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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베트남은 1970년대 우리 국군이 참전한 월남전, 공산주의, 최근에는 대표적인 동남아시아 관광지, 조금 더 들어가면 중국에 이은 새로운 생산기지 등의 이미지로 대표된다. 최근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베트남을 다녀오면서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베트남에 대한 이미지는 후진국 또는 경직된 공산주의 국가, 뭔가 우리가 다른 세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베트남은 청년 인구 비율이 매우 높고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나라다. 이는 산업 생산의 역동성을 더하고 있다. 실제 베트남은 신흥 공업국으로 나라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있다. 또한, 다양한 관광지가 곳곳에 자리한 관광 국가로도 자리하고 있다.

이런 베트남과 우리의 거리를 더 가깝게 한 인물의 여정이 최근 마무리됐다. 2017년부터 베트남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박항서 감독이 계약 종료와 함께 그 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은 2022 아세안축구연맹 챔피언십 결승 2차전에서 홈팀 태국에 0 : 1로 패했다.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2 : 2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던 베트남은 1, 2차전 합계 2 : 3으로 아쉽게 태국에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베트남은 임기 마지막 경기를 하는 박항서 감독의 고별전을 우승으로 장식하며 그를 떠나보내려 했지만, 홈에서는 브라질도 고전한다는 안방불패의 팀 태국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들은 박항서 감독이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이룬 성과에 큰 박수를 보내며 그와 작별하려 하고 있다. 이미 결승 1차전에서 베트남 축구 팬들은 대형 현수막을 통해 박항서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행과 그곳에서의 성과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박항서 감독은 한국 프로축구 리그 초창기 멤버로 활약했고 1989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줄 곳 K 리그에서 그 이력을 쌓았다. 그는 선수 시절 17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크게 왜소한 체격으로 축구 선수로는 부족한 피지컬이었지만, 뛰어난 기동력과 투지 넘치는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지도자로서 박항서 감독은 다 연간 코치 경력을 쌓았고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일했다. 그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4강 신화를 만들어내며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업적을 만들었다. 박항서 감독은 히딩크 감독을 포함한 다수의 외국인 코치진과 스태프, 선수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며 4강 신화에 보이지 않게 큰 역할을 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의 성과는 박항서 감독의 지도자 생활에 날개를 달아줄 것으로 기대됐다. 이후 박항서 감독은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대표팀은 다수의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출전했음에도 4강전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패했고 동메달로 대회를 마치고 말았다.

박항서 감독은 애초 2004 아테네 올림픽까지 대표팀을 맡기로 되어있었지만, 아시안게임 부진으로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은 아시안게임에 대한 준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협회 행정의 난맥상이 그대로 노출됐다. 이에 더해 축구협회는 이미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히딩크 감독을 친선 경기에서 기술고문의 이름으로 벤치에 앉히는 말도 비 상식적인 일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박항서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을 물러나면서 축구협회와의 갈등을 폭로하기도 했다. 지금도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축구 협회의 무능과 비상식의 행정에 박항서 감독은 정면으로 맞선 셈이었다. 이는 국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 박항서 감독은 국내 축구에서 비주류 인사가 됐다. 

 

 

 



그의 지도자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박항서 감독은 코치와 감독으로 K 리그에서 그 이력을 쌓았지만, 그가 지도하는 구단들은 대부분 재정적 지원이 부족한 팀이었다. 그 속에서도 박항서 감독은 가지고 있는 전력을 극대화하며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부족한 선수 자원과 지원에 장사가 없었다. 박항서 감독은 번번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박항서 감독의 프로축구 지도자로서의 경력은 2015년 상주 상무에서 더 이어지지 못했고 야인 생활을 거쳐 현재 K3 리그 구단인 창원 시청 시민구단에서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그의 지도자 이력도 멈출 위기에 놓였다.

이런 박항서 감독에서 베트남 감독직은 새로운 기회였다. 60살을 넘어서는 나이에 박항서 감독은 세계 축구에서 먼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로 눈길을 돌렸고 베트남 감독직 제안을 수락하며 큰 도전에 나섰다. 특별한 연고도 없고 낯선 땅에서 박항서 감독은 적응에 상당한 어려움이 생길 수 있었다. 빠르게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장악하며 팀을 새롭게 만들었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행에 대해 국내 축구 팬들은 이제 지도자로서 더는 이력을 이어가기 힘든 그의 궁여지책이라는 시선이 많았고 베트남 현지에서도 그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컸다. 베트남은 이전까지 유럽 또는 일본인 지도자에게 대표팀을 맡겨왔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진에 변화를 모색했고 박항서 감독에 인연이 닿았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의 성향과 능력을 빠르게 파악했고 선수들에 특성에 맞는 전술을 개발해 활용했다. 박항서 감독은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들에게 있었던 기술이 부족하고 체력이 역하는 편견을 반박했다. 오히려 베트남 선수들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에 맞는 전술과 전략 부재가 부진의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박항서 감독은 이전까지 베트남 대표팀에서 사용하던 4백 수비 전술을 버리고 3백으로 변화를 꾀했다. 그러면서 3백 수비 전술에서 보통 기용되는 강한 피지컬의 수비수 대신 발재간이 좋고 빌드업 능력이 뛰어난 선수로 수비수를 기용했다. 대신 대인방어 능력도 강력한 체력을 가진 수비수 출신을 중앙 미드필더에 기용하며 두터운 수비벽을 구축하게 했다.

또한, 양쪽 풀백들이 수비에 적극 수비에 가담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에 베트남 대표팀의 전술은 5- 4-1 형태로 재편됐다. 이를 통해 베트남 축구는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빠른 역습을 하는 실리 축구로 변모했다. 이에 더해 박항서 감독은 선수들의 식단을 고영양식을 바꾸고 선수들의 부상 등 몸 상태를 세심하게 관리하며 선수단을 관리했다. 그러면서 강력한 훈련으로 팀을 단련했다. 박항서 감독의 강. 온 양면책은 베트남 축구를 빠르게 변화시켰다. 

베트남 남자 축구 대표팀은 과거 동남아시아권에서도 중위권으로 밀려있었지만, 박항서 감독 부임 이후 빠르게 발전했다. U23 대표팀은 아시안컵에서 결승전 진출의 성과를 이뤄냈고 성인 대표팀 역사 동남아시아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아시안게임 4강 진출,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 등의 성과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보다 한 수 위 전력이라 평가받았던 동남아시아 축구의 맹주 태국, 국경을 맞댄 중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베트남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베트남 하노이

 



박항서 감독의 성공에 베트남 국민들을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현지 기업들이 후원이 이어졌고 박항서 감독 또한, 베트남에서 최고 인기 스타로 자리했다. 그의 활약은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국내 축구 팬들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4강을 이끈 히딩크 감독에 빗되어 박항서 감독에서 베트남에서 유명한 음식인 쌀국수에서 착안한 쌀딩크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의 소식은 국내 스포츠 기사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졌고 이는 베트남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좁히도록 해다. 베트남 현지에서도 한국의 이미지를 더 긍정적으로 바꾸는 촉매제가 됐다. 그가 국내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항서 감독은 국내 지도자 생활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언론의 관심을 얻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감행한 모험이 큰 성공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베트남 역시 의구심 가득한 여론을 이겨내고 박항서 감독을 선택한 결정이 성공하며 그들의 축구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축구는 베트남을 넘어 동남아시아 축구 전반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베트남 축구의 성장은 인근 국가들에게도 큰 자극제가 됐다. 지역 축구의 최강자였지만, 동남아시아의 강자에만 머물렀던 태국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도 축구에 대한 관심을 커지게 했다.

동남아시아 축구는 한때 아시아 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동 축구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면서 아시아 축에서도 2류 국가로 추락했다. 프로축구 리그가 활성화되지 못했고 선수들의 해외 진출도 원활하지 않으면서 추구 수준을 높이지 못했다. 외국인 지도자를 영입하기도 했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아시아에서도 그 존재감을 높이면서 동남아시아 축구에 대한 국내외 인식도 달라졌다. 베트남 축구의 선전은 해당 국가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K 리그에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들이 진출하기도 했고 2부 리그지만, 유럽 리그에 진출하는 선수가 생겼다.

 

 

베트남 하노이

 



박항서 감독의 성공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국내 지도자들의 진출을 촉진시켰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전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 출신의 김판곤 감독, 인도네시아 대표팀에는 2018 러시아 월드컵 대표팀 감독 출신의 신태용 감독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 감독의 부임 이후 해당 국가의 축구 대표팀 경기력이 크게 발전했다. 최근 베트남이 준우승으로 차지한 아세안축구연맹컵에서는 한국인 감독이 지도하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모두 4강에 진출해 한국 지도자들의 대결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는 대표적인 저개발 국가들이고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세계에서 주목하는 신흥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풍부한 자원과 많은 인구는 그들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다. 이에 동남아시아 지역에 다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비중을 높이고 있다.

특히,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K 팝을 포함한 K 문화의 세계화 속에 그 지역에서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박항서 감독의 활약은 축구 감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의 긍정 이미지를 한층 더했다는 점에서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에서의 여정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스포츠가 가진 순기능을 입증했고 나이를 잊은 그의 도전 정신과 성공의 스토리 역시 주목해야 한다. 그는 승리자고 더는 비주류 축구인이 아니다. 2023년 그의 베트남에서의 여정은 끝났지만, 축구 지도자로서의 여정까지 끝난 건 아니다. 그가 베트남에서 쌓은 노하우는 우리 축구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또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그의 여정이 이어질 수도 있다. 앞으로 그의 또 다른 스토리도 기대해 본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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