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통산 327홈런, 3시즌 연속 40홈런 이상, 5번의 홈런왕 타이틀까지 KBO 리그 최고 거포 중 한 명인 박병호가 현역 선수 마지막 커리어를 함께 할 팀은 KT 위즈로 결정됐다. 올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박병호는 KT와 3연간 총액 30억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박병호는 2011 시즌부터 함께 한 키움 히어로즈를 떠나게 됐다. 키움은 또다시 FA 시장에서 주력 선수를 떠나보내게 됐다.
박병호와 키움의 이별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하지만 박병호가 히어로즈 야구단이 강팀으로 발돋움한 역사를 함께 한 선수였고 그 어느 선수보다 상징성이 큰 선수라는 점에서 히어로즈 팬들은 일말의 가능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박병호는 2011 시즌 중 LG에서 당시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 됐다. 박병호는 LG가 기대되는 거포 유망주였지만, 좀처럼 잠재력을 폭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히어로즈는 박병호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히어로즈는 크게 이운 트레이드라는 비판에도 그를 영입해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했다. LG 시절 그날 그날의 결과에 따라 경기 출전이 제한되고 1군과 2군을 오가는 상황 속에 주눅 들어 있었던 박병호는 히어로즈의 강한 신뢰 속에 긴 세월 봉인됐던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11 시즌 프로 데뷔 처음으로 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박병호는 2012 시즌 3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홈런왕에 올랐다. 긴 유망주 시절을 끝내고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 박병호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후 박병호의 홈런 타자의 여정은 거침이 없었다. 당시는 대표적인 타자 친화 구장인 목동 구장의 이점과 되찾은 자신감, 타격 기술의 향상까지 이루어지며 박병호는 완성형 타자로 거듭났다.
박병호가 중심이 되고 서건창, 강정호 등이 중심 타선을 구성한 히어로즈의 타선은 리그 최강이었다. 강력한 타선의 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마운드 운영을 더해 창단 이후 재정적 어려움 속에 하위권을 전전하던 모습에서 벗어났다. 히어로즈는 2014 시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강팀의 반열에 올랐다. 이런 히어로즈의 약진은 대기업이 주도하던 KBO 리그의 판도는 흔들었다.
해체 위기의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이후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히어로즈 구단은 기존 팀들을 위협하며 야구 전문 기업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히어로즈는 구단과 관련한 각종 문제와 재정적인 문제를 극복하며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오르는 팀이 됐다. 이런 히어로즈의 구단의 발전과 만년 유망주에게 리그 최고 타자로 발전한 박병호는 묘하게 닮은 꼴이었고 박병호는 히어로즈 구단 역사와 함께 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이는 박병호가 프랜차이즈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는 프랜차이즈 스타 그 이상의 존재로 만들었다.
또한, 박병호는 2015 시즌 후 포스팅 절차를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며 막대한 포스팅 비용을 구단에 안겨주지고 했다. 그가 남긴 150억 정도의 포스팅 금액은 히어로즈 구단에는 너무나 소중한 금액이었다. 이는 박병호가 메이저리그 도전을 멈추고 히어로즈로 복귀하면서 연간 15억원의 연봉으로 그를 예우하는 근거이기도 있다. 이런 박병호와 히어로즈 구단의 끈끈한 관계는 너무가 각별했다. 그동안 FA 시장에서 대부분의 스타 선수를 떠나보낸 히어로즈였지만, 박병호만큼은 지킬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FA 시장의 여건도 박병호가 타 팀 이적을 하는데 제한 사항이 많았다. 우선, 박병호의 최근 시즌 기량 저하가 눈에 띄었다. 에이징 커브의 조짐이 분명했다. 박병호는 1986년생으로 30대 후반의 나이다. 체력적인 부담이 커지는 시점이고 운동능력도 저하될 나이다. 실제 성적도 2019시즌 43개의 홈런을 기점으로 그의 장점인 홈런과 타점 생산력이 크게 감소했다. 2020시즌 박병호는 21홈런, 2021 시즌에는 20홈런에 머물렀다. 그에 비례해 타점도 급감했다. 거포의 중요한 덕목인 홈런과 타점의 감소는 거포로서의 이미지를 퇴색하게 했다. 여기에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 출전 수도 줄어들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확도의 문제가 한층 커졌다는 점이다. 박병호는 거포지만, 3할 이상의 타율과 안타 생산력도 갖춘 타자였다. 이를 바탕으로 4할대 출루율까지 기록하는 다재다능한 타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2연간 박병호는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하락했다. 공을 제대로 맞히지 못하니 각종 타격 지표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거포에게는 필연적인 삼진 비율도 지나치게 높아졌다.
2020 시즌 박병호는 69개의 안타를 때려내면서 114개의 삼진을 기록했고 올 시즌에는 93개의 안타를 때려내면서 141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두 시즌 모두 2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너무 컸다. 한 마디로 공격 생산력이 효율성이 떨어졌다. 공갈포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커리어는 화려하지만, 전성기를 지난 30대 후반 나이의 선수, 뚜렷한 기량 저하가 보이는 박병호는 보상 선수가 없는 C 등급이라는 이점이 있음에도 선뜻 그를 영입하기가 어려운 선수였다. 15억원에 이르는 연봉은 보상금액을 22억 5천만원에 이르게 했다. 분명 영입을 결정하기에 부담이 되는 조건이었다. 키움은 이런 제한 사항으로 박병호가 타 팀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외부 FA 선수 영입전에서 일찌감치 손을 뗀 키움은 외국인 선수 영입 등 다른 시급한 사안에 집중하며 박병호와의 FA 협상을 후 순위로 두는 모습을 보였다.
거포의 위용을 잃었지만, 팀을 대표하는 간판선수에 대해 지나치게 무시한 처사였다. 키움의 방심일 수도 있고 다른 의미에서는 냉정한 처사였다. 박병호로서는 섭섭함도 가질 수 있었지만, 최근 2년간의 성적 등을 고려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역대 가장 뜨거운 FA 시장의 분위기가 박병호에 대한 평가를 달라지게 했다. 100억원 대 계약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FA 선수들의 가치도 덩달아 폭등했다. 박병호가 연봉에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있었지만, 20억원이 넘는 보상 금액도 투자할만하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박병호는 지난 2시즌 동안 정확도가 크게 떨어지는 등 내림세가 분명했지만, 20홈런이 가능한 타자였다.
키움의 홈구장이 타자 친화 구장인 고척돔임을 고려하면 그가 고척돔을 벗어나 타자 친화 구장으로 옮길 경우 한층 부담을 덜고 홈런 개수를 늘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동안 누적된 경험과 리더십 등은 팀에 무형의 힘이 될 수도 있었다. 단기간의 성적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팀이라면 그의 영입을 고려할만했다.
박병호에 달라진 분위기에 키움은 적절한 대응을 해야 했지만,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협상을 지속하고 있다고 했지만, 1월에 본격 협상을 한다는 식의 언론 보도가 나오는 등 양측 입장의 잘 조율되지 않는 듯 보였다. 이 사이 KT가 박병호와 연결됐다. 2021 시즌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팀 KT는 디팬딩 챔피언으로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한 전력 보강이 필요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동안 FA 시장에서 오버페이에 부정적이었던 KT는 과열된 시장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내부 FA 황재균, 장성우, 허도환의 잔류에 주력했다.
KT는 장성우에 이어 황재균과 FA 계약을 체결했다. 큰 내부 현안을 해결한 KT는 시장에 남아있는 선수들에 눈을 돌렸다. KT는 최근에도 박병호, 정훈에 관심을 보인다는 보도가 있었다. 박병호는 내림세에 있지만, 여전히 20홈런 이상이 가능하다는 장점에 화려한 커리어가 장점이었다.
정훈 역시 30대 후반이지만, 뒤늦은 나이에 타격에 눈을 뜨면서 최근 2년간 타격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경신했다. 1루와 외야가 모두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정훈 역시 박병호가 같은 C 등급 선수지만, 1억원의 연봉으로 1억 5천만원의 보상금만 지불하면 영입할 수 있는 뛰어난 가성비가 있었다. 효율적인 투자를 했던 KT라면 정훈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박병호를 향하고 있었다.
창단 첫 우승에 성공한 KT로서는 리그 역사에 남을 선수 박병호를 영입해 라인업에 무게감을 더하고 구단 역사를 살찌울 수도 있었다. 올 시즌 후 은퇴한 베테랑 유한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에도 박병호는 안성맞춤의 선수였다. KT와 두 번의 FA 계약을 했던 유한준은 2년 20억원에 두 번째 FA 계약을 체결했다. 유한준은 2020 시즌 11홈런 64타점, 2021 시즌에는 5홈런 42타점을 기록했다. 기록은 중심 타자로서 부족함이 있었지만, 팀의 최고참 선수로 선수들의 리더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은퇴 시즌에 우승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마침 유한준은 박병호와 함께 히어로즈에서 중심 타자로 활약한 이력이 있다.
KT는 박병호가 유한준 정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유한준 이상의 홈런과 타점 생산력을 지난 베테랑을 영입해 타선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박병호는 타격과 함께 1루수로서 수준급 수비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박병호는 주전 1루수 강백호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지명타자로 거의 고정됐던 유한준과 달리 수비에서 적는 나설 수 있어 지명타자 자리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장점도 있다. 이에 KT는 과열된 FA 시장에서 22억 5천만원의 보상금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또 한 번의 우승을 기대하는 KT로서는 전력 약화를 막아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박병호 역시 정든 키움을 떠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의 선수 커리어에서 채우지 못한 우승에 근접한 팀이 KT고 키움의 미온적인 태도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인이 됐다. 박병호는 기존 연봉에서 삭감된 금액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인정했다.
박병호는 3년의 계약 기간을 보장해 준 KT의 손을 잡았다. 박병호는 잔류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보이지만, 키움은 KT 이상의 제안을 하지 않았다. 박병호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박병호는 손 편지를 팬들에게 남기며 히어로즈와 작별을 고했다. 박병호는 20억원이 넘는 보상금액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히어로즈에 큰 선물을 했다.
박병호만큼은 지킬 줄 알았던 키움 팬들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의 KT 행은 팀의 역사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키움이 올 시즌 박병호의 연봉에 크게 못 미치는 연평균 10억원의 금액도 제시하지 않았고 마치 타 구단에서 그를 영입하길 기다린 듯한 행태를 보였다는 건 큰 실망감을 가질만하다. 어쩌면 키움은 기량의 내림세가 분명한 박병호에게 시장 분위기에 맞는 제안을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협상 시기를 늦추면서 그와의 이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미 팀 간판선수가 이정후 등 젊은 선수들이 대신하는 상황에서 박병호와 연결된 끈은 더 헐거워지고 말았다. 키움은 그 끈을 다시 단단히 묶지 않았다.
박병호는 다를 줄 알았지만, 박병호 역시 이전에 키움을 떠난 키움의 스타 선수들도 다르지 않았다. 키움은 팀의 레전드나 다름없는 박병호에게도 냉정한 기준을 적용했다. 이를 통해 키움은 막대한 보상금 수익을 거뒀지만, 너무나 특별한 선수였던 그와의 이별은 씁쓸함을 남겼다. 그의 자리는 다른 젊은 선수가 대신할 수 있지만, 구단의 역사의 단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떠나는 구단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는 건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다. 현재 키움에 남아있는 선수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질지는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냉혹한 프로의 현실 속에서 박병호는 그의 야구 인생을 새롭게 하고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히어로즈의 영웅으로 커리어를 끝낼 기회를 잃고 말았다. 프랜차이즈 스타의 은퇴를 보고 싶었던 그 주인공이 박병호이기를 기대했던 키움 팬들의 기대도 사라졌다. 박병호는 이제 더이상 영웅군단의 일원이 아니다. 박병호가 지금까지 키움에서 쌓아온 이력과 그와 함게 했던 구단의 성과, 그 역사의 가치가 과연 보상금 22억 5천만원에 미치지 못한 것인지 그의 KT 행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교차하게 한다.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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