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시장에서 유일한 미계약자인 정훈이 원 소속팀 롯데와 계약했다. 정훈은 롯데와 3년간 총액 18억원에 합의했다. 정훈은 그의 프로야구 선수 커리어에서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FA 자격을 얻어 다년 계약에 성공했다. 1987년생 36살인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프로에 데뷔했던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 롯데는 정훈을 잔류시키면서 또 다른 FA 선수였던 프랜차이즈 스타 손아섭의 NC 행에 따른 충격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정훈은 이번 FA 시장에서 뛰어난 가성비의 선수로 관심을 받았다. 실제 복수의 팀이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정훈은 C 등급 FA로 보상 선수가 없고 연봉이 1억원으로 보상금 1억 5천만 투자하면 그를 영입할 수 있었다. 정훈은 지난 2년간 영입의 필요성을 느낄 만큼의 성적과 장점도 있었다.
정훈은 2020 시즌 0.295의 타율에 11홈런 58타점, 0.382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2021 시즌에는 0.292의 타율에 14홈런 79타점, 0.380의 출루율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이전 그의 커리어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반전의 기록이었다. 정훈은 2020 시즌 활약으로 그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을 당한 2021 시즌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하면서 그의 활약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런 성적에 정훈은 주 포지션인 1루수와 중견수 등 외야 수비도 가능한 리그에서 보기 드문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팀 선수 운영에 유연성을 더할 수 있는 선수다. 정훈은 1루수로는 수준급 수비 능력이 있고 외야수로서 평균 이상의 수비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훈은 큰 기대를 가지고 FA 시장에 나섰다. FA 등급제가 그에게는 큰 기회가 되는 것으로 보였다. 마침 FA 시장의 분위기도 정훈에게 긍정적이었다. 얼마간의 눈치 싸움 끝에 대형 계약이 연달에 나왔다. 코로나 상황과 최근 프로야구의 인기 하락 등 부정적 요인들이 FA 시장의 냉각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시장가 이상으로 계약하며 활황장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그렇게 하나 둘 FA 선수들이 팀을 찾았다. 시장의 부정적 평가를 받았던 선수도 복수의 경쟁구도가 형성되면 시장가가 상승했다. 에이징 커브가 확연했던 키움의 거포 박병호도 키움 외에 타 팀의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KT와 3년간 30억원의 계약을 따냈다. KT는 은퇴한 베테랑 유한준의 대체자가 필요했고 여전히 20홈런 이상을 때려낼 수 있는 박병호의 장점에 주목했다.
정훈도 자신의 경쟁력이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FA 시장에서 정훈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에 대한 타 팀의 관심도 급격히 줄었다. 정훈의 선택지는 원 소속팀 롯데로 좁혀졌다. 정훈은 롯데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고민해야 했다. 정훈은 시장의 상황을 주시했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간 최대 18억원의 금액은 그의 이전까지 연봉을 고려하면 적다고 할 수 없지만, FA 시장의 상황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남는 금액이라 할 수 있다.
정훈의 FA 계약을 두고 대부분 선수들에 따라붙은 오버페이 논란은커녕 정훈이 아쉬움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크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훈의 올 시즌 성적은 4년간 64억원에 NC와 계약한 손아섭과 비교해 홈런과 타점에서 크게 앞서 있고 4년간 60억원에 KT와 계약한 황재균보다도 나은 성적이었다. 손아섭과 황재균이 이번이 두 번째 FA 계약으로 두 번의 계약으로 150억원 대의 금액을 손에 놓었다.
물론, 손아섭과 황재균의 누적된 커리어를 고려하면 단순 비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손아섭과 황재균이 정훈과 나이에서 큰 차이가 없고 향후 에이징 커브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정훈의 계약은 혜자 계약이라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FA 시장은 지난 2시즌 정훈의 성적도 중요했지만, 그의 누적된 성적과 나이를 고려한 앞으로 활약 정도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2시즌의 성적만으로는 표본이 부족했다. 또한, 그의 주 포지션이 1루수인 만큼 시즌 20개 이상의 홈론 생산력이 필요했지만, 정훈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정훈의 성적인 타자 친화 구장인 롯데 홈구장을 배경으로 나온 결과물이라는 점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즉, 정훈의 가성비는 뛰어나지만, 그가 리그 판도를 바꿀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타자는 아니고 1루 주전으로 활용하기는 부족하다는 점은 그에 대한 가치 평가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여기에 그에게 관심을 가질만했던 팀들이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정훈의 상황의 더 불리해졌다. 야수 보강이 필요한 한화는 일찌감치 내부 FA 최재훈의 계약 후 외부 FA 선수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가성비에 관심이 큰 두산은 정훈의 주 포지션에 양석환이라는 확고한 주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1루수 자원에 관심이 있을만했던, SSG는 기전 선수들의 다년 계약에 상당한 자금을 투입했다. LG 역시 관심을 가질만했지만, 외부 FA 박해민과 내부 FA 김현수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 지난 시즌 가능성을 보인 다수의 유망주들의 존재도 LG의 또 다른 FA 영입을 망설이게 했다. LG는 당장 급했던 포수 자원 확보를 위해 또 다른 C 등급 FA 선수인 베테랑 포수 허도환을 영입했다.
베테랑 타자 영입이 필요했던 KT가 정훈에 관심을 보일 수 있었지만, KT는 전 홈런왕 박병호를 선택했다. 2021 시즌 챔피언 KT는 2년 연속 우승을 위해 라인업에 무게감을 더할 필요가 있었다. 박병호가 에이징 커브 단계에 있지만, 그의 커리어가 팀에 주는 긍정 효과와 함께 정훈보다 우위에 있는 홈런 생산력이 KT에 더 큰 관심을 받았다. KT에도 정훈의 자리는 없었다.
결국, 정훈에게 경쟁 구도는 형성되지 않았고 결과는 앞서 언급한 대로였다. 정훈은 역대 가장 뜨거웠던 FA 시장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거의 유일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 그에 대한 긍정 요소들은 적용되지 않았고 부정적 요소들만 그를 감싸고 말았다. 이에 대해 팬들이 더 안타까움을 표시할 정도다.
이유가 있다. 정훈은 2006 시즌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인 현대 유니콘스의 육성 선수로 입단했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방출되는 아픔이 있었다. 그렇게 그의 프로야구 선수 커리어가 끝날 수 있었다. 정훈은 현역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했고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며 선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러던 정훈에게 롯데는 새로운 야구 인생을 열게 해준 팀이었다.
롯데 입단 후 퓨처스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낸 정훈은 2010 시즌부터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고 출전 경기 수를 늘렸다. 2013 시즌부터 주전 2루수로 자리한 정훈은 2015 시즌 풀타임 2루수로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며 조성환 이후 롯데의 2루수 계보를 잇는 선수가 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2015 시즌을 기점으로 정훈은 공. 수에서 기량이 저하됐다. 수비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고 공격력을 갖춘 2루수라는 장점도 타격 부진이 이어지면 퇴색했다. 어느새 정훈은 주전 자리를 내주고 백업 역할을 해야 했다. 롯데가 그의 주 포지션인 2루수 자리에 외국인 선수는 기용하면서 정훈의 팀 내 입지는 더 흔들렸다. 보통의 경우라면 현역 선수 연장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벼랑 끝에서 정훈은 반전을 이뤄냈다.
정훈은 이후 주 포지션은 2루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정훈은 내야와 외야를 겸하는 유틸리티 선수로 변신했다. 생존을 위한 큰 결정이었다. 정훈은 다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선수로 스스로 존재 이유를 만들었다. 정훈은 백업이었지만, 1군에서 필요한 선수로 현역 선수의 이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훈은 생존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더 업그레이드했다. 정훈은 약점이라 여겨지던 타격폼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감아 돌리는 듯한 스윙은 특정 코스 공략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콘택트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에 그의 스윙은 체구에 비해 장타 생산력을 더 할 수 있는 자신만의 타격법이 됐다. 이렇게 정훈은 30대 나이에 자신의 기량을 더 발전시키며 주전으로 우뚝 섰다.
정훈은 지난 2시즌 동안 팀 중심 타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대호가 자리를 내준 4번 타자로 가장 많이 나서며 타격의 구심점이 됐다. 득점권에서 누구보다 높은 집중력을 보여줬고 뛰어난 콘택트 능력으로 투수들과 끈질긴 승부를 신개념 중심 타자가 됐다. 정훈은 수비에서도 뛰어난 1루수 수비로 롯데 내야진 안정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팀 베테랑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팀에 힘이 되는 선수였다. 정훈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뒤늦은 나이에 빛나는 커리어를 만든 그의 스토리는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정훈에 대해서 롯데 팬들이 각별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FA 시장에서 맞이한 정훈의 현실은 차갑기만 했다. 그는 시장의 긍정 흐름에 편승하지 못했다. 합리적 계약을 추구하는 원 소속팀 롯데는 정훈에게 계획 이상의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다. 시장의 냉각된 분위기를 확실히 느낀 정훈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정훈은 시원 섭섭한 마음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대신 롯데는 대부분을 보장금액으로 채우면서 정훈의 팀 내 비중을 인정했다. 정훈 역시 앞으로 3년간은 다른 변수에 대한 걱정 없이 경기에 임할 수 있게 됐다.
길었던 협상이었다. 그 결과는 만족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쩌면 그는 불운의 FA 선수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금액이 아닌 팬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롯데 팬들에게 정훈은 매우 가치 있는 선수다. 그의 가치는 정훈의 포기하지 않은 노력의 결과다. 그는 내년 시즌 한층 더 젊어질 롯데 라인업에서 전준우, 이대호와 함께 베테랑의 힘을 더해줄 선수다. 이제 남은 건 정훈이 그의 가치를 성적으로 입증하는 일이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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