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9번째 이야기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해안의 항구 군산, 월명동과 해신동이었다. 군산은 과거 일제시대 곡창 지대였던 호남 지역의 쌀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반출되던 창구로서 번성했다. 하지만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군산은 풍요와 번영의 항구였지만, 우리에게는 수탈과 아픔의 항구이기도 했다. 

지금도 군산에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사용하던 일본식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다. 이 건축물을 적이 남겨주고 떠났다고 하여 적산가옥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근대사의 유적지로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모 국회의원이 목포에 대규모로 구입해 투기 의혹에 휩싸여 있는 건축물들도 적산가옥들이 상당수다. 역사적 사료로 보존되고 그 모습을 유지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반대로 일제시대 건축물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건 그만큼 그 지역이 낙후되고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반갑기만 하지는 않다.

군산 역시 과거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지역민들이 원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결코 반갑다고만 할 수 없다. 또한 최근 군산에는 지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한국 GM 공장이 폐쇄되면서 지역 경기가 더 침체되는 아픔이 있었다. GM 군산 공장의 근무자 상당수가 직장을 잃었고 하청업체와 공장 인근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도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가뜩이나 지역 경기가 어려워지는 시점에 군산에는 그 어려움이 가중됐다. 






군산의 여정은 그만큼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절망에만 빠져있지 않았다. 더 나은 삶과 희망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작지만 희망도 발견할 수 있었다. 군산 앞바다에서 시작한 여정이 활력이 넘치는 수산물 시정을 첫 번째 방문지로 정한건 분명 의미가 있었다. 

그곳에서 상인들은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삶을 일궈나가고 있었다. 지역의 별미 박대구이로 함께 한 소박한 점심 한상에서 진행자와 상인들의 온기가 가득 피어났다. 박대구이의 향을 뒤로하고 여정은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길, 벽화길을 따라가다 허름한 복싱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 체육관은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시설은 낡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지만, 과거 지역의 복싱 종목의 산실로 이곳을 거쳐간 다수 선수들의 수상 이력들이 체육을 채우고 있었다. 이 체육관을 운영하는 부부는 과거 배고프고 힘든 시절 그 현실을 극복하고 성공을 위해 복싱 종목을 시작한 선수들의 자식처럼 보듬고 돌봐주며 80년대 복싱 부흥기에 다수의 수상 경력자를 키워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고 복싱 입문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과거의 영광들이 이곳을 지탱하고 있지만, 노부부의 제자 사랑은 과거 군산의 복싱 선수들에게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희망의 불빛이었다. 

과거 희망의 장소였던 복싱 체육관을 떠난 여정은 거리의 식당으로 향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이 식당은 오랜 세월 식당을 지켰던 어머니와 아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요리를 하고 있던 아들은 GM 군산공장의 폐쇄와 함께 직장을 잃으면서 실직의 아픔을 겪었다. 그는 한때 깊은 실의에 빠져있었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 했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 결과 지금은 진행자도 인정하는 요리 실력도 갖췄다. 여전히 힘들지만, 큰 시련을 이겨낸 아들과 그 아들은 곁에서 지켜주고 보듬어 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중간중간 일제시대 건축물인 일본식 사찰 동국사와 부유한 일본인이 건축했던 히로쓰 가옥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쉰 여정은 카페로 꾸며진 작은 호떡집으로 이어졌다. 씨앗호떡을 팔고 있는 이 호떡 카페는 흔히 노점에서 사 먹던 호떡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아이디어 돋보이는 가게였다. 자신이 고안한 호떡 제조 기계까지 볼거리와 재치가 돋보이는 호떡 카페의 사장은 아직 젊은 아가씨였다. 

호떡 카페의 사장은 과거 꿈 많은 청춘 시절을 보냈지만,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에 가장이 됐고 치열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호떡집에서 수년간 일하면서 배운 기술과 자신의 노하우를 결합해 군산에서 호떡 카페를 열었다. 결코 쉬운 일상은 아니지만, 호떡 카페의 사장은 긍정 마인드로 가득했다. 그가 진행자의 손에 쥐여준 호떡에는 남은 배려하는 따뜻함이 가득했다. 

호떡 카페의 따뜻함을 가지고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내려선 여정은 케스트하우스가 많은 군산의 월명동 거리로 마지막 여정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군산이 좋아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 많은 방문자들이 감사 메모와 메시자가 인상적인 이 게스트하우스는 부부의 정성으로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군산을 홀로 여행하는 젊은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가고 있는 이들에게 군산은 그들에게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 힐링의 장소로 보였다.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방문자들과의 대화 속에 군산의 밤은 깊어갔다. 

군산은 과거에도 현대에서도 많은 아픔들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기보다는 스스로 희망을 만들고 삶은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군산에서의 여정은 과거의 추억 찾기만 한 것이 아닌 희망까지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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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8번째 장소는 서울의 도심에 자리한 동네 연남동, 연희동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지하철역 중 한 곳인 홍대 입구역에서 시작된 여정은 젊은이들의 즐겨 찾는 명소가 된 연남동 경의선 숲길 공원에서 시작됐다. 

과거 일제시대 서울에서 신의주, 만주로 이어지는 경의선 철도가 새롭게 조성되면서 수명을 다한 과거 철길을 따라 조성된 경의선 숲길은 가로수를 따라 다양한 카페와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색다름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끌고 있다. 

특히, SNS를 통해 특색 있는 카페들과 거리가 알려지면서 빠르게 인지도가 높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다. 그 덕분에 과거 일반 주택들도 카페로 바뀌는 등 이곳의 모습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로 인해 과거부터 이곳을 지키며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한층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삶의 터전을 떠나거나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대형 음식점 등이 들어서면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부작용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연남동 거리에는 작지만 예쁜 카페들과 가게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단독 주택을 개조해 만든 카페 형식의 방앗간이 눈길을 끌었다. 이 카페는 과거 누군가가 사용하던 고풍스러운 생활용품들을 소품으로 사용하고 인테리어를 과거 건물을 최대한 활용해 특색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룬 이 방앗간 카페는 역시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은 고소한 참께라떼가 최고 인기 메뉴로 자리하고 있었다. 

추억과 멋, 예쁜 인테리어를 모두 느낄 수 있는 방앗간 카페를 떠나 이어진 여정은 연남동과 연희동이 만나는 곳 한 편을 차지한 차이나타운 그 중심을 이루는 화교학교로 이어졌다. 약 500명의 중. 고교생이 재학 중인 화교학교는 모든 수업을 중국어도 진행하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리키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었다. 과거 학생 수가 2,000명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 그 규모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리를 잡은 화교들에게 이 화교학교는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문화 다양성을 더해주는 소중한 장소였다. 화교학교에서 학생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발걸음은 2대째 운영 중인 중화음식점으로 향했다. 

화교로 부모님에 이어 중화음식점을 운영하는 부부는 직접 손으로 군만두를 빚어 만들어낸 등 전통 방식으로 만든 중화요리로 오랜 시간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주인 부부의 정성 탓인지 동네에서는 단골들이 자주 찾는 또 다른 명소 중 하나였다. 진심이 통한다는 말이 딱 맞는 그런 곳이었다. 

중화음식점에서 허기를 채운 여정은 연희동 한 편에 자리한 연희문화창작촌의 풍경을 살폈고 유망 작가들의 핸드프린팅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은 과거 일반인들이 다가설 수 없는 곳이었지만, 2009년부터 누구가 찾을 수 있는 곳이 됐다. 물론, 이곳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문인들이 있는 건물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창작의 공간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 보였다. 

연희문화창작촌의 예술의 향기는 단독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선 연희동 골목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주택가에서 오래된 LP 판으로 문을 장식한 단독주택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공유하는 작은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집 주인은 SNS를 통해 행사를 공지하고 사람들이 그 공지를 따라 이곳을 찾으면 음악이나 책 감상회 등을 통해 느낌이나 감상을 공유하고 토의하는 장이 마련된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옆집 일에 무관하기만 한 현실에서는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 풍경이었지만,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연희동에는 주택가 한 편에 자리한 오래된 떡집이 또 다른 명소였다. 3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떡집은 쉽게 맛볼 수 없는 콩고물 떡이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 떡은 콩으로 카스텔라 가루 같은 콩고물을 수작업을 만드는 전통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고 정성 가득한 떡은 만들면 금방 동이 날 정도로 인기 메뉴가 됐다. 떡집의 1대 할머니부터 시작된 방식을 지키려는 노력과 좋은 맛을 위한 마음이 손님들과 통한 결과로 보였다. 

떡집을 나와 이어진 여정은 마지막으로 40년간 연희동을 지키고 있는 미용실로 이어졌다. 이 미용실은 기계적으로 머리를 해주는 곳이 아니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수시로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식사도 하는 일종의 노인정과 같았다. 이 미용실의 원장은 이곳을 찾는 어르신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등 편안하게 이곳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이곳의 원장과 손님들의 관계는 단순한 손님과 주인의 관계 그 이상이었다.

이곳에서 어르신들과 원장은 정을 나누고 필요할 때는 미용실의 일도 도와주면서 마치 가족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삭막하기만 한 도시 한 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훈훈한 장면이었다. 40년 미용실의 온기를 느끼며 여정은 마지막으로 다시 젊은이들도 가득한 연남동 경의선 숲길의 밤거리 풍경으로 이어졌다. 

연남동, 연희동은 서울의 번화가와 연결된 곳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에 바탕한 장희빈 우물과 같이 과거의 것을 지키고 경의선 숲길과 같이 과거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다양함이 함께하고 있었다. 또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 역시 있었다. 삭막한 도시지만, 그곳에서도 마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오아시스는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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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게임과 미스터리 판타지를 조합한 색다른 소재로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16부작 중 12부를 마치고 절정을 향하고 있다. 굴지의 투자회사 대표였던 유진우가 사업체 방문한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비현시적 체험을 하면서 시작된 드라마는 등장 인물들의 갈등과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미스터리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다. 

주인공 유진우는 원천 기술을 확보한 특수 렌즈와 결합한 가상현실 게임을 찾았고 게임을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게임은 분명 현실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게임 속에서의 죽임이 현실이 되면서 과거 그와 사업을 함께 했던 친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유진우 자신도 게임 속에서 당한 부상으로 불구의 몸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우는 게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지만, 자신과 친형제 이상으로 끈끈했던 서 비서가 게임을 하는 과정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자신 역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다. 유진우는 문제 해결의 우선 조건이 게임 개발자를 찾으려 했지만, 자신의 애인 희주의 동생이기도 한 세주의 행방은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유진우는 세주가 게임의 마스터로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그의 생존을 확신했다. 세주는 게임 속에서 여러 단서를 유진우에게 남기고 있었다. 유진우는 마스터 세주의 흔적을 찾기 위해 위험한 레벨업을 지속했다. 그 결과 그는 마지가 퀘스트에 이르렀지만, 끝내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사이 그의 입지는 날로 불안해졌다. 유진우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확신한 회사의 이사진은 그의 해임을 의결했고 그는 그가 만들고 일궈낸 회사의 대표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우가 그라나다에서 큰 사고를 당한 당시 사망했던 그의 친구 차영석의 부친 차교수는 유진우가 대표직을 내려놓자마자 그를 파멸로 이끌 작업을 바로 진행했다. 

차 교수는 유진우 회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아들의 죽음이 회사에 영향을 줄 것으로 염려해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묻어둘 정도의 냉혹한 인사였다. 그는 유진우의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회사의 이익을 위해 유진우 대표가 필요했다. 하지만 유진우가 장담했던 게임의 문제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진우가 장기간 대표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회사의 위기로 이어지자 그를 내치는 결단을 했다. 

그러면서 차 교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탄원하는 동시에 유진우가 유력 용의자임을 언론에 흘려 유진우를 압박했다. 유진우로서는 회사도 지키고 게임의 문제로 동시에 해결하려는 시도가 큰 벽에 막힌 셈이었다. 더군다나 어렵게 시작한 애인 희주와의 로맨스 역시 비극으로 끝날 위기에 처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유진우는 그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상당 기간 외국에 머무르기도 했다. 하지만 고통은 더해지기만 했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술과 약물로도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유진우는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 서버를 중단하면서 고통은 잠시 잦아들었지만, 게임을 벗어난 현실에서도 그는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결국, 유진우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차 교수를 찾아 게임 서버를 다시 열고 그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 차교수에게 게임의 문제는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유진우는 마스터 세주가 남긴 단서를 풀기 위해 위험한 레벨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현실과 게임이 혼재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그가 무난히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현재로서는 주인공이 끝모를 추락에 직면할 가능성도 크다. 

다행시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 희주가 있다는 점이 조금 위안이다. 희주 역시 게임 속으로 들어올 것이 예상되면서 희주의 역할이 후반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과연 두 사람이 잠적한 세주를 찾고 게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가 남은 스토리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명확하다. 게임의 오류가 무엇인지 의도된 것인지 다른 문제가 있는지 게임과 연관된 이들의 죽임이 게임의 문제인지 또 다른 음모가 숨겨져 있는지 그 답이 나와야 한다. 또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그 갈등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밝혀져야 한다. 과연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이뤄낼 수 있을지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가져올 수 있을지 그의 마지막 퀘스트 결과가 궁금하다. 


사진 : 드라마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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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7번째 이야기는 동해바다와 접한 강릉, 그중에서도 정동진과 중앙동이었다. 과거 대관령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었던 강릉은 서울에서 가기에는 먼 곳이었지만, 이제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까지 개통되며 수도권에서도 보다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관광 명소가 됐다. 특히, 한 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은 해돋이를 보려는 인파로 가득한 곳이 강릉이다. 

동네 한 바퀴의 여정은 1월 1일 2019년 새해를 맞이해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에서 시작됐다. 역시 정동진에서는 해돋이를 보고 한 해를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새해맞이 소원들을 동해 바다는 넓은 품으로 가득 다 안고 있었다. 

한 해를 시작하는 해돋이와 함께 발걸음은 정동진 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25년 넘은 낡고 작은 배로 고기잡이를 하고 그와 함께 물질을 하는 노년의 어부와 해녀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남편이 제주에서 군 생활을 하던 당시 군인과 해녀로서 만나 연예 끝에 부부의 인연을 맺었고 수십 년 동안 강릉에서 고기잡이와 물질로 생계를 이어왔다. 






거친 바다에서의 일이 1년 내내 이어지고 위험이 항상 따르지만 노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바다를 삶은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힘들 수도 있는 일이지만, 노부부는 한결같이 이른 아침부터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바다는 그들의 삶은 지탱하는 에너지원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 부부와 바다에서 방금 잡은 물고기로 아침 한 상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정동진에서의 아침을 보내고 여정은 강릉시내로 향했다. 이동 수단은 정동진에서 강릉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이제는 빠르고 편한 고속 열차가 보편화된 요즘이지만, 무궁화호 열차는 빠르고 편안함 대신 편안함과 과거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진행자는 젊은 시절 기차를 타면 준비해야 하는 필수 아이템인 삶은 달걀과 사이다로 과거의 행복한 기억을 추억했다. 

정동진에서 강릉역까지 짧은 기차 여행 후 강릉에서의 여정은 강릉의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중앙동에서 다시 이어졌다. 중앙동은 과거 신라시대부터 행정의 중심지로 일제시대 원형이 상당 부분 훼손되는 비운이 있었지만, 행정 관청인 강릉 중앙 대도호부 건물이 남아있어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근처에는 과거 임당동으로 불리던 오래된 마을의 벽을 벽화로 채워 넣은 벽화골목이 또 다른 명소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골목은 구시가지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그 기억만을 간직한 채 오래된 집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일제시대 일본들이 지어 거주했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일본식 건물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벽화 골목은 강릉의 과거를 그대로 품에 안고 있는 곳이었다. 

골목을 따라가다 70년 넘게 한자리에서 영업 중인 방앗간을 만났다. 이 방앗간은 3번째 주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보통은 가업으로 가게가 이어지는 것과 달리 이곳은 서로 다른 이들이 가게를 인수인게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방앗간은 70년 전 기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떡을 만드는 방식도 과거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힘들고 번거로운 작업일 수도 있지만, 이 방앗간을 이곳을 찾는 단골손님들을 위해 과거의 맛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80살이 넘은 2대 사장은 은퇴 후에도 이 방앗간 일을 도우며 3대 사장이 방앗간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만이 남아있는 도시 속 가게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방앗간에서 방금 나온 가래떡의 쫀득 쫀즉 한 맛을 느끼며 발걸음은 과거 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중앙동 근대화 거리를 향했다. 이곳에서 일본식 건물을 카페로 보수해 사용 중인 곳을 찾았다.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이는 이 건물은 이제 색다름과 독특함을 찾는 젊은이들과 과거의 향수를 느끼려는 장년층 모두가 찾는 명소가 됐다. 일제 시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지만, 지금은 특색 있는 카페가 된 이곳에서 왠지 모를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발걸음은 강릉의 관광 명소로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된 중앙시장의 풍경과 함께 코다리 가게와 다양한 전을 만들어 파는 전집을 거쳐 강릉을 찾는 이들이 꼭 맛봐야 하는 감자 옹심이 맛집과 연결됐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이 옹심이 식당은 지역민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에게도 맛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식당 문을 열기 한참 전부터 줄을 서야 맛을 볼 수 있는 강릉 맛집이었다. 

옹심이는 감자를 갈아 물기를 제거하고 다시 반죽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만드는데 이 식당은 그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고 있었다. 기계로 만드는 것과 별 차이도 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이 식당을 일부러 찾는 건 사람의 정성 가득한 맛이 기계를 대신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 보였다. 

옹심이 맛집에서 든든한 한 끼를 한 여정은 강릉의 새로운 명물이 된 바다 부채길에서 대자연의 신비를 체험하여 절정으로 향했다. 바다 부채 길은 우리나라 유일의 해안 단구 지형으로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탐방로는 바다를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해안을 지키는 철책과 이동로로 사용되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통제되었지만, 최근 개방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됐다. 

이 바다 부채길에서 잠시 벗어난 발걸음은 금진해변에서 차가운 겨울바다에 몸을 맡긴 채 서핑을 즐기는 이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서핑은 여름에만 즐기는 스포츠가 아닌 사계절 즐기는 스포츠로 발전했다. 일 년 내내 파도가 몰아치는 동해안은 서핑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고 강릉 해안은 서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곳에서 진행자는 30대의 나이에 서울에서의 직장을 떠나 서핑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젊은 대표가 그 밑에서 서핑을 수년째 배우고 즐기는 60대의 은퇴한 수강자를 함께 만났다. 이들에게 행복은 돈을 많이 벌고 풍족한 삶을 사는 것만이 아니었다. 바다와 함께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큰 행복이었다. 넓은 강릉 릉 바다와 접한 삶이 이들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렇게 새해 시작과 함께 찾은 강릉에서도 다양한 이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며 살고 있었다. 이들의 삶과 함께 바다와 접한 강릉에서만 느낄 수 있느 감성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의 가치가 과연 정답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여정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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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함께 하고 있는 동네 탐방기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6번째 이야기는 서울 행촌동과 천연동이었다. 이곳은 이제 서울의 관광 명소가 된 한양 도성 성곽길 아래 자리한 동네로 현대화된 도시 속 과거 흔적들을 가득 담은 도시 속 섬과 같은 곳이었다. 

여정의 시작은 인왕산으로 연결되는 무악재 하늘다리에서 시작됐다. 아 다리는 도시에서 인왕산으로 오를 수 있는 일종의 지름길로 안내해주는 통로였다. 또 한편으로는 멋진 서울의 풍경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치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자연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비상구와 같은 느낌이었다. 

무악재 하늘다리를 지나 발걸음은 인왕산 성곽길로 이어졌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은 유지 보수가 잘 이루어지면서 멋진 산책로가 됐다. 성곽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 편으로는 고층 빌딩들이 가득한 도심과 수십 년 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 행촌동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양 도성 성곽은 과거의 현재의 경계선과 같았다. 하지만 과거 속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 행촌동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었다. 

성곽길을 벗어나 행촌동으로 향하는 길, 작지만 멋진 정원이 함께 하는 오래된 집에 들렀다. 이 집은 주인이 20년이 넘도록 유지 보수하면서 멋진 공간으로 재 탄생한 곳이었다. 2018년에는 지자체에서 잘 가꾼집으로 선정할 정도로 잘 유지되고 관리되는 집이었다. 






이 집을 지키는 노부는 수십 년의 서울 생활 끝에 구입한 이 집을 떠나지 않고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보다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가는 일도 많았지만, 노부부는 집 곳을 새롭게 하며 작은 공간을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과거를 추억하면서도 추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집을 새롭게 바꿔가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멋진 집을 지나 다세대 주택들이 가득한 주택가 한 편에 자리한 작은 텃밭을 찾았다. 이 텃밭은 마을 주민들이 동네 자투리 공간을 밭으로 일군 것으로 이 밭에서 주민들은 힘을 모아 배추나 무를 키우고 수확물을 나누는 등 훈훈함 가득한 공간으로 재 탄생되고 있었다. 최근 도시의 남는 공간을 활용한 도시농업의 긍정적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다시 주택가를 지난 여정은 마을 주민들을 도심과 연결해주는 마을버스를 타고 역사적 유적인 독립문으로 향했다. 독립문은 과거 도로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지만, 도시 개발에 밀려 지금의 장소로 이전했다. 독립문은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변의 크고 높은 아파트 단지 속에서 조금은 외로운 모습이었다. 개발 우선주의에 밀려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역사 유적의 모습은 씁쓸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지키고 새롭게 창조한 곳도 있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도시 재개발과 철거된 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곳으로 이미 철거된 수십 년 전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과거의 것을 무조건 무수고 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전환한 도시 재생의 좋은 예였다. 그곳에서 과거 그대로 재현된 자신이 집에서 모친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노신사의 모습은 마음 한편에 슬픈 여운을 남겼다. 

도심에서 다시 인왕산 자락으로 돌아온 여정은 천연동과 연결됐다. 천연동에서도 도시 재생의 좋은 사례가 있었는데 과거 상수도 가압장을 개조하여 만든 마을 주민들의 열린 공간 천연 옹달샘이 그곳이었다. 이곳은 마을 주민들의 쉼터이자 공동육아의 장소로 마을 사랑방으로 여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천연 옹달샘에서 교류하고 공동의 일을 하면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삭막한 도시에서 찾기 힘든 훈훈한 공간이었다. 

천연동의 또 다른 명소는 꽈배기 골목으로 유명한 영천시장과 그 영천시장의 수십 년 역사와 함께 하는 만물상이었다. 영천시장의 꽈배기는 30~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인심 좋은 가게들이 역사를 만들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영천시장의 가게들과 오랜 세월 거래한 만물상은 1968년부터 가게를 운영한 70대 사장님이 자금도 과거의 방식대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50년 넘은 골동품과도 같은 동전 계수기는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장의 활기찬 분위기를 뒤로하고 여정은 3대가 함께 하는 천연동의 한옥집으로 향했다. 주변이 현대식으로 집으로 개조되고 다시 지어지고 있는 와중에서 이 한옥집은 3대에 걸쳐 그 모습이 유지되고 가족들이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새롭고 편리한 것이 최선의 가치가 된 지금이지만, 이 한옥집에서는 새롭게 편리한 것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했다. 

그 훈훈한 온기를 뒤로하고 여정은 멋진 야경이 함께 하는 인왕산 성곽길에서 마무리됐다. 행촌동과 천연동에서의 여정은 행복의 가치가 절대적일 수 없고 보편성의 잣대로 행복을 정의할 수 없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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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김영철의 동내 한 바퀴 5번째 동네는 서울 북한산 자락의 산동네 강북구 삼양동이었다. 삼양동으로 가는 길은  최근 개통된 우이신설 경전철을 이용했다.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우이 경전철은 2냥짜리 작은 기차지만, 지역민들을 시내로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전철 삼양 4거리에서 시작한 본격적인 동네 여행은 북한산의 중요한 봉우리인 인왕산이 보이는 산동네를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르고 미로처럼 연결된 동네 골목길은 낡고 오래된 담들이 연결되어 있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터로 나간 집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는 개들이 낯선 이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정은 강북구와 성북구를 연결하는 솔샘 터널에서의 풍경을 뒤로하고 동네 어르신들의 작은 쉼터로 이어졌다. 이곳은 동네 어르신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만든 쉼터였다. 이곳에서 어르신들은 윷놀이를 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설은 허술하고 외부의 찬 공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난로 역시 가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이들의 쉼터이다 보니 마음껏 등유 난로를 가동하지 못한 탓이었다. 





진행자는 이 쉼터의 따뜻한 겨울은 위해 등류 한 통을 주문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몸까지 따뜻하게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배려였다. 등유가 배달되는 사이 마을 아주머니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통닭집을 찾았다. 

수십 년간 옛날 방식으로 통닭을 튀겨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은 손님들의 모습만 봐도 어떤 닭이 필요한지 알아차릴 정도였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마을 아주머니들이 이야기 한 마당을 열고 있었다. 그런 소통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정이 쌓였고 오랜 단골들인 친구가 되었다. 삼양동을 떠난 사람들도 이 통닭집을 찾는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어르신 쉼터에 난로에 채워진 등유가 어르신들의 따뜻한 일상을 만들어주는 사이, 발걸음은 삼양동의 골목으로 다시 향했다. 그곳에서 50년 넘게 삼양동에서 태어나 이곳을 지키고 있는 마을 주민들 만났다. 삼양 초등학교 졸업생으로 삼양동은 그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삼양동을 떠났지만, 

그는 삼양동을 떠나지 않았다. 동네의 푸근함과 편안함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곳저곳 이사를 하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 낡고 불편한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추억을 함께 하는 침구들이 있어 그는 외롭지 않았다. 

삼양동 골목을 벗어난 여정은 2대에 거쳐 유지되고 있는 사진관을 거쳐 역시 수십 년 전통의 동네 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삼양동 사진관은 아버지와 그 아들이 이곳을 지키면서 50년의 역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찾는 곳이었고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추억을 담아주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었지만, 이 사진관의 아날로그 감성은 여전히 많은 이들을 잡아끌고 있었다. 

사진관을 지나 만난 동네 떡볶이집은 이탈리아에서 온 사위가 일을 도와주는 보기 드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떡볶이집의 사장은 3명의 자녀가 어릴 적 작고한 배우자의 몫까지 더해 장성시켰다. 이 떡볶이집은 가족의 애환이 가득 담긴 공간이었다. 지금도 이곳은 동네 아이들이 하교 후 떡볶이를 즐기는 곳이었다. 

수십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삶의 터전을 떠난 여정은 삼양동의 오래된 골목을 지나 작은 성당으로 향했다. 그 여정 속에서는 정감 어른 풍경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고단한 삶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낙후된 인프라는 이곳 주민들에게의 삶을 더 힘들게 했다. 삼양동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몇몇 마을이 현대식 아파트 단지로 바뀌긴 했지만, 이곳 주민들의 삶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 지역민들이 삶이 더 나아지는 개발을 고민하게 하는 장면 장면들이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계속된 여정 끝에 삼양동 주민연대 사무실을 지키는 한 외국인 신부를 만났다. 그는 뉴질랜드 출신은 이 신부는 20대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삼양동에 들어온 이곳에서 빈민구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70대의 노인이 된 이 신부는 이름도 한국 이름을 바꾸고 어려운 처지의 어른 학생을 양아들로 삼아 그가 성장하고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가족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삼양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성직자로서 격식을 버리고 청빈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삼양 주민연대를 이끌고 있는 것도 그 활동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무실 다락방에 모아둔 라면, 햄, 김 등의 생필품은 이 신부의 삼양동 사랑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진행자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아 울컥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혀 연고가 없는 외국에서 수십 년의 세월의 세월 봉사하는 삶을 사는 외국인 신부는 1년 내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을 보듬어주는 산타클로스 그 자체였다. 

진행자는 외국인 신부의 따뜻한 마음을 가득 담은 선물을 배달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더했다. 외국인 신부는 삼양동 사람들이 이기심과 시기김도 없지만, 무관심도 없는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했다. 고층 아파트나 편의 시설이 많지 않은 삼양동이지만,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이웃을 위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 삼양동 골목을 밝히는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는 이 신부와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응축된 빛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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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이 200회를 맞이했다. 역사저널 그날은 우리 역사의 장면들을 대담 형식으로 풀어가면서 잘 알지 못했던 뒷이야기와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최근에는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는 우리 근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슬픈 역사의 장면들이 너무 많지만, 그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고 있다. 

200회 방송에서는 조선 후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던 항일 의병을 그 주제로 했다. 얼마 전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의병에 대한 대중들이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의병은 우리 역사에서 그 연구가 부족하고 비중이 크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의 무장 독립 투쟁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느껴진다. 사료도 많지 않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의병의 우리 근대사에서의 의미를 재 조명했다. 

의병의 역사는 조선시대 큰 전란이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로 정부의 위기 대응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북쪽으로 피난하기에 급급했고 무너진 국방 시스템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일본군은 큰 어려움 없이 도성인 한양을 점령했고 거의 전 국토를 유린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이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의병들은 적들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지만, 이후 그 세력을 키워 일본군에 대항했다. 의병이 후방에서 일본군 보급선과 후방 지원을 차단하고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전세는 역전됐고 조선은 반격의 가능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청나라가 침략한 병자호란 당시에서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에서 농성전을 전개하긴 했지만, 청나라의 압도적 군사력을 당해 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준비 없는 친명 정책의 결과는 참혹했다. 청나라는 신흥 강국이었고 명나라는 국운이 쇠퇴했다. 대외 정세를 오판한 조선은 의미 없는 명분론에 집착하면서 청나라를 자극했다. 이는 청나라의 2차례 침략을 불러왔고 조선의 임금 인조는 항복의 예를 갖추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조선의 패전이었지만, 병자호란 당시에서 각지의 의병활동이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모두 집권층의 실정에 의한 것이었고 일반 백성들이 고통받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사고는 집권층이 저지르고 이르 수습하는 건 일반 백성들이었다. 의병의 역사는 고려 시대에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고려 몽골과의 긴 전쟁 기간에도 고려의 백성들을 몽골군에 맞서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맞서 싸운 역사의 기록들이 있다. 

당시 고려 집권층은 강화도로 피신해 있었고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음에도 사치 향락으로 점철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강화도 외 지역에서는 몽골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자구책 차원에서 지역민들은 뭉쳐야 했고 각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역시 사고를 저지르는 이들 따로 수습하는 이 따로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의병은 자신은 물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일념을 뭉친 자발적 운동의 역사였다.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에서도 그 정신이 이어졌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점에는 어김없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변변한 무기도 없었고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이들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여기에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그들의 총부리를 서로 겨눠야 하는 현실에서 의병의 활동은 한계가 있었다. 

의병운동의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는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단행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는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조직되어있었다. 하지만,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함께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병합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해산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상당수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에 응했지만, 당시 박승환이 이에 분개해 자결하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박승환의 자결은 무기력하게 해산을 받아들였던 대한제국 군인들을 행동하게 했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무기고를 급습해 반환했던 무기를 다시 꺼내들었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대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외국 침략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했고 해산의 비운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해산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의병군에 가담하면서 의병군은 보다 더 체계화된 편제를 갖추고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의병군은 전국 각지의 의병조직을 통합했고 그 세력을 결집했고 만만치 않은 세력을 과시했다. 당시 의병군은 과거와 같이 유학자들이나 양반들이 주도하던 것에서 벗어나 신돌석과 같은 일반 평민의 의병장으로 등장하는 등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자유, 평등사상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의병군은 각국에 의병군을 정신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 것을 천명하는 등 군사작전 외에 외교전도 함께 전개했다. 의병들의 활약상은 당시 영국인 종군 가자인 매컨지에 의해 해외로 알려지기도 했다. 매켄지는 일본의 방해와 주변의 만류에도 의병들을 찾아 그들의 만나 그들의 취재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역사책에 등장하고 있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재현한 의병 사진의 그 산물이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저항을 상징했던 의병은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때 서울 진공작전을 진행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총 대장 역할을 하던 이인영이 돌연 부친상을 이유로 작전을 중지하고 낙향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고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 속에 그 세력이 약해졌다. 일본군의 의병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협조하는 지역민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 결과 의병들과 민간인들이 연결 통로가 막혔다. 조선의 백성들은 의병들을 지원하는 한편 정보원의 역할도 해주었다. 

이런 후방 지원이 끊기면서 의병들의 그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이는 죽음을 의미했지만, 구국의 일념은 그것마저도 극복하게 했다. 결국, 상당수 의병들은 목숨을 잃었고 대한제국 내에서의 의병 활동도 그 불꽃이 사그러 들고 말았다. 이후 의병운동은 해외 무장독립 투쟁으로 이어지며 그 정신도 함께 계승됐다. 

혹자의 의병의 저항이 애초부터 무리한 시도였고 그 역량을 애국계몽 운동 등 현실적인 분야로 집중했다면 하는 의견도 제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의병군은 대한제국 해산 군인들이 가세한 이후에도 일본군과는 무기 등에서 비교할 수 없는 그 힘이 약했다. 일본군의 대결은 그만큼 상당한 희생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의병운동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에너지가 됐다. 그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았기에 일제의 폭압에 맞선 독립운동이 오랜 세월 지속할 수 있었다. 즉, 의병운동은 더 자세히 연구되고 기록되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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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동네 기행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4번째 장소는 신도시 분당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남, 그중에서 과거의 흔적을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태평동, 오야동이었다. 성남은 조선시대 도성을 수비하기 위해 축조한 남한산성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고 태평동과 오야동은 서울에서 이주한 이들이 옮겨와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신도시였다. 즉, 과거부터 서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네였다. 

동네 한 바퀴 여정의 시작은 고려 시대로 건립 연도가 거슬러 올라가는 지역의 오래된 사찰 망경암이었다. 이곳은 과거 조선시대 초까지 왕들의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빌었을 만큼 유서 깊은 사찰이고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은 서울의 전경을 살필 수 있을 만큼의 멋진 풍경이 일품이었다. 과거 왕들의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망경암에서 시작된 여정은 태평동의 골목으로 이어졌다. 태평동의 골목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됐다. 아래에서 오르막길을 바라보면 하늘에 길의 끝이 맞닿아 보였다. 태평동은 지평선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길을 오르내리는 이들에게는 힘겨움이 매일 같이 반복된다. 다만,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면서 하늘과 가까워질 수 있어 그 고단함이 조금을 덜해졌을지도 모른다. 






지평선 골목을 오가는 와중에 앵무새 2마리가 주인과 함께 가족처럼 지내는 세탁소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세탁소의 앵무새는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탁소 곳곳을 오가며 세탁소를 넓은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앵무새들은 홀로 세탁소 일을 하면서 느끼는 고단함을 덜어주는 친구였다. 또한, 동네의 명물로 주민들까지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지평선 골목의 세탁소는 동네의 사랑방같이 이웃들이 앵무새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소통이 공간이었다. 

세탁소를 지나 골목 깊숙이 접어들자 건물 옥상에서 김장을 하는 이들과 만났다. 동네 이웃들과 함께 하는 김장에 참여했다. 이제는 김장 김치를 직접 해먹는 일이 힘들어지는 현실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김장철이면 모여 김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이 동네에 함께 살면서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모여 귀찮고 힘든 김장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김장을 하면서 태평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태평동은 50여 년 전 서울지역 철거민들의 이주촌으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산비탈에 지정해준 20평 정도의 공간에 이주민들은 산을 개간하여 천막을 세워 마을을 형성했다. 이후 이 천막은 판자촌이 됐고 지금의 벽돌집으로 그 모습이 변했다.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 이주민들이지만, 초창기 이곳은 도시 기반 시절이 전무했고 모든 것이 불편했다. 여름이면 장마 피해도 극심했다. 

하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가꾸고 정이 넘치는 동네로 발전시켰다. 정원하나 없는 공간에 집을 지었지만, 동네 주민들을 건물 옥상을 정원, 텃밭 등으로 활용하며 새로운 공간으로 창출했다. 지금도 주민들을 옥상에서 빨래를 널면서 안부를 묻거나 주민들의 모임을 하면서 서로의 마음과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이웃 주민들의 삶에 무관심해진 보통의 일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다시 동네 골목을 벗어난 여정은 42년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솜틀집을 거쳐 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태평동 중앙시장, 그 안에서 옛날 방식 그대로의 팥죽을 판매하는 가게로 이어지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이 최선인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가게들은 그것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으 일깨워주었다. 

태평동에서의 발걸음은 100년 한옥이 자리한 성남의 오야동과 연결됐다. 오야동은 예로부터 오동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과거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서 역사와 전통을 함께 품에 안고 있었다. 현대식 건물 사이로 자리한 한옥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100년이 넘은 한옥은 일상에서 느끼기 힘든 독특함이 있었다. 이 한옥은 전통찻집을 운영하면서 외부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예전 방식 그대로의 전통차와 함께 한옥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오야동에서 느끼는 역사의 흔적 또 한 가지는 지금은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오야동 공소, 즉, 신부님이 상주하지 않는 천주교 성당이었다. 오야동 공소는 초창기 우리나라 천주교의 형태를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신자가 10여 명 남짓이고 그들 대부분도 노년층으로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 낡고 오래된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미덕이었던 산업화 시대를 거치고도 유지됐던 오야동 공소가 그 원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오야동 공소는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오야동에서 태평동으로 다시 옮겨온 여정은 45년간 동네 주민들과 함께한 이발관, 동네 어르신들의 장수 사진을 무려로 촬영하면서 동네 한 편에 자리한 사진관으로 이어졌다. 이발관은 세월의 흔적과 함께 길양이들의 안식처로 사람과 동물이 교감하는 장소였고 사진관은 젊은 사진가가 오래된 동네의 모습에서 영감받아 작품 활동을 하위 위해 만들었지만, 그 한편에서는 동네 주민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또 다른 사랑방이었다. 사람과 동물, 세대 간의 차이를 넘어선 소통의 장소 2곳은 태평동의 또 다른 명소였다. 

이렇게 태평동과 오야동에서 만난 풍경, 사람들은 과거 힘들었던 시대의 애환과 그 과정을 거쳐 마을과 도시를 일군 의지, 가난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까지 긍정의 에너지가 가득했다. 아울러 물질의 풍족함이 행복의 절대 조건이 아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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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이날은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날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조차하여 사용 중인 하얼빈에서 러일전쟁 이후 전후 처리 문제, 만주 철도 부설권과 같은 어려 현안들을 논의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만주 철도 부설권은 상당한 이권 사업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은 서구 열강들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그가 소지한 권총으로 3발을 총탄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명중시켰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안중근 의사는 아직 총알이 더 남아있었지만, 대한독립 만세를 러시아어로 외치며 그가 가지고 있는 권총을 러시아 헌병에 넘겨주고 순순히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을 통해 일본의 조선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규탄하고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다. 실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도 뤼순 감독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는 열정을 보였다. 일본은 재판이 길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서둘러 재판을 끝내고 안중근 의사의 사형을 집행했다. 1910년 3월 26일의 일이었다. 지금 하얼빈 역에는 당시 안중근 의사의 거사 장소를 표시하는 표식이 남아있어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그의 사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의 유품만이 전해질 뿐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단순히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가지는 위상과 영향력이 상당하기도 했고 그가 서양의 제국주의를 본떠 일본이 추구하던 군국주의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크게 보면 서양 열강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치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지만, 일본 정치인들이 명문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비교해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부친이 명문가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형편이 나아졌고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사상가인 요시다 쇼운의 문화로 들어가 수학하면서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요시다 쇼운은 막부시대 말기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개혁, 존왕양이를 주장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뤄 그들과 맞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과격한 방법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의 사상은 오랜 일본 정치 체제인 막부 체제 타도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의 모태가 됐다. 

그에게서 수학한 이토 히로부미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청년 시설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과 막부 체제 유지에 우호적 인사에 대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과격 인사로 자리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 양이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점점 그 신분을 높여나갔고 영국 유학을 통해 영어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면서 서구 열강의 앞선 기술과 그들의 힘을 현장에서 느꼈다.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된 5인의 젊은 영국 유학생들은 정상적인 경로가 아닌 밀항을 통해 영국에 입국해 영국의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그들의 문물을 익혔지만 일본에서는 선각자로서 지금도 추앙받고 있고 영화로도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영국에서 배운 건 앞선 문물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달콤함이었다. 어쩌면 영국에서의 경험은 존왕양이 사상에 제국주의 사상을 결합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그의 철학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보 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의 정치 체제가 천황 중심제로 변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정치권에서 그 힘을 키워갔고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히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정치 수완을 발휘해 최고 권력자로 자리했고 나아가 일본의 대한 제국에 대한 침략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표면적으로 일본이 대한 제국의 문명화를 이룰 때까지 한시적 보호국이 될 것임을 천명하였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을 위한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대한 제국을 위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치밀하게 병합을 진행했다. 대한제국 초대 통감으로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 이후 진행된 한일의정서 협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도 그의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왕실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마지막 왕위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영친왕의 일본행을 주도하고 그들을 일본과 동화시키는 작업 진행했다. 그는 영국이 이집트 지배 시 사용한 제국주의 경영 기법을 따라 대한 제국의 통치에 활용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해 일본만의 제국주의가 완성되었고 대한 제국에 실제 적용됐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 튼 일본 군국주의를 이끈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근거한 대동아 공영권 추구가 허구이고 주변국의 희생에 근거한 것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동양의 모든 나라가  하나가 되어 평화체제를 이루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었고 일본도 함께 손잡고 가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이나 동양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그만큼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들 중에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공감하는 이들이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 숭고한 뜻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안중근 의사 의거의 사상적으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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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영상으로 우리 동네를 탐방하는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찾은 3번째 동네는 서울 은평구 그중에서 북한산 바로 아래 자리한 불광, 녹번동이었다. 불광, 녹번동은 삭막한 서울에서 자연의 숨결을 가득 느낄 수 있는 북한산이 병풍처럼 동네를 감싸고 있고 한옥이나 역사 유적지는 없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추억 속의 장면들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오래전 지어진 단독 주택들과 다세대 주택들이 유독 많은 이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가 만난 동네 탐방의 첫 장소는 부자가 운영하는 대장간이었다. 이 대장간은 80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장간을 이어받아 운영하는 아들이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마트에 가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쇠로 만든 생활용품들이지만, 이 대장간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제품을 하나하나 만들고 있었다. 

길고 힘든 작업이지만, 여전히 이 대장간에서 만든 제품을 찾는 단골손님들이 있어 그들로 인해 이 대장간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우리 동네에 한편을 지키고 있었다. 제품마다 새겨진 "불광" 이라는 대장간의 낙인은 대장간을 지키는 부자의 자부심과 긍지, 그들의 노력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었다. 






대장간을 지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방앗간을 찾았다. 이 방앗간은 앞서 만난 대장간과 함께 수십 년을 이 동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손쉽게 떡을 사서 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이 동네 방앗간에는 떡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 김장철에서는 고추를 빠서 가져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과 손님들은 마치 가족과 같이 서로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동네의 사랑방 같은 이 방앗간을 주인의 수십 년 가정사와 함께 하는 또 다른 역사가 가득한 곳이었다. 

불광동에서의 발걸음은 우리나라 건축사에서 중요 건축가 중 한 명이고 이제 고인이 된 고 김수근의 마지막 작품 불광동 성당을 지났다. 불광동 성당은 우리나라 100대 건축물에 포함될 정도로 건축물이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동네 한 편에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을 지나 녹번동으로 향하는 길, 큰 표지석에는 녹번동의 원래 이름이 양천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곳은의주에서 천리, 부산에서 천리의 거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국토의 중심에 있었다. 양천리라는 이름도 그렇게 유래됐다고 한다. 지금은 녹번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녹번동은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곳이었다.

녹번동에는 서울 혁신파크라는 명소가 있다. 이곳은 과거 질병관리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질병관리본부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비게 된 공간을 지역민들을 위한 공원, 공공장소로 변화시켰다. 이곳에서는 도서관, 미술관, 동네 책방, 예술 활동을 위한 장소, 청년들 위한 열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은 소통의 장소로 시민들의 쉼터로 질병관리본부가 수행했던 공공적 성격의 일을 더 발전시켰다. 과거와 현대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서울혁신파크를 떠나 골목길로 접어든 발걸음을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중화음식점이었다. 방송에 나와 이름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으면 손님들에 소홀해질 수 있음을 걱정하는 노부부의 마음을 담은 중화 음식점은 면을 제면기로 직접 뽑아내고 짜장 소스를  그때그때 만들어 내는 등 짜장면 한 그릇에도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짜장면 하면 신속 배달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불광동의 중화 음식점은 음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 

짜장면의 구수한 냄새를 뒤로하고 찾은 녹번동의 또 다른 명소는 산골마을이었다. 얼핏 시골의 산골마을은 시골의 두메산골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 이 마을은 1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독특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마을 입구에는 각각의 집이 가지고 있는 이력과 특색을 살린 이름들을 표시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서울시에서 유일한 광산이고 산골이라는 한약재로 사용하는 광 물질을 생산하는 산골 광산에서 유래됐다. 서울 속 오지와 같은 곳이지만, 마을의 사람들의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산골마을에는 서울에서 얼마 안 남은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있고 그곳에서는 수십 년의 추억을 간직한 집을 지키는 할머니가 홀로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결혼 직후 한국전쟁 때 남편을 떠나보낸 할머니는 그곳에서 자녀들을 키우고 장성한 자녀들이 떠난 이후에도 불편함에도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할머니에게는 자신이 그 집에서 쌓아온 추억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연탄아궁이 집의 추억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산골마을에서 운영하는 극장이었다. 그 그 극장은 몇 개 안되는 좌석이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상영된 영화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이 극장은 이 마을의 유일한 30대 청년이고 운영하고 있었다. 이 극장은 재활용품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장을 구성하고 산골마을의 문화예술 공간이지 소통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 극장은 사장은 자신의 생업을 하면서도 마을 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함께 내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불광동, 녹번동의 사람들은 화려한 도시의 삶과는 다른 과거를 함께 간직하면서도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따뜻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의 편리함에 익숙한 도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이 동네에서는 이웃과 교류가 없는 도시의 삭막함을 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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