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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프로 스포츠인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지극히 미국적인 스포츠다. 야구의 기원은 여러 설이 혼재하지만, 현대 야구의 규칙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메이저리그는 미국의 현대사와 함께 한 스포츠로 19세기 후반 프로리그를 창설됐고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국민 스포츠로 성장을 거듭했다. 지금은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여전히 미국에서 미식축구, 프로 농구, 프로 아이스하키와 함께 4대 프로 스포츠로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
 
메이저리그는 그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고 거대한 역사적 서사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긍정적이었던 부정적이었던 메이저리그의 역사는 세계 야구 역사 그 자체였다. 현재 야구를 즐기는 나라들은 모두 미국 메이저리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오랜 역사에서 나오는 권위를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메이저리그 역사가 특별한 건 특별했던 선수들의 서사가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초창기 그 인기를 이끌었던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를 시작으로 극심한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로 활약했던 재키 로빈슨의 이야기는 단순한 스포츠 선수 이전에 미국 현대사의 발전과 그 맥을 함께 한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중남미 출신 선수 

 
그리고 또 한 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있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중남미 출신의 선수로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인종차별을 극복한 매우 상징적인 선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존경받는 건 선수이기 이전에 헌신적인 자선활동으로 메이저리그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데 있다. 그는 38살의 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삶의 족적은 남달랐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34년, 지금은 전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여행지인 카리브해 북동쪽에 자리한 미국령인 섬나라 푸에르토리코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카리브해는 곳곳에 호화로운 리조트가 있고 멋진 바다 풍경과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 여행자들의 천국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예전부터 넉넉하지 않았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집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는 가난한 노동자였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고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역시 그 안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큰 재능을 보였다. 그는 육상 선수에서 야구에 매력을 느끼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고 시장 확대에 열을 올리던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주목을 받았다. 1947년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성공 이후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폭넓게 우수한 기량의 선수를 찾았고 그들의 발길은 미국과 가까운 중남미 국가로도 향했다. 

 

 




인종차별의 벽 넘어야 했던 메이저리그 도전기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재키 로빈슨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던 지금의 LA 다저스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1954년, 그의 나이 19살 때 일이었다. 그는 당시 LA 다저스 보다 몇 배 더 많은 계약금을 제시한 타 구단의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LA 다저스와 계약하며 돈보다 신의를 지키며 남다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부푼 기대 속에 진출한 메이저리그에서의 선수 생활을 순탄하지 않았다. 입단 당시 소속팀에는 다수의 흑인 선수들이 있었고 그에게 쉽게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에 머물러야 했다.

흑인 선수들의 비중이 점점 확대하는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의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흑인 선수들의 비중을 급격히 늘리는데 각 구단은 부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다저스는 그를 엔트리에도 등록시키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피츠버그 구단에서 그를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했고 마침내 출전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55년, 정규 시즌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하게 됐다. 출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철저히 이방인이었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흑인 못지않은 차별을 겪어야 했다. 특히, 그가 메이저리그 선수로 이력을 쌓았던 도시 피츠버그는 미국에서 일찍부터 철강과 자동차 산업 등 중공업이 발전한 공업도시로 백인 노동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곳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영어에 서툰 젊은 중남미에서 온 이방인의 삶은 외로움과 함께 지속적인 차별과 편견, 혐오와의 싸움이었다. 심지어 동료 선수들과의 관계에서도 배제됐습니다. 재키 로빈슨이 흑인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의 역사를 열었지만,  여전히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의 백인 선수들은 유색인종 선수들과 같은 숙소, 같은 차를 타는 걸 거부했다. 
 
사회적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인종 간 차별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고 심지어 화장실과 대중교통의 이용에 있어서도 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기장 내외에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고 지속적인 살해 협박과 고의적인 빈볼 등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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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메이저리거, 중남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도전 발판 마련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실력으로 자신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이겨냈다. 꾸준히 기량을 발전시킨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60년부터 전성기를 맞이했고 소속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이후 4번의 타격왕에 올랐고 1965년에는 리그 MVP에 올랐다. 또한,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그의 선수로서의 이력은 이에 머물지 않았고 12번의 올스타팀 멤버 선정과 뛰어난 수비 능력을 보인 선수에게 수여하는 골든글러브를 12번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1972년에는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하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런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활약은 흑인 선수들에 이어 중남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현재 메이저리그 팀들의 선수 구성에서 중남미 선수들의 비중은 매우 크다. 이와 함께 중남미 지역의 야구에 대한 열기도 매우 뜨겁고 우수한 선수들을 다수 배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선수층은 WBC 등 야구 국가 대항전에서 중남미 팀이 강세를 보이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아울러 중남미 지역 청소년들에게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는 건 큰 꿈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선수로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긴 그였지만, 그가 긴 세월 존경받는 선수로 남은 건 진정성 가득한 선행과 자선활동에 있다. 또한, 중남미 선수로서 그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는 그의 성공을 자신의 것만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메이저리그 선수로 큰 성공을 했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푸에르토리코를 포함한 중남미 국가의 국민들 상당수는 가난하고 빈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자신보다 못한 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통산 3000안타 기념공

 




적극적인 자선활동, 행동하는 사회 운동가 

 
그는 사비를 털어 중남미 지역 국가에서 자선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컸고 그들을 지원하는 일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는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이들을 위해 식량 등을 지원하고 청소년들에게 야구 장비를 지원해 그들이 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미국 현지 언론들이 그의 이름 로베르토를 미국 식으로 표현하는 밥으로 표기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로베르토임을 수시로 밝히기도 했다. 그는 비록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지만, 그의 정체성을 훼손되는 일을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선수였다.
 
이런 로베르토 클레멘테에게 1972년 겨울, 중남미 국가인 니카라과의 대지진 소식이 들려왔다. 그 지진으로 니카라과는 많은 인명,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구호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구호품을 현지로 보냈지만, 구호품의 대부분을 부패한 현지 군인들과 관리들이 착복하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자신이 직접 구호품을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12월 31일,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구호물품, 구호팀을 실은 수송기가 현지로 향했다. 하지만 그 수송기는 너무 낡았고 정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악천후의 날씨에 적재 한도를 크게 초과한 2톤에 가까운 구호물품을 수송기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수송기는 이륙 후 얼마 안 가 불길에 휩싸였고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의 허망한 최후였다. 대대적인 수색이 있었지만, 그의 시신 역시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최후, 하지만 존경받는 선수로 기억되는 이름 로베르토 

 
그의 최후는 중남미 국가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고국 푸에르토리코는 애도 기간을 정해 그를 추모했다.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였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973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만들어 그 해 활발한 사회 공헌 활동을 한 메이저리그 선수에 시상하기 시작했다. 이 상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는 그 어떤 상보다 영예로운 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은퇴 후 5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선정하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투표를 통해 그를 바로 등재되도록 하며 예우했다. 

그의 유족들도 재단을 설립해 그의 유지대로 자선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비록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선한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 발휘되고 있다. 그는 생전의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상황을 개선할 기회가 당신에서 주어졌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땅에서 그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 지도층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에게 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성공의 과실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나눴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고국과 중남미인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런 마음이 지금도 메이저리그에서 그를 존경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현재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이는 우리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일이다. 한편으로 과연 50년을 향해가는 우리 프로야구 역사에서 자신이 야구를 통해 얻은 부와 명예를 함께 나누는 등의 선행을 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선수로서 그리고 은퇴 이후 예능 등에 출연하고 방송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많지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선수를 보기 힘든 현실은 아쉬움이 있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는 선수를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 우리 프로야구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들의 서사가 보다 더 많이 쌓여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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