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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을 맞이해 KBO는 프로야구 역사를 빛낸 40인의 레전드를 발표하고 있다. 가장 많은 득표를 한 4인인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이종범을 시작으로 KBO는 주기적으로 그 대상자들이 공개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들에 대한 시상식과 관련 행사도 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다. 

그중에서 눈길이 가는 두 명의 2루수가 있다. 롯데를 상징하는 선수였던 박정태와 SK 와이번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가대표 2루수 정근우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출중한 타격 능력에 수비 능력을 겸비했고 그 누구보다 강한 투지와 경기에 대한 집중력 강한 승부욕이 돋보였던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프로야구 선수로는 큰 체격이 아니었고 그 신체 조건이 핸디캡이 될 수 있었지만, 실력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근성으로 이를 극복해 최고 선수 자리에 올랐다. 

박정태는 롯데 팬들에게는 여전히 가슴 뛰게 하는 선수다. 1991년 롯데에서 프로에 데뷔한 이후 2004 시즌 은퇴할 때까지 원클럽 맨으로 활약했다. 그는 롯데가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로 우승했던 1992 시즌 핵심 선수이기도 했다. 박정태는 1차 지명으로 롯데에 입단할 만큼 아마시절부터 주목받는 선수였고 입단 후 바로 주전 2루수로 자리했다.

그는 뛰어난 안타 생산력을 가진 전통적인 야구의 3번 타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매우 공격적인 타격을 하면서도 쉽게 삼진을 당하지 않았고 많은 안타를 생산하면서도 높은 출루율을 기록했다. 파워 히터는 아니었지만, 만만치 않은 홈런 생산 능력에 좌중간과 우중간을 뚫어낼 수 있는 갭 파워를 갖춘 타자였다. 

 

 

 



입단 2년 차인 1992 시즌 박정태는 0.335의 고타율에 14홈런 79타점을 기록했다. 69개의 볼넷을 얻어낼 동안 삼진은 42개에 불과했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은 안타를 만들어내고 나쁜 공은 보고 걸어나갈 수 있는 인내심을 갖춘 타자였다. 그와 함께 롯데는 강력한 홈런 타자는 없었지만, 김민호, 전준호, 이종운 등 다수의 3할 타자들과 뛰는 야구로 무장한 강력한 타선이 있었다.

여기에 선발 완투 능력을 갖춘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의 선발 트리오가 마운드를 이끌었다. 이런 투. 타의 조화는 롯데를 포스트시즌에 올렸고 그해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시작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루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 박정태는 우승을 확정하는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되는 2루수 땅볼을 처리하며 환호했다. 

우승의 영광과 함께 박정태의 야구 인생도 탄탄대로를 걸을 것으로 보였지만, 1993 시즌 박정태는 경기 중 불의의 부상으로 긴 공백기를 가졌다. 발목의 복합 골절상을 입은 박정태는 선수 생활 지속 여부마저 불투명했다. 수차례 수술을 받았고 2년 가까운 재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돌아온다 해도 그가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할지는 불투명했다.

1995 시즌 박정태는 부상을 딛고 1군 경기에 돌아왔다. 긴 경기 공백에도 박정태는 여전한 타격감을 과시하며 중심 타선에 섰다. 그 해 롯데는 박정태의 복귀와 함께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지금의 두산 OB에 패하긴 했지만,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이후에도 박정태는 강타자로서 그 활약을 이어갔다. 그의 야구 인생의 정점에서 맞이한 1999 시즌은 그와 롯데에 매우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그 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롯데는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고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대결했다. 당시 전망은 삼성의 우세였다. 시리즈 분위기도 삼성이 앞서가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롯데는 밀리는 분위기를 극복하며 시리즈를 마지막 7차전으로 이끌었다. 7차전에서 롯데는 삼성과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외국인 타자 호세가 관중이 던진 오물에 맞으면서 크게 흥분했고 방망이를 관중석에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프로야구장의 분위기는 원정팀에게는 매우 위압적이었다. 일방적인 응원에 병 투척 등 위험상 상황도 종종 일어났다.

과열된 경기 속에서 일부 관중이 롯데 선수들을 향해 위협적인 행동을 했고 마침 관중석에 날아온 오물이 문제가 됐다. 호세는 퇴장을 당했다. 이후에는 삼성 홈 관중과 롯데 선수들 사이세 시비가 벌어지고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분위기에서 롯데 선수들이 돌연 짐을 싸 경기장을 나가려 했다.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한 항의였다. 사태는 겨우 진정됐지만, 괴물 외국인 선수로 팀 중심타자였던 호세의 퇴장과 이미 주력 투수들이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롯데가 크게 불리한 흐름이었다. 

여기서 팀 주장이었던 박정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선수단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롯데 선수들은 강한 의지로 경기에 나섰고 연장 접전 끝에 역전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드라마 같은 승리였고 그 중심에는 주장 박정태가 있었다.  이는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아쉬운 패배를 당했지만, 롯데는 팀 역사에 남을 포스트시즌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1999 시즌 이후 롯데는 상당 기간 침체기를 보냈다. 구단 운영의 난맥상에 성적 부진에 따른 잦은 감독 교체, 부족한 지원 등 겹치며 롯데는 하위권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그 한편에서 박정태의 전성기도 점점 저물어 갔다. 박정태는 부상 복귀 이후 부상을 잊게 하는 활약을 했지만, 한 번 들어선 내림세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점점 전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FA 계약 역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팀 내 비중이 줄어들다 박정태는 2004 시즌 26경기 출전에 머물렀고 은퇴했다. 팀 레전드의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이후 박정태는 홀로 미국 마이너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하며 지도자 수업을 했고 롯데에서 다년간 코치로 일했다. 롯데의 감독 교체가 이루어질 때마다 후보군에 속하기는 했지만, 끝내 감독으로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코치로서의 성과도 크지 않았다. 2013년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끝으로 그는 현장을 떠났다. 이후 박정태는 사회봉사 활동과 야구 저변을 넓히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 그 중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명예가 크게 추락하는 아픔도 있었지만, 묵묵히 자신을 일을 하며 야구인으로 살고 있다.

은퇴 후 아쉬운 일이 있었지만, 롯데 팬들은 아직도 박정태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의 탱크라는 별명답게 저돌적인 복싱의 인파이터 같은 근성과 적극적인 플레이와 강력한 리더십,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흐느적 건들거리는 듯한 특별한 타격폼은 박정태를 상징했다. 

이런 박정태의 시대가 저무는 사이 새로운 2루수가 리그에 등장했다. 2005 시즌 지금의 SSG 랜더스, SK 와이번스에 입단한 내야수 정근우가 그 주인공이다. 정근우는 200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던 SK의 주축 선수였고 국가대표 2루수로도 큰 활약을 했다. 

정근우의 재능은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제대로 발현됐다. 김성근 감독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정근우는 단련되고 공수를 겸비한 2루수로 거듭났다. 정근우는 작은 키와 신체 조건을 빠른 발과 빠른 스윙 스피드 야구 센스로 극복했다. 정근우는 2루수로서 넓은 수비 폭을 자랑했고 어려운 타구도 쉽게 건져 아웃시켰다. 그의 수비 능력은 악마의 2루수라는 별명을 붙도록 했다. 

타격에서도 정근우는 뛰어난 타자였다. 그는 2020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3할이 넘는 통산 타율과 1877개의 안타, 121홈런, 722타점을 기록했다. 여기에 통산 371개의 도루로 기동력도 뛰어난 선수였다. 정근우는 2006 시즌부터 2016 시즌까지 20도루 이상을 달성했다. 잘 치고 잘 달리고 삼진보다 볼넷을 훨씬 많은 눈 야구까지 되는 정근우는 테이블 세터로 상대 팀에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얄밉도록 야구를 잘하는 정근우였다. 

그의 경쟁력은 국제 경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국제경기에서 어떤 투수의 공 빠르게 적응해 때려낼 수 있는  타자였다. 정근우는 이용규와 함께 오랜 기간 국가대표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정근우는 SK와 국가대표로서 많은 우승과 수상 경력을 쌓았다. 또한, 2013 시즌 이후 FA 자격을 얻고 대형 FA 계약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근우는 한화에서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또 한 번의 FA 계약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근우는 여전한 타격 능력에도 2루수로서의 수비 능력에 아쉬움을 보이기 시작했고 본래 포지션을 떠나 외야수로 1루수로 유틸리티 선수로 활약하는 일이 늘었다. 2루수로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정근우는 묵묵히 그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2루수로 커리어를 계속 쌓고 싶었던 그에게는 반갑지 않은 변신이었다. 

그 사이 한화는 강력한 팀 리빌딩에 들어갔고 정근우는 전력 구상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한화에는 정근우를 대신할 정은원이라는 재능 있는 2루수로 등장했고 출전 기회는 젊은 선수들에게 먼저 주어졌다. 2019 시즌 후 2차 드래프트에서 정근우는 보호선수 명단에 들지 못했고 마침 2루수 포지션 보강이 필요한 LG의 지명을 받고 3번째 유니폼을 입게 됐다.

2020 시즌 정근우는 주전은 아니었지만, 2루수로서 마지막 시즌을 보냈고 은퇴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2루수였지만, 정근우는 코로나 상황과 소속팀 변경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은퇴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이후 정근우는 야구 외에 예능과 각종 방송에 출연하며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야구 레전드들이 함께 하는 최강 야구에서 주전 2루수 겸 1번 타자로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야구선수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KBO에서 선정하는 40인의 레전드에 선정된 것도 그에게는 선수 생활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박정태와 정근우는 작지만, 누구보다 큰 이력을 남긴 2루수였다. 이들은 지금도 리그를 대표하는 2루수를 논할 때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성적도 뛰어났지만, 그 이름을 말하며 연상되는 강한 개성을 가진 선수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실력과 개성을 겸비한 선수들의 존재는 팬들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리그를 흥미롭게 하는 콘텐츠가 될 수도 있다. 박정태, 정근우와 같이 자신의 색이 뚜렷한 선수들을 보다 많은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KBO,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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