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프로야구에서 아마 야구의 유망주는 프로에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선수가 부족했고 야구의 수준도 높지 못했다. 신인들이 팀의 주축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야구의 수준을 올라갔고 신인이 곧바로 리그에서 성공하는 예도 크게 줄었다. 고졸 최대어, 대졸 최대어가 성공의 방정식이 될 수 없었다.
이젠 유망주들에게 기회의 문조차 잘 열리지 않는 프로야구다. 아마시절이 명성이 성공의 열쇠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야구 천재 소리를 듣던 많은 선수가 프로 입단 후 이렇다 할 활약 없이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그중에서 강혁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많은 야구팬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비운의 천재다. 강혁은 프로와 아마야구의 스카우트 분쟁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강혁은 아마시절 강혁은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강혁은 고교 시절부터 프로에서 당장 통할 수 있는 타자로 기대를 모았다. 좌타자라는 장점에 힘과 정교함을 겸비한 타격은 프로와 대학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사로잡을만 했다. 고교야구 무대는 그에게 너무나 좁았다. 강혁이 초고교급 선수로 활약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에 진학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타자의 경우 그 경향이 더 강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야구가 활성화되어 있었고 대학별로 팀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다. 좋은 선수를 확보하기 위한 프로팀과의 경쟁도 뜨거웠었다. 지금은 고졸 선수 대부분이 프로의 문을 우선 두드리는 것과 다른 풍경이었다. 이런 프로와 아마 간 선수영입 경쟁은 종종 스카우트 관련 분쟁으로 이어졌다. 강혁의 빼어난 실력은 역설적으로 분쟁의 중심에 그를 서게 했다.
고교 졸업 후 강혁의 진로는 연고팀 두산행이 유력했다. 두산은 좌타 거포의 가능성이 큰 강혁에 일찌감치 손을 내밀었고 계약까지 했다. 문제는 이후 발생했다. 강혁이 당시 한양대 야구부에 입학한다는 뉴스가 함께 터졌다. 강력은 졸지에 2중 계약을 한 선수가 되었다. 명백한 계약위반이었다. 이는 프로야구계 전체의 공분을 샀다. 강력은 이후 프로야구에서 영구제명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프로에 입단한 기회가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아직 사회에 대한 적응력도 갖추지 못한 어린 강혁에서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를 둘러싼 어른들의 이기심과 욕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큰 충격이었지만 강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대학야구에서 강혁은 리그를 평정하는 타자였다. 국가대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타격능력은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투수들마저 그를 두려워하게 했다.
당시 최고투수 임선동이 아마야구 경기에서 승리를 위해 만루 위기에서 강혁을 고의사구로 거른 일화는 그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예였다. 그만큼 강혁의 타자로서의 위치는 확고했다. 하지만 더 큰 무대로의 나아가는 길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강혁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입단해야 했다. 당시 프로진출 고려하고 현대에서 만든 실업팀 현대 피닉스는 엄청난 물량공세로 선수를 모았고 아마 최고 선수들로 가득했다. 그 안에서도 강혁은 돋보이는 타자 중 한 명이었다.
이런 계속된 활약은 그가 아마선수임에도 1998 방콕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으로 선발하게 하는 근거였다. 박찬호가 마운드의 중심을 이루고 프로선수들의 다수 포진된 대표팀에서도 강혁은 자신의 수비 포지션인 1루수를 지키며 금메달 획득에도 기여했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은 그의 프로야구 영구제명의 족쇄를 푸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먼 길을 돌았지만, 강혁은 1999년 두산에 신인으로 당당하게 입단할 수 있었다. 프로와 아마야구 간 스카우트 파동으로 꺾었던 날개를 활짝 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를 영입한 두산 역시 6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를 품을 수 있었다. 두산은 강혁이 젊은 중심타자로서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이런 기대와 다르게 아마야구 최고 타자였던 강혁에서 프로 무대는 다른 세상이었다.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아마야구 선수들의 나무배트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지만. 강혁은 아마시절 위력을 나무배트로는 재현하지 못했다. 1999시즌 적응기를 거친 강혁은 2000시즌 0.266의 타율을 기록하며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두산이 원하는 강타자의 성적은 아니었다.
2001시즌을 앞두고 강혁은 전격적으로 SK로 트레이드되었다. SK는 팀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중심 타자가 필요했다. 두산은 거액의 계약금을 투자한 강혁을 미련없이 현금 트레이드했다. 영입 실패를 인정한 것과 같았다. 강혁은 SK에서 꾸준히 기회를 잡았지만, 예전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강혁은 더 이상 천재가 아니었다.
이런 강혁에게 2004년은 또 다른 시련이 시기였다. 그 해 프로야구를 강타한 병역비리 사건에 강혁이 포함되었다. 그는 19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면제 요건을 충족했지만, 그 이전에 병역면제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병역브로커와의 검은 거래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혁은 법적 처벌과 병역의무 이행으로 긴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2007시즌 SK로 복귀했지만, 7타수 무안타의 성적을 남기고 쓸쓸히 선수생활을 접고 말았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선수생활을 한 강혁은 그렇게 프로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최고 선수가 될 자질을 보였던 강혁이었지만, 그를 흔드는 외적인 힘에 꺽인 날개를 끝내 펼쳐보지 못했다. 강혁은 비운의 선수로 팬들에 기억될 뿐이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강혁의 인생은 조금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현재 강혁은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지도자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영광과 좌절을 모두 안겨준 야구를 그는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많은 팬들은 만약 강혁이 프로와 아마 계약파동에 휩싸이지 않고 프로에 바로 입단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강혁이 프로에서 체계적인 육성과정을 밟았다면 리그를 뒤흔들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다. 강혁은 이제 프로야구 기록에서만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 강혁의 비운은 선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욕심이 선수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 선수 스카우트 질서 확립 필요성을 일깨우는 예였다. 다시는 이런 외적 요인으로 재능있는 선수가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는 야구계 전체에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스포츠 > 야구 그리고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 프로야구] 영원한 작별 고한 롯데 가을야구의 영웅, 유두열 (2) | 2016.09.02 |
---|---|
인간의 한계 뛰어넘었던 투수 장명부, 짧지만 강렬했던 4년 (8) | 2013.02.22 |
롯데 자이언츠, 근성과 투혼의 상징 박정태 (4) | 2013.02.20 |
롯데의 마지막 도루왕 전준호를 추억하며 (5) | 2013.02.09 |
황제가 되지 못했던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 (레전드를 추억하며 1) (5) | 2013.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