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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인 올림픽은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꿈의 무대다. 4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는 희소성에 큰 상징성은 메달에 대한 가치를 크게 높여주기 때문이다. 메달 하나하가 더 값지지만, 올림픽에서 마라톤은 가장 주목받는 메달 종목이다. 올림픽 폐막 직전에 경기가 끝나고 메달이 수여된다.

폐회식 행사의 일부분이 마라톤 메달 시상식이다. 그만큼 올림픽에서 마라톤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마라톤에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고 마라톤을 전세계인에게 각인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마라톤의 역사는 현대 올림픽의 역사와 함께 한다. 1회 대회부터 마라톤은 정식 종목이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한 현대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4년마다 열렸던 신들에 대한 제전 형식의 올림피아 제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리스는 예로부터 수많은 도시들이 모인 연합국가의 형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각 도시간 유대를 강화하고 갈등을 제외하며 화합할 수 있는 장이 필요했다. 이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모여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스포츠 경기를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역 체육 대회의 확장판이라 설명할 수 있다. 
 
그 곳에서의 경기는 경쟁이기도 했지만, 육체와 정신의 단련, 그 속에서 화합과 그리스의 통일을 이루려 하는게 큰 목적이었다. 도시간 다툼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는 전쟁도 멈추고 모두 함께 했다. 올림피아 제전은 단결과 화합이전에 평화의 장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은 수 백년 세월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393년을 끝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진 올림픽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올림픽 부활을 주도한 인물은 프랑스의 교육자 쿠베르텡이다. 그는 프랑스 청년들의 교육에서 스포츠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쿠베르텡은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에서 스포츠 제전을 통해 청년들의 심신을 단련하고 화합을 도모했던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어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스포츠 제전, 올림픽의 부활을 추진했다.
 
그의 노력은 유럽에서 공감대를 형성했고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현재 IOC는 올림픽과 스포츠와 관련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 이후 IOC는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 아테네를 1회 올림픽의 개최지로 결정했고 현대 올림픽의 역사가 시작됐다.
 
마라톤은 올림픽에서 각별한 종목이었다. 마라톤은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던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중요한 전투인 마라톤 전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기원전 4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도시국가 연합이었던 그리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 페르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양국은 지역의 패권을 놓고 전쟁에 돌입했다. 우월한 국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페르시아가 주로 그리스를 침공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대군이 아테네 인근으로 진격했다.
 
아테네가 중심이 된 그리스 연합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에 맞섰다. 모두가 크게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리스 군은 앞선 전략과 용맹함으로 페르시아군에 크게 승리하며 그들의 침공을 물리쳤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한 병사가 달려왔고 승전 소식을 전했다. 그 병사는 쉬지 않고 먼 길을 달렸고 승전 소식을 전하고 쓰러져 사망했다. 이 이야기는 마라톤 전쟁 승전의 역사와 함께 후대에 계속 전해졌고 마라톤 경기를 만드는데 영감을 주게 된다.

 

 

 
1896년 1회 올림픽 열리는 시점에 프랑스 대학교수였던 미셀 브레알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마라톤 전투, 병사의 이야기를 엮어 스토리텔링을 했고 마라톤을 하나의 종목으로 제안했다. 쿠베르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올림픽 종목으로 그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서 깊은 마라톤이지만, 그 기원과 관련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마라톤 전쟁의 승전 소식을 전하려 달렸다는 병사는 사실 인근 스파르타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소식을 전달하는 연락병이었고 그가 향한 곳은 스파르타였다. 실제 그는 200킬로 넘는 거리를 쉼없이 달려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전투 시점이 그들 전통에 따라 군사를 출병할 수 있는 시기였다. 연락병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아네테는 그런 어려움에도 그들의 힘으로 페르시아군에 크게 이겼고 그리스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연락병이 전쟁중에 전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마라톤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는 영광스러운 전쟁 승리의 역사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각색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다소 맥이 빠질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당시 그리스 군의 연락병은 산과 강을 건너고 평원을 달리며 중요한 정보와 소식을 전달한 건 사실이었다. 그는 많은 이들의 염원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마음에 품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달린 거리는 보통 사람이 달리기 힘든 거리였다. 그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 병사의 모습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현대 마라톤 선수들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 기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다르다 해도 더 빨리 달리려는 마음과 절실함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라톤 경기가 스포츠 종목으로 자리를 잡은 건 1908년 제4회 런던 올림픽이었다. 그 올림픽에서 지금의 마라톤 거리인 42.195km가 처음 적용됐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대회에서 마라톤 경기 거리는 약 41.843km 정도였다. 마라톤 초창기 거리는 각 대회마다 차이가 있었고 확실한 규정이 없었다. 런던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회를 앞두고 마라톤 경기를 보려는 왕족 등 VIP의 별도 관람석을 마련하면서 결승점으로 향하는 코스가 일부 변경됐고 애초 코스 설계보다 거리가 조금 늘어 42.195km이 됐다.
 
우연한 계기로 정해진 코스 거리는 이후 그대로 굳어져 현대에서 적용되고 있다. 그 이면에는 190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에서 스포츠사에 남을 큰 사건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 도란도 피에트리는 크게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지만, 쟁쟁한 우승 후보를 따돌리며 1위로 달렸다. 그는 여유있게 앞서며 골인 지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골인 지점을 300여미터 남겨둔 상황에서 피에트리는 크게 탈진해 방향 감각을 잃었고 급기야 쓰러지고 말았다.

 


 
피에트리는 온 힘을 다해 일어서 달렸지만,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극한의 상황은 10여분긴 이어졌다. 그 사이 2위 선수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보다 못한 의료진과 대회 관계자들이 쓰러진 피에트리를 일으키고 부축했고 피에트리는 1위로 골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중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규정상 그는 포기하지 않는 스포츠 정신을 보여주었음에도 실격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그 유망한 ‘도란도의 비극’ 사건이었다.
 
비록,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그의 스포츠 정신에 감동한 영국 왕비가 특별히 그를 위해 은트로피를 하사했고 영국 국왕도 별도 선물을 전달하며 그를 격려했다. 피에트리는 비운의 선수였지만, 금세 그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지고 유명인이 됐다. 이후 그는 마라토너로 성공했고 부와 명예도 얻었다.
 
피에트리가 주인공인 ‘도란도의 비극’은 마라톤이라는 종목의 극적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마라톤 기원과 관련한 마라톤 전투 이야기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계에 도전했던 피에트리의 사연은 마라톤의 정신을 상징했다. 

이는 마라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사라지게 하고 마라톤이 올림픽의 꽃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마라톤은 올림픽 폐막식 직전에 수상자 시상을 하는 등 가장 주목받은 종목이 됐다. 이는 그 어떤 메달보다 마라톤의 메달 가치는 더 크게 했다. 먼 옛날 험준한 평원을 달렸던 고대 그리스 병사의 발걸음은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종목으로 마라톤을 이끌었다.

마라톤과 관련해 우리나라 역시 영광의 역사가 있었다. 일제 강점이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였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해방된 조국에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수상 장면을 보고 싶었던 손기정의 소원을 이뤄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황영조의 금메달은 온 국민에 큰 감동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후 우리 마라톤은 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말았다. 특히, 남자 마라톤은 이미 은퇴한 이봉주가 2000년 세운 2시간 7분 20초가 아직도 한국 남자 마라톤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봉주 이후 한국 마라톤은 퇴보했다 할 정도로 국제 대회에서 저조한 성적의 연속이다. 그나마 케냐에서 귀화한 선수가 남자 마라톤 국가대표로서 나라를 대표하며 국제 경기에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마라톤과 달리 세계 마라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케냐 등 아프리카 선수들이 주도하는 마라톤의 스피드 경쟁은 엄청난 기록단축으로 이어졌다. 마라톤 최강국인 케냐 선수들은 그들 특유의 고지대 훈련을 통해 운동 능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들 훈련 방식은 이제 전세계 마라톤 선수들이 따르고 있다. 케냐는 각종 국제대회를 석권하며 마라톤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세계 신기록은 케냐 선수 킵초게가 가진 2시간 1분 39초다. 그는 이벤트성의 비공식 대회에서 마의 2시간 벽을 깨기도 했다. 지금의 마라톤 발전 속도라면 조만간 공식 대회에서 2시간 벽을 깰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이렇게 기원전 하고도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기원한 마라톤은 시대의 변화 속도에 따라 함께 발전했다. 치열한 전장에서 열락병으로 뛰었던 병사는 이제 마라톤으로 큰 부와 명예도 얻을 수 있는 선수로 변화했다. 마라톤 대회는 중요한 스포츠 이벤트로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달리는 이들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마라톤을 보는 묘미를 더할 수 있다.
 
선수가 아니라 해도 주변 산책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순간 마라톤 선수가 될 수 있다. 그런 달리기가 누적되어 실력이 된다면 아마추어들을 위한 마라톤 대회에서 갈고 닦았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보는 것도 일상을 의미 있게 채우는 일이 될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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