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흔히 고대 역사를 배우면서 청동기 시대를 기점으로 신분제가 만들어지고 사회 계층이 생겨났다고 배운다. 신석기 시대 농경이 시작되고 그에 따른 잉여 생산물 발생, 그에 따른 경제력 차이가 부의 불균형을 만들었다. 더 많이 가진 자가 그보다 못한 자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하층민이 된 이들은 노예가 됐다. 여기에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국민들 상당수도 노예로 전락했다. 

노예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재산, 가축처럼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임이 부인되는 노예에게 인격이 있을 리 없었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 역시 인정되지 않았다. 노예는 소유의 대상이었고 양도, 매매의 대상이었다. 그 노예의 삶은 보통 대를 이어 세습됐고 그 굴레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인류 공통의 일이었다. 하지만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보편적 권리, 천부인권 사상 등이 보편적으로 자리하면서 노예제도는 선진화된 문명국을 자부하는 유럽에서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타 인종들 특히, 흑인들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그들에 대한 노예무역은 산업화가 이루어진 이후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기본적 인권은 무시됐고 그들의 주인들에 의해 가축보다 못하게 취급당했다. 노예 주인들에게 노예는 더 많은 생산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대항해 시대에 열리고 유럽 국가들의 신대륙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노예무역은 국제적으로 큰 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유럽에서는 매우 중요한 비즈니스가 됐다. 이런 노예무역의 가장 큰 무대는 유럽에서는 서인도 제도라 불리는 쿠바나 자메이카 등이 있는 카리브해 연안이었다. 그곳에서는 유럽인들의 대표적 기호식품인 설탕이 생산되고 있었다. 설탕은 특히, 영국인들 일상에 빼놓을 수 없는 홍차와 함께 하는 감미료로 일종의 생활 필수품이 됐다. 과거 귀족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산업이 커지는 건 불가피했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

 


18세기 들어 카리브해 지역의 설탕 산업은 유럽의 수요가 폭발하면서 크게 번성했고 그에 비례해 상당수의 흑인 노예가 그 지역으로 유입됐다. 노예무역도 더 크게 번성했다. 그리고 대항해 시대의 후발주자였지만, 이후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영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영국의 노예무역의 역사는 1663년 영국 왕 찰스 2세가 노예무역 인가증을 발급하면서부터였다.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사탕수수 농장과 설탕 생산 공장의 노동력 충당을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필요했고 그들을 실은 배가 수시로 카리브해를 드나들었다. 초기 노예무역은 대항해시대의 선두 주자인 포르투갈 등이 이끌었지만, 이후 영국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왔다. 영국의 대외 팽창이 급격히 이루어진 결과였다.

영국은 노예무역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며 최대 노예무역 국가가 됐다. 영국은 그들의 막강한 해군력과 해운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일명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이 됐다. 당연히 식민지 유지와 관리를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중에서 카리브해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은 설탕의 생산지로 그 중요성이 매우 컸고 돈이 되는 사업에 막대한 민간 자본이 투입됐다.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사업가들은 값싸고 오랜 기간 활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초기 사탕수수 농장은 현지 원주민들과 영국에서 이주한 백인들이 노동자로 일했지만, 현지 원주민들 각종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했고 백인 노동자들은 영국과 크게 다른 열대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즉, 일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사업가들은 아프리카에 눈을 돌렸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그들이 원하는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은 대부분 흑인 노예들로 대체됐다. 

이런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영국과 노예무역이 활성화된 서아프리카 연안, 카리브해 지역의 삼각 무역이 활성화됐다. 영국은 그들이 생산한 면직물과 각종 공산품 등을 가지고 가 서아프리카 지역에 판매하고 그 급부로 노예를 살 수 있었다. 노예 업자들은 노예들을 카리브해 지역으로 수송해 팔고 설탕을 구입해 영국에 판매해 이익을 남겼다. 이 삼각 무역은 누군가에 큰 이익을 안겨주는 루트였지만, 흑인 노예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고통이 시작되는 루트였다. 

 

설탕

 


서아프리카 지역은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백인 노예상들은 물론이고 같은 아프리카 지역민들로 이에 참여했다. 일부 국가들은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판매했고 다호메이 왕국은 아예 노예들을 사냥하는 방식으로 노예를 모아 공급하며 국가의 부를 쌓기도 했다. 이렇게 사냥된 노예들은 대부분 걸어서 긴 이동을 했고 서 아프리카 해안에 정박 중인 노예선에 올라 긴 항해를 해야 했다. 물론, 이동 과정에서 많은 노예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노예선의 상황은 더 비참했다. 노예들은 마치 화물을 싣듯이 촘촘히 배치돼 실렸고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결박된 상대로 누워있어야 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노예들이 있었던 탓에 배변을 위한 시설은 전무했고 위생상태 역시 최악이었다. 그들에 대한 음식물 공급도 매우 부실했다. 카리브해로 가는 긴 항해 중 상당수 노예들이 감염병이나 영영 실조, 탈수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반항하는 흑인에게는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 음식을 거부하고 목숨을 끊으려 하는 노예에게는 강제로 음식을 공급해 목숨을 이어가도록 했다. 노예선의 흑인들은 지옥보다 못한 상황 속에서 죽음마저 통제당했다. 

이런 극한의 고통 속에 카리브해에 도착한 흑인들은 경매 등의 과정을 거쳐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했다. 본격적인 노예의 삶이 시작됐다. 그들의 삶은 노예선과 다르지 않았다. 혹독한 노동환경 속에서 매일 중노동에 시달렸고 그에 따른 보수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 통제됐고 낮에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밤에는 설탕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조금이라도 일에 틈에 보이면 가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흑인 노예들과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설탕 제조와 그에 기반한 노예무역은 큰 호황을 누렸다. 노예무역은 영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대한 산업이 됐다. 노예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탕수수 농장의 농장주, 그와 관련한 자본가들이 영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예무역의 발전에 따라 런던 외 다른 항구들이 발전했고 막대한 자금의 흐름 속에 금융업과 보험업이 발달했다. 큰 수익이 보장된 노예무역에 자금이 몰렸고 노예들에 대한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보험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노예 무역은 어느새 영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했다. 

 

노예선 구조도 - 위키백과

 


하지만 노예무역의 참상이 점점 영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특히, 계몽주의자 등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종교인 들을 중심으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 대한 반대가 강했다. 1772년 영국 내 노예 제도를 부정한 도망 노예 서머셋 재판 사건은 이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1781년 노예선 종 호 사건은 영국 사회의 공분을 불러왔다. 이 노예선은 서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 연안으로 항해하던 중 항로를 이탈해 도착 일정이 늦어졌다. 이에 식량과 물이 바닥나면서 노예들의 유지가 어려워진 선장은 보험금을 노리고 다수의 노예들을 강제로 바다에 빠뜨려 살해했다. 사실상의 학살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선장과 선주의 보험금 청구와 관련한 보험사와의 민사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 사건을 통해 노예무역의 어두운 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양식 있는 지식인 저명인사들을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노예제도와 무역과 관련한 비판 의식이 커져갔다. 이 흐름 속에 반노예 운동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했다. 반노예 운동은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다. 중심인물 중에는 노예무역업에 종사하다 큰 사고를 겪은 이후 회심한 존 뉴턴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예무역에 종사하며 행했던 악행들을 참회하고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노랫말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찬송가이기도 했지만, 훗날  흑인 인권운동이나 각종 인권운동에서 불리는 노래가 됐다. 

정치권에서도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대표적 인물은 젊은 정치가 윌버포스였다. 그는 명문가 출신의 막대한 부를 상속받은 인물로 20대 나이에 의회에 진출했다. 말 그대로 엄친아에 금수저였다. 그는 촉망받는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복음주의자로 종교적 신념이 정치에 크게 영행을 줬다. 그는 의회 개혁과 영국 내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자유, 해외 선교활동에서 힘썼다.

윌버포스는 이와 함께 반노예 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이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반노예 운동을 입법으로 현실화하려 했다. 그는 뜻을 함께 하는 의원들과 함께 입법 활동에 나섰다. 윌버포스의 세력은 1789년 5월 노예무역 금지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표결에서 그 법안은 부결됐다. 상당수 의회 의원들이 노예무역업자들과 그 노예들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가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의회에서 법안 통과는 어려운 일이었다.

 

윌버포스 초상화 - 위키백과

 


노예제와 무역 존속을 원하는 세력들은 영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이고 여론 흐름을 주도하는 이들이었다. 여전히 강하에 존재하는 영국 사회의 인종주의도 넘어야 할 벽이었다. 윌버포스는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예무역 금지 법안을 제출했다.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윌버포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협박을 받기도 하고 신변의 위협도 있었다. 그에 대한 정치권과 상류 사회 등에서의 중상, 모략도 있었다. 하지만, 윌버포스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가지 않았다면 충분히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반인권적인 노예제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윌버포스는 의회에서의 어려움을 대중 정치로 극복하려 했다. 반노예 세력들은 국민들의 여론을 돌리는 활동을 지속했다. 노예들이 생산하는 설탕의 불매 운동을 하기도 했고 출판 활동과 사회 운동을 통해 여론 조성에 힘썼다. 반노예 운동 세력을 점차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 갔다. 마침 영국은 참정권의 확대와 함께 일반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참여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활성화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다. 소수파였던 윌버포스의 정치 세력은 대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에 큰 승리를 했고 의회 다수파가 됐다.

1807년 윌버포스가 그토록 염원했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의회 표결을 통과했다. 윌버포스와 그의 정치세력들이 20여 년간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노예제 폐지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했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사이 윌버포스는 청년에서 노년의 정치인이 됐고 늙고 병들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노예해방 상징 작품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권 밖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지원했다. 윌버포스와 그와 함께 하는 정치인들의 아들도 정치에 입문해 동참했다. 대를 이어 지속한 노예제 폐지 운동은 1833년 노예제 폐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병상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윌버포스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다했던 과업이 달성된 후 그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후 1834년 8월 1일 노예해방 법령을 정식 공포했다. 이로써 영국과 영국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노예제도는 사라졌다. 노예무역에 근거한 삼각 무역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를 위해 영국 정부는 재정적 부담에도 카리브해 지역의 농장주와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영국의 노예무역, 노예제도 폐지는 세계 각국에도 이와 같은 일을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이에 동참했다. 미국 역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에 이어 헌법개정을 통해 이를 확실히 했다. 19세기가 끝나기 진 대부분 나라에서 노예제도는 사라졌다. 우리나라도 1894년 조선의 갑오개혁을 통해 노예제도를 없앴다. 윌버포스의 신념이 큰 물결이 되어 전 세계를 뒤덮었다.

윌버포스의 성공은 집단 지성의 승리였고 민주주의 발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상식에 입각한 다수의 힘, 선한 영향력이 결국 세상을 바꾼 셈이었다.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의 역사는 민주주의 정치의 순기능을 보여준 일이었다.당시 대중들이 돈과 이익만 쫓았다면 윌버포스의 주장은 힘을 얻을 수 없었다. 대중들과 지식인들은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상당부분 이익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선진사회로 가는 길을 스스로 열었다.

 

 


하지만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인종차별의 문제는 남아있다. 인종주의는 아직도 서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우리 사회 역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가 여전히 존재한다.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 인종주의는 더 활개를 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인종적 혐오와 편견을 불러오고 큰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 지도층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조장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

노예제 폐지를 이끈 영국의 정치가 윌버포스는 보편적 가치와 상식에 입각해 문제에 접근했다. 그의 판단 기준에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익 등을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하지 않아도 사회 기득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할 인권의 가치를 위해 그 옳은 일을 위해 그의 평생을 바쳤다.  사회적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이 꼭 교훈 삼아야 할 정치인이 윌버포스다. 

이렇게 설탕의 달콤함 뒤에는 수많은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과 고통과 눈물이 있었다. 그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우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공산품 중  상당수는 저개발 국가의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산한 제품들이다. 우리는 싸고 편리하게 이를 이용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많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모르고 넘어간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공정무역 등 움직임은 그 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다.

그런 운동에 근거한 제품을 구입하거나 그에 반하는 제품을 불매하는 등 일상에서 보편적 가치 구현을 위해 동참할 방법이 있다. 즉, 우리 삶에서 가끔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관심과 작은 노력들이 모여 큰 흐름을 만들 수 있다. 사회를 바꾸는 건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과 연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