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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운형은 매우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의 면모를 보였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그 과정에서 집안의 노비 문서를 소각하며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도 했다.

그는 가산을 정리해 해외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여운형은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초기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이끌었고 신한청년단은 3.1운동을 전후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여운형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자극을 받아 전후 세계질서를 논하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여운형은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 선언에도 관여했고 같은 해 2월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한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에도 깊이 관여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3.1운동과 이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여운형은 3.1 운동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 지도자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일본으로 초청하자 그곳에서 조선의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일본의 인사들과 이와 관련해 당당히 논의를 하는 등 적진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담대함을 보이기도 했다. 여운형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에서의 높은 인지도는 향후 그의 독립운동 전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여운형

 



이후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했고 이후 임시정부에 내부 노선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떠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고 지원했다. 이런 그의 활동은 일제에 크게 거슬리는 일이었고 일제는 중국에서 그를 체포해 국내로 압송했다. 여운형은 수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됐고 이후 조선 중앙일보 사장을 하며 언론인으로 활약했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의 해외에서 활동한 것과 달리 여운형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민중들에게 민족 지도자로 각인되고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여운형은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상황과 일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일찍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상했다. 이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 일제의 패망 이후를 대비한 비밀 조직인 건국동맹을 조직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 조직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로 변화되어 정국을 주도하기도 했다. 

조선의 총독부는 일왕의 항복 발표가 있기 직전 비밀리에 여운형과 면담해 일본인들의 안전 보장과 무사귀환, 질서 유지를 위한 협상을 했다. 그만큼 국내에서 여운형의 영향력이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가가 대부분인 정치범의 석방, 조선인의 치안유지 권한 보장, 조선학생 및 청년들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안정적인 식량 확보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일제의 항복 선언이 있었던 8월 15일이 하루 지난 8월 16일 서대문 형무소 등에 수감되어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히 석방됐다.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그들을 맞이했고 그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광복 소식이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광복에 환호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8월 15일 아닌 8월 16일에 모습이었다. 

 

 

상해 야구단 코치 시절

 



해방 후 여운형은 좌익과 우익으로 대립하는 혼돈의 정국 상황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 정치인으로 좌. 우 합작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여운형은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중들의 큰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고 지도자로서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여운형은 지속적인 암살 위협과 실제 그를 향한 암살과 테러에 시달렸고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그는 벗어나지 못했다. 1947년 4월 3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로 이동 중 괴한들의 총탄에 피습되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치세력 간 극단적인 테러가 난무하는 시기로 많은 정치인들이 독립운동가들이 암살되는 시기였다. 여운형 역시 극한의 시기를 넘지 못했다. 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 지도자의 허무한 최후였다. 

여운형은 사후 그의 유족들 상당수가 북한 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좌우를 가리지 않는 교류 탓으로 사회주의 인사로 분류되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과 업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며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활동이 재조명됐다. 그리고 2008년에 와서야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적이 공식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됐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순탄치 않았던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이런 여운형에게는 독특한 이력이 하나 더 있다. 여운형은 타고난 스포츠맨이자 스포츠 마니아였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운동을 즐겼고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했던 'YMCA 야구단'의 남자 주연배우 송강호 역할의 모델이었다. 여운형은 1912년 창단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이라 할 수 있는 황성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 일본 대학야구팀과 경기를 하기도 했다. 

 

 

축구팀과 함께

 



이 외에도 여운형은 스포츠를 민족의 체질과 의식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스포츠가 유용함을 인지하고 스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각종 스포츠 단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는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시기에도 그의 스포츠 사랑은 여전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야구팀 코치를 하기도 했고 상해 한인체육회 위원장이 되어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지역 순방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스포츠를 독립운동의 한 수단으로 인지했다. 

다시 국내로 돌아온 이후에도 여운형은 각종 스포츠 단체를 지원하고 활성화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지금의 대한 체육회의 전신인 조선 체육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여운형은 지금의 국민체조 격인 덴마크식 체조를 보급하는데 힘썼고 경기 대회 선수와 심판으로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육상경기에서 투포환 선수로 참가해 1위를 차지하는 가 하면 수영에도 능해 익사 위기의 사람들을 구해내기도 했다.

그로서는 스포츠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기 용이했고 독립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음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당한 체격에 뛰어난 체력의 소유자로 뛰어난 운동신경이 있었고 스포츠맨으로서 스포츠에 대한 남다른 사랑도 스포츠인으로서의 활동에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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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지운 손기정 기사

 



그는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당시 손기정은 일본의 대표 선수로 올림픽에 나서는 데 망설임이 있었던 손기정에게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라는 말로 그를 격려하며 그의 참가를 독려한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손기정은 올림픽에 참가해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와 함께 참가한 남승용 역시 동메달을 차지하며 2명의 조선인이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여운형은 3대 일간지였던 조선 중앙일보의 사장이기도 했는데 그는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장면이 실린 사진 중 일장기 부분을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었다. 이와 관련해 조선 중앙일보는 인쇄기의 성능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총독부의 검열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실제 조선 중앙일보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재정상황 속에 있었고 인쇄기의 품질이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서 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운 기사를 배포한 게 총독부에 문제가 되면서 조선 중앙일보까지 정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중요한 항일 운동의 한 장면인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이렇게 여운형은 일제 강점기 스포츠를 매게로 또 다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함께 스포츠를 보다 대중화하는데도 힘썼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민족 지도자였지만, 스포츠인이기도 했다. 그가 1929년 중국 상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된 것도 야구 경기 관람을 위해 야구장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여운형과 스포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과 같았다. 

그의 스포츠인으로서의 활동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일제 강점기 강제 해산된 조선 체육회가 부활해 만들어진 대한체육회 초대 회장과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 초대 회장직에 오르기도 했다. 해방 후 남한은 미 군정이 실시되는 상황이었고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이었다. 스포츠는 정부 수립 이전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광복직후 여운형

 



여운형과 대한체육회 등의 노력으로 남한은 1947년 6월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없었음에도 남한은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 올림픽과 런던 하계 올림픽에 나라를 대표한 선수단을 파견할 수 있어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스포츠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운형은 이런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의 첫걸음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는 남한의 IOC 가입 축하를 위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나서다 1947년 4월 3일 피습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좌. 우 이념 대립 없이 모두가 공존하는 대한민국, 모두가 스포츠를 즐기는 대한민국을 꿈꿨지만, 같은 민족의 손에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족 지도자로서 여운형은 긍정과 부정이 공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는 어느 인물에게나 뒤따르는 일이고 역사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포츠에 있어 여운형은 중요한 선각자였고 우리 스포츠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세계 무대에 첫 발을 내딛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포츠의 순기능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행동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대한민국이 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

이념과 정치적 유불리와 분리된 스포츠인 그리고 체육인이었던 여운형, 그를 평가함에 있어 호불호가 엇갈릴 수 없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사진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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