건너 찾은 미국은 이들에게는 신세계였다. 당시 미국인 남북 전쟁 이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고 국가 발전에 가속도를 붙이는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도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강대국으로 자리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미국을 찾은 조선 외교 사절단에게 미국은 조선이 오랜 기간 사대 관계를 유지했던 중국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당연히 젊은 조선 외교사절단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보빙사 일행은 당시 미국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미국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상황에서 화려한 한복에 갓을 쓰고 등장한 이들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이들이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왕에게 행하는 큰 절을 올리는 장면은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조선 보빙사 일행의 행보는 언론에 연일 보도됐다. 이 점에서 조선의 보빙사는 조선을 미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큰 관심만큼이나 조선 보빙사 일행을 환대했다. 이렇게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긍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조선과 미국의 수교에는 복잡한 안팎의 사정이 있었다. 조선과 미국의 수교에는 청나라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당시 청나라는 그들의 위협하는 러시아 세력과 맞서기 위해 외적인 힘이 필요했고 강대국으로 자리한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청나라는 조선을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기 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 

청나라는 적극적으로 조선과 미국의 수호 통상조약을 주선했다. 숨은 의도가 있었기에 그 조약은 조선에 절대 유리하게 체결되지 않았다. 청나라는 조약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임을 명시하려 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청나라로서는 외교 무대에서 조선의 지배권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고 청나라의 의도는 관철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에게 미국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됐다. 

조선으로서는 청나라가 주도하는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와의 수교 필요성은 있었지만, 자주적인 외교는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불가능했다. 당연히 청나라가 조선의 속방이라는 조약 문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미국은 이런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미국의 힘을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은 조약 내영에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인정받았다. 이래저래 조선으로서는 불공정한 협상이었지만, 중국만을 바라보던 조선에게 미국의 존재는 새로운 희망이었을 수 있다. 

이후 조선은 미국과의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보빙사 파견에 이어 공사관 설치를 적극 추진했고 상당한 예산을 이에 쏟아부었다. 조선의 미국과의 호의적 관계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방해가 있었지만, 조선의 미국에 대한 호의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었다. 미국은 철저히 자국 이익에 따른 외교를 했다. 미국에게 조선은 자신의 상품을 팔고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외교적 신의는 그들에게 크지 않았다. 이후 미국은 조선이 그들에게 경제적 이익에 큰 보탬이 안된다는 판단을 한 이후 외교 관계를 공사에서 영사로 격하했다. 미국은 조선보다는 일본과의 관계가 그들의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다. 결국,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적 우호관계를 조선의 미국에 대한 선의를 일종의 짝사랑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는 과정에 조선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 미국인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맞교환한 상황에서 조선의 이런 노력은 의미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자국의 이익에 따른 변화하는 국제 외교의 흐름에 둔감했다. 조선의 미국에 대한 외교는 또 다른 사대외교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즉,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청나라를 끌어들인 조선이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를 이용하려 했다는 점은 분명 자주 외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더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국제 외교무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노력도 분명했다. 근대 국가로 나가려 하는 시도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었다. 

이렇게 조선의 미국에 대한 보빙사 파견은 역사적으로 평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당시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던 일행들의 운명이 크게 엇갈렸다. 이들은 이후 개화파의 중심세력이 됐지만,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온건 대화파와 홍영식,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개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진행하려 했고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개화정책 시행을 원했다. 

급진 개화파는 이후 일본 세력을 끌어들인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으로 3일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홍영식,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개화세력 전체가 큰 타격을 받고 말았다. 내부의 동력으로 개화를 하고 나라는 발전시키지 못하는 조선의 상황이 낳은 비극이었다. 이후 조선은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미국에 대한 보빙사 파견은 또 다른 비극적 역사의 한페이지였다.  





사진 : 역사저널 그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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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 일정이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잠실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도는 공연은 10월 남부 지방인 여수와 창원을 끝으로 야외 공연을 마무리하고 실내 공연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10월 태풍으로 여수 공연이 취소되는 아픔이 있었다. 그렇기에 10월 달의 유일한 공연인 창원 콘서트의 의미는 더했다. 


조용필 역시 여수공연이 취소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이전 공연보다 많은 멘트와 소통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 공연 레퍼토리 역시 좀 더 친숙한 곡으로 변화를 주었다. 대신 조명과 멀티미디어 화면은 더 업그레이된 모습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의 공연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0월 13일 창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공연 장면을 담아보았다. 




이전 공연과 같은 화려한 오프닝



다양한 화면이 펼쳐지는 멀티 스크린



화려한 무대



어김없이 등장한 이동 무대



관객들과 함께



멋진 마무리


이번 창원 공연은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등 악조건 속에서 음향 등에서 소소한 문제들이 몇 차례 발생하기도 했고 조용필 역시 환절기에 컨디션 저하로 애를 먹었다. 남해안을 강타한 태풍의 영향은 흥행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연은 이전과 같이 역동적이고 화려했고 팬들을 하나로 묶었다. 


깊어가는 창원의 가을 밤, 그도 관객들도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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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를 토크 형식으로 풀어가는 장수 프로그램 역사 저널 그날, 190회 주제는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임오군란이었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은 당시 신식 군대에 비해 홀대를 받았던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궁궐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일반 백성들의 최고 권력의 상징인 궁궐을 습격한 사건으로 당시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조선의 정치는 물론이고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사건의 직접 발단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이었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 조약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이후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부국강병을 기조로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는 아버지 대원군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대원군은 10년간 권력에서 멀어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고종과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쥔 명성황후와의 관계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이 중심이었던 척사파가 내준 권력의 빈자리는  중전이었던 명성황후의 친인척들로 채워졌다.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긴 했지만, 실제 국정을 주도하는 세력을 명성황후가 중심된 민씨 정권이었다. 문제는 민씨 정권 역시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민씨 정권하에 조선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 역시 힘겹기만 했다. 일반 백성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이후 자리를 잃은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13개월 동안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쌀로 지급받은 급료에는 모래가 다수 섞여 있었다. 이에 구식 군인들은 그동안 누적된 불만이 폭발시켰다. 민씨 정권은 이들의 불만은 힘으로만 제압하려 했고 무력 충돌을 불러왔다. 

구식 군대의 봉기는 당시 권력의 중심부를 겨냥했고 민씨 정권의 중요 인물이 이 과정에서 살해됐다. 이들은 또한 신식 군대의 교관으로 있었던 일본군마저 살해했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또한, 구식 군인들을 궁궐에 난입하여 민씨 정권의 중심이었던 명성황후를 잡으려 했다. 명성황후는 급히 몸을 피해 충주까지 피신해야 했다.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지만, 무장봉기 세력은 사태의 수습을 위한 역량이 없었다. 궁궐을 난입하고 관리들을 살해한 행동은 큰 범죄 행위였다. 중전에서 위해를 가하려 한 행동은 사실상 왕에 대한 역모와 같은 일이었다.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일본군을 살해한 행위는 큰 외교 문제를 불러올 수 있었다. 사태가 수습된다면 임오군란의 주도 세력들은 큰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무장봉기를 정당화하고 신변을 보호해줄 정치적 배경이 필요했고 이는 칩거 중이던 대원군의 복귀를 불러왔다. 

대원군은 임오군란을 일으킨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정치적 동반자 명성황후가 실종되고 무장봉기 세력에 일반 백성들 까지 가세하며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한 카드로 대원군을 다시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났던 대원군의 화려한 복귀였다. 

대원군의 복귀는 10여 년간 이어진 개화정책의 폐기를 불러왔다. 각종 제도와 군사제도의 개편은 본래 대로 돌아갔고 관리들의 구성은 척사파로 채워졌다. 임오군란은 어려운 생계에 따른 불만이 그 원인이었지만, 권력 구도의 변화까지 불러온 셈이었다. 

권력을 다시 잡은 대원군은 실종 상태인 명성황후의 국장을 선포하며 그의 정치적 재기를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사태 수습을 위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고 개화의 물결을 거부하는 외교 정책은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원군이 복귀할 수 있었던 건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여론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여론의 지지는 내적으로 대원군에게 큰 힘이 됐지만, 대원군은 대외적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는 그들을 만나러 청나라군 진영에 들어온 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이후 대원군은 긴 세월 청나라에서 범죄자로서 취급받으며 억류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일국을 대표하는 인사에 대한 납치 감금은 상식 이하의 일이었다. 

이런 청나라의 행동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그들의 의도가 숨어있었다. 조선은 오랜 세월 중국 통일 왕조에 사대 정책을 이어왔다. 청나라에도 병자호란 이후 이런 기조를 이어왔다.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조선의 개화 이후에도 지속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는 외교와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일종의 속국으로 삼으려 했다. 청나라로서는 조선을 지렛대로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에서 미국 등 서양의 지원을 받으려 했고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권을 극대화하려 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청나라로서는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원군이 그들의 조선 지배력 강화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청나라로서는 대원군을 제거하고 명성황후 및 민씨 정권이 권력을 되찾는다면 조선에 대한 지배가 한층 더 수월해질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이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이는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한 갑신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청나라 세력의 확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세력 확대를 함께 불러왔고 조선은 이후 외세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개화정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역량과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임오군란은 잠깐 동안의 태풍과 같았지만, 그 파장은 너무가 컸다. 조선은 이로 인한 직접적인 손실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해 쏟아야 할 역량마저 소모하고 말았다. 당시 집권층의 무능과 부정부패 등의 문제가 불러온 이 사태는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의 책임은 집권층에 있었다. 임오군란은 조선 근대사의 큰 전환점이었지만, 그 변화는 조선을 지극히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했다. 



사진 : 역사저널그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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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80회에서 다룬 이야기는 머나먼 유라시아 초원, 그곳에서 자리했던 고대 문명과 우리 역사에서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었다. 동양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로 유명한 강인욱 교수는 강의를 통해 초원 유목민족들의 문화가 우리와 전혀 동떨어진 남 이야기가 아님을 설명해주었다. 

유라시아라는 개념은 유럽과 아시아를 통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자세히 들어가면 중국과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형성된 초원이라 할 수도 있다. 이 초원에서는 고대로부터 유목을 주업으로 하는 민족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한때는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중국과 맞서기도 했다. 

이들이 지배하는 초원에서는 동. 서양을 연결하는 초원 길이 일찍부터 형성되고 교역의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다. 초원의 유목민족들의 문화의 상호 전달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세력을 키워나가기도 했다. 그들의 문명은 인류 문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초원의 유목민족들은 초원을 벗어나 중국 본토에도 진출해 나라를 만들도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중국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중국 역사의 상당수는 한족이 아닌 북방 유목민족들의 역사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몽골은 지금까지 역사에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고 가깝게 현재 중국이 생겨나기 이전 마지막 왕조는 중국 북방에 자리했던 여진족들이 그 중심이었다. 





이렇게 중국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원의 유목민족들이지만, 그들의 역사와 문화의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유목민족들의 그들의 역사와 문화의 기록을 잘 남기지 않았다. 독자적이 문자가 없었던 탓도 있고 척박한 환경에서 이동이 잦은 그들의 생활은 생존이라는 하루하루의 생존이 중요해다. 그들이 나라를 이룬 이후에도 과거의 삶의 방식이 쉽게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의 역사와 문화는 대신 중국 한족들의 역사사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기록은 편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자신들과 늘 대립관계에 있었던 초원 유목민족들이 한족들에게는 좋에 보였을 리가 없다. 실제 중국의 역사에서의 초원 유목민족들은 오랑캐, 이민족으로 격하되어 있고 그들의 성향은 약탈을 일삼는 호전성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당연히 그들이 이뤄놓은 역사, 문화적 성과가 제대로 기록될 수 없었다. 여기에 그들의 유물과 유적 상당수는 약탈의 수단이 되면서 그 모습이 사라지고 변형되면서 찬란했던 문화적 전통이 상당부분 사라지는 비운도 겪어야 했다. 

유목민족에 대한 인식은 중국 유교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우리의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들에게도 유목민족들은 오랑캐, 후진적인 문화를 가진 지배를 하거나 물리쳐야 할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그러한 경향을 더 두드러졌다. 이에 바탕한 중국에 대한 사대 정책은 결국, 병자호란이라는 큰 불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 나는 클라스 제80회에서는 초원 유목민족들의 문화적 전통이 우리가 결코 동떨어져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삼국시대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초원 유목민족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는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진 부여족을 그 뿌리로 하고 있고 백제 역시 고구려에서 그 뿌리가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포함된 부여, 고구려, 백제는 모두 그 근원이 유목민족과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유목민족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다.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유목민족들의 마장마술 기술이 고구려 벽화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과거 기마부대 활용이 많았던 고구려는 초원 유목민족들의 나라에 경쟁을 하거나 교류하면서 그들의 마장마술 기술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와 유목민족들의 교류는 지리적인 영향으로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만, 유목민족들 문화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언뜻 삼국시대 동남쪽에 치우친 위치 탓에 북쪽과의 고류가 쉽지 않았던 신라가 유목민족과 교류했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 등 각종 유물 속에서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유물과 일치되는 부분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를 두고 신라의 기원도 북방 유목민족에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강의자인 강인국 교수는 그보다는 신라 역시 북쪽의 유목민족들과 오래전부터 교류했다는 증거로 풀이했다. 즉, 우리 민족은 초원을 지배했던 유목민족들과 오래전부터 교류하거나 경쟁하면서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또 다는 자양분으로 삼았다. 

유목민족들의 역사와 문화는 오랑캐들의 문화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초원은 우리 민족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이는 우리 고대사의 영역이 그만큼 더 넓어짐을 의미한다. 어쩌면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교류가 확대된다면 유라시아의 초원은 다시 한 번 우리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하면서 고대사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미래를 그려본다. 


사진 : jtbc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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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9월 30일 24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각자의 위치는 달랐지만, 점점 하나가 되어 일본의 조선 침탈에 맞섰던 5명의 주인공 애신, 유진, 희성, 동매 그리고 쿠도 희나의 마지막 운명이 결정됐다. 애신을 제외한 4명의 주인공들을 각각 장렬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조선인이었지만, 미국으로 살아왔던 유진은 만주에서의 항일 의병활동을 위해 평양행 기차에 오른 애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주인공이 됐다. 친일파 집안의 자손이었던 희성은 비밀 신문사를 통해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으나 그것이 발각되어 고문 끝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동매는 홀로 일본 무신회와 최후의 일전 끝에 최후를 맞이했다. 친일파 집안의 딸로 정략결혼에 희생되었던 쿠도희나는 인생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호텔을 일본군과 함께 폭파함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만주로 근거지를 옮긴 애신이 이끄는 항일 의병은 독립군으로서 일본과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게 됐다. 애신은 사랑하는 연인 유진은 물론이고 항일 의병활동을 하면서 어느덧 하나가 된 동매, 희성, 쿠도희나와 독립된 조국에서 재회할 것으로 다짐하며 항일 의지를 다졌다. 

이들 5명의 주인공은 모두 자신의 위치만 잘 지켰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격변의 시기에도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애신은 양반집 딸로 일본에 맞서지 않는다면 양반으로서의 지위와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찍부터 외세에 의해 침략당하는 조선의 상황을 인식한 애신은 이런 삶을 거부하고 의병에 합류했고 목숨을 건 활동을 했다. 






이런 애신 주변의 인물들은 애신을 통해 그들의 삶이 변했다. 유진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뒤로하고 우연한 기회가 다다른 미국에서 유능한 미국인 장교로 인생을 변화시켰다. 그에게 조선은 엄격한 계급 사회였고 지배층이 피 지배층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억하기도 싫은 곳이었다. 실제 그 구도 속에 유진은 부모를 잃었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유진은 조선에 원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병 활동에 매진하는 애신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점점 조선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애초에는 애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수준이었지만, 유진은 조선인으로서의 애국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유진은 애신을 위해 그리고 조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친일파 집안의 자식이었던 희성의 집안의 부를 넘겨받기만 하면 되는 위치였고 실제 조선의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애신을 통해 조선의 현실과 일본의 만행을 분노했고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항일 운동을 도왔다. 그 결과는 참혹한 죽음이었지만, 희성은 가장 행복함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끝냈다. 

하층 계급의 자식으로 힘든 유년기를 보낸 동매는 일본 무신회에서 빼어난 역량을 발휘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들의 약탈과 조선 침략에 앞장서는 위치에 있었다. 동매는 주인공중에서 조선에 대한 악감정이 가장 강했다. 하지만 동매는 그가 사모하는 애신을 걱정하는 마음속에서 점점 조선을 위해 일을 하게 됐고 항일 활동에 힘을 더하게 됐다. 동매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멈추지 않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애신에 대한 연정을 간직한 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쿠도희나는 애초 자신을 일본인과 정략결혼시킨 부친에 대한 원망이 원인이 되어 의병 활동을 돕게 되었지만, 일본의 만행을 겪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호텔을 폭발시키기에 이른다. 그 역시 일본인으로의 삶을 살았지만, 조선인으로서의 마지막 긍지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각자의 주인공들은 격동의 시대 일본에 저항했다. 미스터 션샤인은 이들 주인공 외에 일본의 침략에 맞섰던 일반 국민들과 무력으로 그들과 대결했던 의병들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뤘다. 드라마 초기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하기만 한 조선의 상황이 그게 부각되면서 이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도 상당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일본의 조선 침략의 과정에 이에 항일 의병 활동을 면밀히 다루면서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일본의 침략에 앞장서는 친일파들의 행태와 대비되는 의병들의 모습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이들 의병 중에는 이름 모를 국민들이 상당수였고 이들은 일본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무기와 군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의병으로 분한 조연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시청자들의 분노하게 하기도 했고 깊은 슬픔에 빠뜨리게도 했다. 조선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저항에도 패망의 길을 걷게 되지만, 국내 의병운동은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군, 이후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며 항일 무장 투쟁을 지속토록 했다. 

미스터 선샤인은 이런 의병들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풀어내면서 일본의 침략에 조선이 결코 무기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신분을 초월한 일반 국민들의 의병으로서의 활동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은 5명의 주인공이 아닌 의병으로 분한 모든 배우들이었다. 

이렇게 미스터 선샤인은 항일 의병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주었지만, 우리 역사에서 항일 의병 활동의 기록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 역사 책에서도 항일 의병은 무장 독립 투쟁으로 얼마간 다루어질 뿐이다. 의병들의 활동과 전과, 그들의 기록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제에 의해 그 기록일 사라지고 왜곡되기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항일 의병의 역사를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거 고구려의 영토 확장 등 고대사에서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곤 하지만, 근 현대사에서 일본의 침략에 맞선 이들의 역사에는 관심이 적었다. 조선의 늦은 개화에 따라 세계 흐름에 뒤처졌고 봉건 사회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하는 내부의 개혁 부재 등으로 나라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해 망국의 아픔을 겪었다는 정도로 인식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항일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사는 역사 책에서 그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느낌이었다. 

마치 대한민국의 독립이 항일 의병과 독립군의 항전, 임시정부의 노력, 그밖에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던 독립운동이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2차 세계 대전에서의 일본 패망의 결과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그것이 직접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독립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의지마저 인정받을 수 없었음을 함께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항일 의병을 비롯한 독립운동사가 상대적으로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보다 역사에서 비중이 낮은 건 어쩌면 여전히 뿌리 뽑히지 못한 친일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친일 세력들에게 항일 의병과 독립운동의 역사는 그들의 비수를 찌르는 일일 수도 있다. 실제 상당수 친일파들이 광복 이후에도 사법, 행정, 입법 등 국가 운영의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며 대대손손 부와 명예를 세습하는 현실 속에서 독립운동사가 세세하며 조명되기는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히려 일제시대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식의 식민사관이 곳곳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미스터 선샤인은 어쩌면 항일 의병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션샤인은 드라마이기에 고증이나 이야기 전개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면이 있었고 극적 장치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사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일깨워주었다. 드라마에서 의병의 이야기를 주인공을 위한 배경정도로 사용하지 않고 세밀하게 다뤄주었다는 점은 의미가 컸다.  

앞으로 드라마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사가 더 비중 있고 상세하게 연구되고 알려져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영원히 기록되고 많은 이들이 기억하길 기대해 본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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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정철과 윤두수가 주축이 된 세자 책봉을 둘러싼 비밀 회합은 선조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서먹한 자리가 된다. 선조는 서인의 영수 정철과 윤두수, 동인의 영수 이산해, 류성용에게 붕당 간의 대립에 대해 경고했다. 선조는 강력한 왕권을 신하들이 뒷받침해줄것을 은연중 내비쳤다. 당연히 선조의 후계자, 즉 세자 책봉을 위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선조와 정치적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신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차세대 권력이 필요했다. 그들은 미래 권력만큼은 서인의 정치 성향과 맞는 인물이 필요했다. 서인이 원하는 세자 후보는 광해군이었다.


서인은 이러한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동인과 관계에 있어 유화책을 펼쳤다. 그들은 동인이었던 우의정 류성용에게 인사권을 모두 관할하게 하게 선조의 결정에 동의했다. 서인은 동인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세자 책봉에 있어 협력을 받으려 했다. 서인은 동인과의 협의 과정에서 세자 책봉의 당위성을 내세웠고 동인 측과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이었던 동인의 영수이지 영의정 이산해는 서인 측의 의도를 의심했다. 이산해는 비밀리에 서인 측 책사 송익필과 접촉과 그들이 세자 책봉을 주장하는 진짜 의도를 파악했다. 이산해는 곧바로 정치 공작에 들어갔다. 이산해는 선조가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측근에 서인 측의 의도를 흘렸다. 이는 정치적 파란을 예고했다.

내심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에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서인 측의 움직임이 탐탁치 않았다. 왕권 강화라는 선조의 목표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인의 의도대로 세자를 결정한다면 국정 주도권을 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는 선조와 서인 세력 간 강한 대립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이런 선조와 서인의 대립구도 속에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동인, 영의정 이산해로부터 서인의 의도를 파악한 우의정 류성용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 했다. 그는 명분론을 바탕으로 세자 책봉에 동의했지만, 서인 측의 미래 권력을 위한 시도가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게 된 이상, 협력을 하기 어려웠다. 이는 서인과 동인과 또 한 번의 정치적 대결을 불가피하게 됐다.

이​렇게 세자 책봉을 둘러싼 정치권의 복잡한 대결 구도가 심화되는 가운데 일본으로 떠난 통신사 일행은 국서 문제로 일본 측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국서의 내용이 조선 측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측은 최고 실력자 토요토미의 의도를 반영해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입조한 것으로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 조선으로서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조선은 일본 측에 국서의 내용을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일본의 또 다른 실력자 고니시와 대마도주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고니시는 국서의 해석이 다름을 들어 조선이 국서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미 긴 시간 일본에 머물러있었던 조선 통신사 일행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통신사 일행은 국서의 내용을 조금 수정하는 선에서 일본 측과 합의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는 길, 일본의 최고 실력자 토요토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었다. 서인 인사였던 정사 황윤길을 그의 침략 의도를 우려하고 있었지만, 동인 인사였던 부사 김성일은 그와 반대로 토요토미의 오만방자함을 허세로 파악하고 있었다. 당연히 일본의 침략 우려에 대한 시각도 달랐다. 이는 앞으로 동. 서인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외침에 대한 논의가 순탄치 않게 됨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발발이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상황, 일본의 위협이 점점 거세지는 상황에서 조선은 내부 문제로 이에 대한 대비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우려가 내부 논의에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군사력과 침략 의도를 아직 조선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다가오는 전쟁의 검은 그림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안타까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사진, 글 : 지후니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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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조선에 대한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 아픈 역사 속에서 주인공은 각자의 처한 환경이 달랐지만, 일본이라는 공공의 적을 향해 하나로 뭉쳤고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노력에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의 운명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22회에서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중요한 장면이었다. 이미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더 키워가던 일본은 그 조약을 주도한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정치인들을 내세워 한일 병합이라는 그들의 목표를 더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 고종 황제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을 규탄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국운이 기운 조선의 특사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미 미국과 영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로 더는 거칠 것이 없었고 외교 무대에서도 조선의 입지는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어렵게 파견한 특사의 노력이 실패한 후폭풍은 상당했다. 일제는 친일파를 앞세워 고종의 퇴위를 강력히 진행했다. 알게 모르게 일제에 대한 항거를 주도하고 있는 고종 황제의 존재는 일제에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친일파 대신들의 압력은 결국 고종의 선위로 이어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고종의 퇴위와 함께 조선 군대의 해산을 진행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고종 황제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당시로는 일본 못지않은 신식 군대 체계를 갖춘 정규군으로 그 군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일제에게는 조선 군대는 분명 위협적이 존재였다. 일제는 고종황제의 퇴위로 사기가 떨어진 대한제국 군대에 대해 전격적인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한제국 군대 중 상당수는 금전 보상을 받고 이에 응했지만, 일부 군인들은 이에 불응하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대한제국 군대의 봉기는 서울 한복판에서 강렬한 시가전으로 이어졌다. 역사적으로도 군대 해산을 거부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일본군에 치열하게 싸웠다. 이는 당시 서울에 있었던 외국인에 의해 당시의 상황이 그림으로 남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군대는 준비가 부족했고 중과 부족을 드러냈다. 젊은 병사들은 하나둘 희생되었고 대한제국 군대의 침략자들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는 처절한 패배로 마무리됐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애신을 어릴 적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애신이 명사수로 거듭나게 한 장승구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일본군에 저항하며 대한제국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대한제국 군데는 강제 해산의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중 상당수는 의병에 가담하면서 항일 의병 투쟁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군대마저 잃은 조선의 국운은 한층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항일 의병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애신과 그녀를 위해 미군 장교의 지위를 벗어던진 유진, 일본 흑룡회에서의 높은 지위를 버리고 애신을 위해 헌신한 동매의 운명 또한 위태롭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선의 운명은 모두 알고 있듯이 1910년 한일 강제 합방과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을 향하고 있다. 이를 막기위한 의병 운동 등 구국 운동이 전개되고 있지만, 조선 내에서의 항일 의병운동은 패배로 귀결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애신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앞으로 어떤 상황에 처할지를 예상하게 한다.

드라마 종영까지 2회까지를 남겨둔 미스터 션사인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라는 타임 테이블 속에 주인공들의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운명에 처할지를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슬픈 운명이 예정되어 있지만, 슬픈 역사적 배경 속에서도 시청자들은 이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최소한 드라마에서만이라도 희망의 역사를 보고 싶은 것이 시청자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렵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애신과 유진이 그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지 그 외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슬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그 모습이 변해갈지 미스터 션사인 22회 군대해산의 장면은 그 당시에 우리 민중들이 느꼈을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앞으로 주인공들에게 닥칠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감도 함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사진, 글 : 지후니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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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는 조선 후기 암울한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세도 정치는 개혁 군주였던 정조 사후 그의 아들인 순조 임금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가문과 그와 관계된 특정 집단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한 시기를 말한다. 


60년 넘게 지속된 세도정치 기간 조선은 이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에 시달리며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소수의 특정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과거제도와 같은 공정한 관리 등용 역시 무의미해졌다. 권력의 독점은 왕권마저 무력화시켰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정도로 세도정치의 힘은 막강했다. 


세도정치가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기반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매관매직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행태는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의 백성들에 대한 극심한 수탈로 이어져 민생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는 민심의 이반과 더불어 국가 경제를 위축시켰다. 국가 운영의 시스템이 왜곡된 상황에서 나라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영, 정조시대 어렵게 만들어 놓은 국가 부흥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들의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것도 모자라 개혁 정책들을 모두 후퇴시키는 반동 정치로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 절대적인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개혁과 변화, 새로운 문물의 도입은 그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뒤처지며 패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선을 병들게 한 세도정치의 기원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안동김씨 김조순에서 시작된다. 김조순은 조선 후기 집권층을 이루던 노론의 명문가 출신으로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영조가 왕위 오르는데 일조하면서 왕가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정조, 순조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노론 중에서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동정하는 온건 시파에 속했다. 이는 영조 사후 집권한 정조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조순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노론의 중심인물이었지만, 정조는 그를 신뢰하고 집권 말기에는 크게 의지했다. 김조순 역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처신으로 정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적을 만들지 않은 처세를 통해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치 9단의 면모를 보였다.


정조는 특정 정파의 권력 독점을 경계하고 두로 인재를 기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운영의 기조로 삼았지만, 이를 위해 자신을 뒷받침할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각 정치세력에 고루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김조순은 이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급기야 정조는 편법을 사용하면서까지 김조순의 딸과 세자와의 혼례를 강력히 추진할 만큼 김조순에 강한 신뢰를 보였다. 


정조는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고 그의 사후 세자의 든든한 뒷 배경을 만들어주려 했다. 문제는 정조의 특정인에 대한 편애가 결국, 세도 정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김조순도 정치는 위기는 있었다. 혼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찾아온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혼례 추진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김조순은 철저히 몸을 낮추며 위기를 벗어났고 정조의 유훈에 힘입어 순조의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김조순은 순조를 도와 국정을 사실상 주도했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시작이었다. 물론, 김조순이 권력을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이면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고 조력자 역할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그가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안동김씨 세력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됐다. 한때 풍양조씨를 비롯한 몇 몇 세도가와 권력투쟁을 겪기도 했지만, 고종 때까지 그들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중전을 연이어 배출하며 권력기반을 더 공고히 하는 한편 요직을 독점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반하는 왕족들을 죽음으로 내몰며 자신의 권력에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작용이 있었지만, 붕당정치를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의 기본은 옛말이 됐다. 결국, 정조의 김조순에 대한 깊은 신뢰가 결과적으로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앞서 밝혔지만, 세도정치의 폐해는 극심했다. 국가 운영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계속된 수탈에 참다못한 백성들을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동학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 등 신흥 종교의 급속한 세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런 백성들의 불만을 세도 정치는 힘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당연히 나라의 혼란은 더 극심해졌다. 게다가 세도정치 세력은 지나친 수구 정책으로 발달된 서양의 문물 수용에도 소극적이었다. 나라의 발전 역시 더딜 수밖에 없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며 섭정을 한 대원군의 개혁정책과 이어진 개방정책으로 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지만, 한 때의 바람에 불과했다. 세도정치의 폐혜는 조선의 멸망에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런 세도정치의 시작이 개혁군주로 칭송받는 정조때부터라는 점은 반전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갑작스로운 죽음도 원인이었지만, 자신의 정치 세력을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인물을 지나치게 신뢰하면서 새로운 독재 권력이 만들어질 빌미를 주었다는 점은 정조가 남긴 많은 치적이 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사진, 글 : 지후니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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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내부 결정 과정을 거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조선, 하지만 통신사에 대한 인식은 양국에 크게 달랐다. 조선은 교린을 핑계로 일본과 새 지도자 토요토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조선과의 전면전을 피하려는 세력이 조선 통신사를 이용했다. 고니시와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를 토요토미에서 입조를 위한 사신으로 위장했다.

이들은 역관과 문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본 내부 세력에 이용당하며 소중한 시간만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나마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상황 대체에 대한 방식이 엇갈리며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 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토요토미와 일본의 위협에도 다른 시각을 가지며 앞으로 파란을 예고했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머무는 사이 조선의 정국도 급격하게 돌아갔다. 특히, 선조 이후 후계구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선조는 중전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 했다. 후궁을 통해 임해군과 광해군, 신성군 3 아들을 두었다. 자신의 방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정통성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선조는 쉽게 세자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정실부인을 통한 아들을 원했다.







더 큰 이유는 후계자를 결정할 경우 그가 추진하는 왕권 강화책이 흐트러질 수 있음을 염려했다. 만약 세자가 정해지면 권력 구도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으로 나뉠 수 있고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선조가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자신들의 정책을 원할하게 추진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그들은 음밀히 세자 옹립을 논의했다. 서인의 중심이었던 정철과 윤두수는 왕자 중 능력과 인격이 출중했던 광해군을 옹립하기를 결정하고 반대파인 동인의 동의를 구하려 했다. 이들은 동인의 중심은 이산해, 류성용과의 회합을 추진해 극비리에 이를 논의하려 했다. 서인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영의정과 우의정에 있는 이산해, 류성용이 함께 이를 추진해야 명분이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인의 움직임은 분명 선조의 의사에는 반하는 일이었다. 이는 또 한 번의 정치적 격변 가능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이미 대신들의 의견의 끌려다니는 유약한 임금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유약함 뒤에 치밀한 수 싸움과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언제든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숙청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서인의 세자 책봉 움직임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새워진 서인의 권력기반을 흔드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정치적 이슈에 류성용은 어떤 대응을 할지,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로 인해 파생될 사건들이 정국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임진왜란 발발은 2년도 채 안남은 시점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줄기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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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의학 드라마 라이프가 9월 11일 16회를 끝으로 종영됐다. 애초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드라마 비밀의 숲, 작가의 작품이었고 조승우, 이동욱 등 호화 캐스팅으로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의 전개 과정에서 그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 결말 역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드라마는 상국 대학교 병원을 배경으로 응급의학과 전문의 예진우와 새롭게 사장으로 부임한 구승효의 대립 구조가 큰 축이었다. 예진우는 어릴적 사고로 아버지가 사망하고 동생이 하반신 불구가 된 기억이 끝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지만, 의사로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이런 배경에는 어릴 적 동생의 사고에 대한 자책감으로 힘들어하던 그를 따잡아준 상국대학교 정신과 전문의이자 병원장이 있었다. 

하지만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상국대학교 병원이 거대 재벌에 인수되고 병원에 전문 경영인이 부임하면서 병원은 상당한 변화가 직면하게 된다. 그저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예진우의 일상도 바뀌게 된다. 새롭게 병원의 총괄 사장으로 부임한 구승효를 수익성 회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고 병원의 비능률과 비효율을 개선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병원이 가져야 할 공공성의 훼손이 불가피했다. 당연히 내부의 반발이 상당했다. 그 중심에는 예진우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이는 병원장이 있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에진우 역시 거대 재벌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신임 사장 구승효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에게 병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를 행동하는 의사로 만들었다. 병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병원장은 부원장과의 술자리에서 돌연사했고 병원을 충격에 휩싸였다. 

원장의 죽음과 함께 병원은 더 강한 변화의 바람에 직면해야 했다. 구승효 사장은 수익 증대를 위한 조치를 더 강하게 진행했다. 병원 구성원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부원장은 비롯한 몇몇 구성원들의 자신의 위치를 더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위기를 이용하는 모습도 보이는 등 적전 분열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상국대 병원은 공공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예진우는 나름의 방법으로 구승효 사장을 흔들었다. 경영상 비밀 자료를 공개하면서 병원 구성원들이 병원을 인수한 재벌 그룹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했고 함께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정치권과 결탁하여 자행하려던 재벌 회장의 잘못된 행동에 반기를 들어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병원의 저항은 구승효 사장의 변화 움직임에 재동을 걸었다. 이는 그를 대리인으로 강력하게 영리 병원화를 추진하던 재벌 그룹 회장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 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을 가지고 있는 회장은 더 강하게 병원을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구승효 사장은 심적 동요를 일으킨다. 그는 이미 업무 과정에서 병원 내부의 잘못된 관행과 문제점을 알아내고 분노했다. 또한, 숫자로는 매길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인식하게 된다. 구승효는 병원의 수익성 개선과 가치 유지를 절충하는 나름의 방안을 구상했다. 하지만 이는 병원 구성원과 재벌 회장 모두에 압박을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구승효는 영리 병원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사회적 논란의 책임을 홀로 뒤집어쓰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병원에 대한 거대 재벌의 압박은 더 거세졌다. 병원 구성원들 역시 구승효의 본래 의도를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때가 늦었다. 이대로라면 그들의 지키고자 했던 병원의 가치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기서 기사회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새로운 병원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의 재벌 그룹과 정치인의 검은 거래 자료를 병원 측에서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병원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됐다. 이 자료를 구승효 사장이 가지고 있는 자료로 어떻게 보면 그가 상국대학교 병원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구승효 사장은 떠나는 자리에서 병원 구성원들에게 그들에게 더 강한 바람이 불 것이고 병원을 지키기 위해 더 큰 노력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말은 남긴다.

이렇게 상국대 병원은 그들의 가치를 지켜냈지만, 여전히 거대 재벌이 그 주인인 것은 바뀌지 않았다. 구승효를 대신할 새로운 사장은 재벌가의 패밀리로 어떻게 보면 상대하기 더 버거워졌다. 상국대학교 병원은 잠깐의 시간을 벌었지만, 험난한 파도는 언제든 몰아칠 수 있는 상황 속에 놓여있다. 재벌과의 대결에 중심에 섰던 예진우 역시 더 강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재벌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 재단이 운영하는 상국대학교 병원을 꿈꾸며 또 다른 싸움을 준비했다. 

한편 병원을 떠난 구승효는 그가 남긴 사업 계획 자료를 인정받아 다시 더 큰 계열사 사장으로 또 다른 기회를 잡았다.  냉철하기만 한 그의 마음에 감성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준 병원 의사와 연인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남겨두게 됐다. 예진우는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장애인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동생과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며 마음의 짊을 덜었다. 

이렇게 드라마는 시원한 한 방을 시청자들에게 선사하지 않은 채 잠재된 병원의 구조적 문제와 재벌 그룹의 횡포, 사회의 잘못된 관행이라는 어두운 면을 그대로 남겨둔 채 열린 결말로 마무리됐다. 두 주인공 구승효와 예진우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그들의 옥죄는 환경은 여전한 탓에 그 행복이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우리의 현실일수도 있지만, 드라마로서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이다.

드라마 라이프는 보통의 의학드라마와 달리 병원의 나쁜 단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그 이상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색다름을 남겼다. 하지만 사건의 해결 과정이 뭔가 개연성이 부족했고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러브라인과 주인공들의 가정사는 드라마의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가 됐다. 물론, 드라마 연기자들의 연기는 만족감을 주었지만, 개연성이 부족한 스토리 전개는 열연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존 의학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구성은 새로움으로 다가왔지만, 소문난 잔치에 뭔가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사진, 글 : 지후니 (youlsim74@gmail.com)

Posted by 지후니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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