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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롯데 팬들에게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된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유두열 전 코치가 별세했다. 그의 나이 60, 아직 충분히 일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혀왔던 암과의 싸움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유두열 전 코치는 암 투병 중에도 롯데의 홈경기 시구자로 나서는 등 강한 의지를 보이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말았다. 



선수로서 유두열의 통산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다. 1983년 롯데에 입단한 유두열은 1991년 은퇴했다. 통산 타율은 0.264였고 58홈런과 268타점을 기록했다. 한 팀의 레전드라 하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롯데 팬들에게 유두열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선수다.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7차전 승리를 결정짓는 극적 홈런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홈런은 극적이었고 짜릿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한 편의 드라마였다. 당시 롯데의 한국시리즈 상대 팀의 최강 전력의 삼성이었다. 삼성은 재일동포 투수 김일륭과 국가대표 출신 김시진이 선발 원투펀치를 구성했고, 이만수, 장효조가 이끄는 리그 최강의 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 후기 리그제도가 있었던 그 당시 삼성은 압도적 성적으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하고 후기리그는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당연해 보였다. 마치 난공불락의 골리앗 삼성과 힘없는 다윗 롯데의 대결이라 해도 되는 대결이었다. 








뻔한 승부로 여겨졌던 한국시리즈였지만, 이 대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사건이 후기리그 막판에 있었다. 한국시리즈 진출을 위한 후기리그 우승을 놓고 롯데와 지금의 두산인 OB가 경합 중이었다. 양 팀은 정규리그 마지막 시리즈까지 팽팽하게 맞섰다. 마침 롯데의 정규리그 마지막 상대는 삼성이었다. 



삼성은 롯데와의 경기에서 크게 앞서던 경기를 패했고 롯데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후기리그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삼성이 노골적인 져주기 플레이를 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는 점이었다. 사실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전력을 모두 가동하지 않았던 삼성이었지만, 당시 삼성은 잘 던지던 선발 투수를 돌연 교체하고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플라이가 안타가 되는 등 석연치 않은 장면을 연출했다. 게다가 삼성은 당시 이만수와 타율 부분 1위를 다투던 롯데 홍문종의 모든 타석을 고의 4구로 내보내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이만수는 타율, 타점, 홈런부분 1위를 차지하며 리그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빛이 바래고 말았다.  



사실상 삼성에 의해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된 롯데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대결이었지만, 전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롯데에는 최동원이라는 리그 최고 투수가 있었다. 롯데는 최동원에 절대 의존하는 마운드 운영 전략으로 맞섰다. 최동원은 삼성 김일융, 김시진 두 원투 펀치와 1 : 2의 대결을 해야했다.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는 경기에 에이스 김일융을 피해 등판시켰다.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는 경기 중 한 경기만 잡는다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다 여겼다. 하지만 삼성의 의도대로 한국시리즈는 전개되지 않았다.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 선발투수로 나서 롯데의 승리를 이끌었고 한국시리즈는 장기전이 됐다. 삼성은 김일륭이 등판하는 경기에 모두 승리하며 시리즈는 2승 2패가 됐다. 팽팽하던 한국시리즈는 잠실에서 펼쳐진 5차전에서 삼성이 승리하며 삼성쪽으로 급격히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삼성은 5차전에서 롯데 에이스 최동원에 승리했고 롯데는 필승 카드가 실패한 충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6차전에서 롯데는 최동원을 구원 등판시키는 초강수로 승리를 가져갔고 시리즈는 최종 7차전으로 이어졌다. 



한 경기로 챔피언이 가려지는 7차전, 롯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웠다. 문제는 이미 3경기 선발, 1경기 구원으로 경기에 나섰던 최동원이 지쳐있었다는 점이었다. 최동원은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투구했지만, 초반 삼성 타선은 최동원 공략에 성공하며 리그를 잡았다. 여기에 삼성 에이스 김일융이 호투하며 경기는 삼성의 우세로 굳어졌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염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롯데는 포기하지 않았다. 초반 실점에도 최동원은 투혼을 발휘하며 마운드를 지켰고 팀 타선은 경기 후반으로 가면서 삼성 에이스 김일융 공략에 성공하며 점수 차를 좁혀나갔다. 롯데는 3 : 4 한 점차로 삼성을 압박했고 8회 초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유두열이었다. 유두열은 한국시리즈에서 극심한 타격 부진을 겪고 있었다. 대타 기용도 가능성도 있었지만, 롯데 코칭스태프는 그를 그대로 타석에 내보냈다. 극도로 긴장된 순간, 유두열을 삼성 김일융의 공을 공략해 좌측 담장을 넘기는 3점 홈런으로 연결했다. 극적인 역전이었다. 7차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가 유두열의 홈런을 위한 예고편과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한 롯데는 최동원의 완투로 리드를 지키며 6 : 4로 승리했고 그해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유두열은 그 한 방으로 한국시리즈 MVP가 됐고 최동원은 정규리그 MVP의 영광을 차지했다. 물론,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 1패를 한 최동원이 최고의 수훈 선수이긴 했지만, 유두열의 한 방은 너무나 강렬했다. 그의 홈런이 있어 최동원의 전설이 완성된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 한국시리즈 7차전 당시 타격이 부진한 유두열이 타격코치의 실수로 5번 타순에 배치됐지만, 라인업 변경을 하지 않고 경기에 나섰다는 뒷이야기가 남겨질 정도로 그의 홈런을 오랜 기간 야구팬들의 기억속에 남았다. 



비록 그가 통산 성적에서 뚜렸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만큼 그의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3점 홈런은 가치는 롯데의 역사와 함께 하는 가치있는 홈런이었다. 유두열의 홈런과 그에 따른 롯데의 우승은 프로야구의 인기를 높이는 기폭제가 됐다. 그 다음해 삼성은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것을 원천 봉쇄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는 포스트시즌 제도 변경을 불러왔다. 이후 삼성은 지독한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시달렸다. 그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게 된 건 한 세기가 지나서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은 롯데에 영광의 기억이었지만, 삼성에는 최악의 징크스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롯데 역사에 남을 장면의 주인공이었던 유두열이었지만, 이후 선수생활과 지도자로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유두열은 부상이 겹치며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하지 못했고 이른 은퇴를 해야 했다. 이후 프로에서 지도자로서도 활약이 크지 않았다. 이후 유두열은 상당 기간 야인으로 머물렀다. 그가 다시 야구팬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건 그의 외로운 암 투병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이후 그에 대한 격려와 응원이 이어졌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병마는 그를 저 세상으로 데려갔다. 



그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 9월 1일, 롯데 선수들은 NC와의 대결에서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서 팀의 레전드를 추모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롯데는 올 시즌 절대적 열세를 보이는 NC에 2 : 4로 패하면서 승리로 레전드를 배웅하지 못했다. 이 패배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희망도 더 멀어졌다. 그의 별세 소식과 함께 한 롯데의 패배, 멀어진 포스트시즌, 여기에 롯데에 너무나 먼 이야기가 된 한국시리스 우승의 기억까지 그의 별세는 롯데 팬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넥센의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유재신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의 기억은 롯데 팬들뿐만 아니라 야구 팬들의 마음속에 우리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자리하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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