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부터 14일까지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극심한 국가적
혼란이 있었다.
대통령은 군과 경찰을 동원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군이 행정과 사법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즉, 대통령 권한의
무한 확장이었다.
헌법에서 계엄의 요건은 엄격하다.
전쟁 등 전시상황, 국가의 평온을
해치는 소요나 내란, 폭동 상황 등으로
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밝힌 계엄 선포의
이유는 황당 그 자체였다.
그의 정치적
입지 약화와 각종 비리와 의혹들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는 탄핵의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는 이를 해결할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지지율은
집권 후 최저점을 찍고 있었다.
12월 3일, 공포의 밤
12.12 군사반란의 재현
대통령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무모한 시도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야당과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북한에 동조하는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척결을 이유로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다.
이에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바로 대응했다.
계엄의 해제를 할 수 있는
헌법 기관은 국회뿐이었다.
헌법에는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할 경우, 대통령은 이를 즉시
해제해야 한다고 했다.
국회의 시간이 급박하게 흘러갔다.
온 국민들은 그 시각 방송과 SNS에서
나오는 실시간 국회 상황에 집중했다.
그 시각 국회에는 경찰이 출입을
막고, 군 특수부대가 헬기를 타고
등장했다. 무장한 군인들은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소식을 듣고 국회를 찾은
시민들과 국회의원 보좌관 등이
이에 맞섰다.
국회의원들은 출입이 막힌
국회로 들어가기 위해 담을
넘었다.
의원들이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모인 본 회의장으로 다수의
군인들이 향했다. 그 장면은
실시간으로 방송에서 중계됐다.
그 시각 국회는 의결 정족수를
채웠고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긴박했던 국회의
계엄해제 의결
하지만 국회도 국민들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이미 위헌, 불법 계엄을
자행한 대통령이 국회의 의결을
따를지도 알 수 없었고 국회에
침입한 군인들도 그대로 있었다.
계엄을 계속 진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국가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얼마 안 돼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하지만
위헌, 불법 계엄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경고성 계엄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2시간여의 계엄은
드디어 해제됐다.
이 계엄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일어났던
군사 반란을 연상하게 됐다.
당시 전두환은 1979년 10월 26일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김재규
안기부장에 의해 시해되어 서거한
10.26 사건 후 이 사건을 수사한
보안 사령관, 지금의 방첩 사령관이었다.
전두환은 수사 이상의 월권을 행사했고
지나친 정치적 성향과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10.26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종신으로 행사하는
유신시대가 끝나고 민주주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역사는 이를 서울의 봄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전두환의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았다.
전두환은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그들 휘하의 군부대를
동원했다. 심지어 전방을 지키는
사단도 동원됐다.
그들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전두환을 견제하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했다.
이유는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한 조사를 위함
있었지만,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수차례 관련 수사를 받았고
관련이 없음이 드러났다. 이는
전두환 역시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연행을
위해서는 당시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하고 있었던 최규하 총리의
재가가 필요했다.
신군부는 이를 위해
정승화 총장 연행과
재가를 동시에 진행하려
했다.
최규하 총리는 연행의
문제를 인지하고 즉시 재가를
하지 않았다. 신군부는 초조했다.
만약, 최규하 총리가 정승화 총장
연행을 불법으로 규정한다면
그들은 즉시 반란군이 되기 때문이다.
신군부는 사건 발생 후
숨어 있는 국방부 장관 확보에
주력했다.
그사이 신군부에 반격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태완 수도방위
사령관을 중심으로 신군부에
대항하는 군이 움직였다.
그들은 수에서 밀렸지만, 반란군
진압이라는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최규하 총리의 재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이 흐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국방장관을
확보했고 하나회 인맥을
총동원해 군의 움직임을 막았다.
이 반란군에 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장태완 수방 사령관 등이
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12월 12일 밤
신군부의 군사 반란은
그들 뜻대로 결과가 만들어졌다.
이후 전두환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위한 작업을
하나 둘 진행했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빌미로 군대를 동원해 신군부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해산했다.
아울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인들을 체포 구금하면서
민주화의 시계를 되돌렸다.
신군부의 계엄은 명백한
내란이었다. 이는 훗날
신군부 세력들을 단죄한
재판을 통해 대법원 판례로
남았다. 즉, 신군부의 12.12
군사 반란과 5.17 내란은
명백한 범죄였다.
그들의 행위는 불의하고
정당성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불의한 권력에 맞선
광주시민들에게 신군부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전두환의 5.17 내란
광주의 비극
신군부를 이를 광주사태로
부르며 폭동으로 규정했지만,
역사는 이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운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주의 되찾은 후 상당 기간이
흘러 그 명예를 회복했다.
물론, 아직도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하고 심지어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등의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세력들이 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희생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역사의 비극을 담았고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력으로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맞선
광주시민들의 희생의 역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피로 지켜진 민주주의가
2024년 12월 3일, AI 혁명,
4차 산업 혁명을 말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소통과
조화 융합을 말하고 현실이 되는
시점에 비상계엄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등장했다.
계엄의 조치를 말하는 포고령에는
평소 국민들이 누리고 있었던
기본권이 박탈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를 위반하는
이들을 체포, 구금하고 처단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과거 계엄에 따른 처벌은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과
폭력을 용인했다.
계엄군에 체포된 이들은 모처로
끌려가 무차별 폭력을 당하고
최소한의 인권마저 부정당했다.
처단해야 할 반국가세력은
계엄군에게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엄군의 입맛에 맞는
진술을 강요당하고 그 진술은
그들의 원하는 반국가세력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40여년이 흘러
재현된 민주주의 위기
불과 40여 년 전 일이다.
비상계엄을 통해 신군부가 집권한
1979년, 1980년 이후 다시
민주주의가 파괴될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정권이 곳 국가가 되고 그에 반하면
반국가세력이 되는 독재와
전체주의의 부활을 국민들은
경험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번 계엄은
위헌이고 불법이었다. 대통령이
밝힌 계엄의 내용은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일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됐다.
대통령은 계엄이 통치행위이고
대통령의 권한이라 했지만,
그 권한의 행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것이어야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검사 출신으로 검찰 총장까지
지내며 법과 정의,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됐던 그가
헌법과 법을 무시하는 형태를
보였다.
더 나아가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해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려
했다. 이는 명벡한 내란이었다.
국민들이 막아낸
내란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자행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를 위해 최정예 특수부대가
동원됐다.
북한을 포함해
외침을 막는 데 있어 최 일선에
서야 하는 부대가 위헌, 불법
계엄에 가담해 내란을 주도하는
반란군이 되고 말았다.
그 부대가 평소대로 작전을
전개했다면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국회 의결을 무시하고
계엄을 계속 강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들은
그들은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들은 당황하는 듯 보였다.
그들은 향하는 수많은 카메라와
스마트폰,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상황, 그들을 가로막는 이들이
평소 그들이 적으로 여기는
대상이 아닌, 비무장 시민들인
상황까지 계엄군들은 혼란스러웠다.
대통령은 반국가세력 척결을
계엄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계엄군들이 만난 건 일반
국민들이었다.
또한, 민주주의 시민으로 교육받았던
젊은 장교들과 군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맨몸으로 그들을
막아섰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국회는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온 국민이 뜬 눈으로 지켜봤던
불법 비상계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는 그렇게 정당성을 상실했다.
계엄의 해제
대통령은 국회 의결이 된 이후
몇 시간이 지나 마지못해
계엄의 해제를 발표했다.
그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없었고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했다.
국가의 국민을 배반한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는 그 스스로를
내란의 수괴, 내란은 주도한
범죄자가 되도록 했다.
국민들의 분노는 대통령의
즉각 퇴진, 탄핵의 여론으로
모아졌다.
국회 앞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모여들어 대통령 퇴진, 탄핵을
외쳤다.
국회는 빠르게 반응했다.
대통령 탄핵안이 만들어지고
탄핵 의결이 시도됐다.
탄핵안 의결이 진행되던
12월 7일 국회 앞은 수많은
국민들로 가득했다.
내란 수괴로 전락한 대통령이
여전히 그 권한을 유지하고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현실을
국민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언제든 비상계엄이 재현할 수
있다는 걱정과 대통령 책무를
저버린 자에 대한 분노가
국회 앞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는 2016년 12월 이맘때
대통령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비선 측근이 국정을
농단한 상황에 분노한 국민들의
탄핵 시위가 재현됐다.
유쾌하게 발전한
시위 문화
하지만 그때와 사위 양상은
크게 달랐다.
우선, 젊은 층의 참여가 크게
증가했다. 흔히, 20대와 30대는
정치 저관여층으로 분류됐다.
실제 그 세대는 각종 선거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
정치 현안에도 무관심하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은 낮은
취업률과 불균형한 부의 상황 속에서
있다.
현재 젊은 세대는 6.25 한국
전쟁 이후 부모 세대보다 더 빈곤한
세대이기도 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부동산 가격은
내 집 마련을 어렵게 하고
취업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좋은 직장은 점점 줄고 있고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그들은
정치에 냉소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극단주의에 빠져
들기도 했다.
이런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들의 비 사회성에 대해
무책임함을
걱정하기도 했다.
또한, 현실의 삶과 무관한
아이돌에 빠져있고 당장의
즐거움만을 찾는 소비지향적
세대라는 걱정도 더해졌다.
하지만 이번 내란 사태와
이어진 탄핵 집회에서
젊은 층들은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탄핵 집회의 주류를 이뤘다.
그들의 등장은 집회 문화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우선, 과거 탄핵 집회를 대표했던
촛불이 더 밝고 화려한 응원봉으로
변화했다.
집회 군중들은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나타났다.
아이돌 콘서트장에서
그들 공연에서 팬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아이돌 응원봉이
촛불을 대신했다.
그 응원봉은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고 더 밝게
밤 하늘을 밝혔다.
국민들은 더는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상항을 원하지 않았다.
그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
대통령이 즉시 퇴진을 원했다.
그가 퇴진하지 않는다면
헌법에 보장된 탄핵 절차를
통해 그것이 이루어지길 원했다.
국민의 열망 투영된
탄핵 집회, 그리고 탄핵
국회는 당연히 이 국민의 뜻을
이행해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속한 여당은 그에 따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대통령의 탄핵과
헌법재판소에서의 파면
결정이 명백한 상황에서
당장의 권력이 사라지는
상황과 이어질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 등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중했다.
12월 7일 대다수 국민들의
열망에도 국회는 대통령 탄핵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헌법에는 대통령의 탄핵은
재적 의원 중 최소 200표 이상이
나와야 가능하다.
현 국회의 여야 비율을 고려하면
여당에서 최소 8명이 이상의 찬성표를
던져야 탄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여당에서도 이에 공감하는
이들이 있었다. 무기명 투표인
탄핵안 표결이 이루어진다면
가결 가능성이 컸다.
여기서 여당은 투표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탄핵한 표결 자체를 막았다.
국민들의 강한 외침을 그들은
외면했다.
여당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여당에 대한 비판 여론은 엄청났다.
여당은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하며
대통령의 선의에 의한 퇴진을
전제로 한 수습책을 내놓았지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여전히 내란의 수괴가 된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인 현실에서
언제든 계엄은 재현될 수 있었다.
비록, 군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이미 권력의 정당성을 상실한 대통령인
만큼 실제 위험 상황이 닥칠 때 그가
군 통수권자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에 대한 의문은 국내는 물론이고
우방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한미 동맹을 강조하면서 한국 국민들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최고 우방국 역시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거뒀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은 전혀
상황인식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담화를 통해 계엄의 정당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경고성 게임이라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담화는 그가 얼마나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가짜 뉴스와 저질 선동을
일삼는 극우 유튜브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한 우려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스스로 그가 극우
유튜브의 세계에 빠져있음을
실토했다.
자신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대통령은 전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국가의 통합과 국민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고 누구보다 균형 잡힌
사고를 해야 할 대통령이 극우적
사고에 매몰된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그의 고백 아닌 고백은 그를 더는
대통령 자리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더 크게 했다.
위기속에서 다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12월 14일, 2번째 탄핵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이번에는 가결돼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은 국회로 그리고
각 지역의 광장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여당도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여당도 투표 참여를 결정했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 통과는
낙관할 수 없었다. 직접
탄핵 찬성을 발표한 여당 의원은
가결에 필요한 200표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14일 오후 4시
탄핵안 투표가 시작됐다.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개표가 이루어졌다.
204표, 탄핵안 가결에 필요한
200표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탄핵안이 가결됐다.
12월 3일 밤부터 계속된
계엄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마침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적 불안전성이 극복될
계기가 마련됐다.
이제 국민들은 일상의 회복을
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내란과 관련한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내란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는 필수적이다. 내란은
민주주의 가치를 흔드는 일로
자비와 관용은 접어둬야 한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은 또 다른
내란을 방지하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란 세력들은
그 실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위험의 가능성은 줄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
다시 담화를 발표하며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극우 세력들의 결집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란 수괴가 된 대통령은
아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아직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 12.3 내란 사태는
일상의 공기와 같았던
민주주의가 언제든 파괴될 수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자양분이다. 국민들은 그 효능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정치 역시 국민이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탄핵 집회에서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열망을
더 발전된 방식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집회를 축제로
하나의 콘서트장의
모습으로 즐겁게 승화했다.
마치 K 팝 콘서트장을 방불케하는
탄핵 집회의 모습은 한국만의
민주주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세대 통합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지만,
국민은 이를 거부하고 행동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여겼던 젊은 층도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그 여정에
동참했다.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나이와 성별
지역은 없었고 하나였다.
국민들은 제2의 12.12가
재현되는 역사의 퇴행을
원치 않았고 이를 막았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서울의 봄을 유지토록 했다.
정치권은 이런 국민들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그에 반하는 세력들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과연 역사는 2024년 12월을
어떻게 기록할지 분명한 건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소중한 시간이 될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진, 글 : 지후니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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