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1919년 3월 1일은 일제의 불의한 통치에 저항한 민주주의 시민운동인 3.1 운동이 있었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 바탕이 된 3.1 운동의 정신은 광복 후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 혁명으로 이어졌다. 4.19 혁명은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린 성공한 시민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4.19 혁명은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직접적인 원인인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자행한 3.15 부정선거였다. 그 선거는 광복 후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 광범위한 금권, 관권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투표 당일에는 투표함에 자유당 후보의 표를 미리 넣어주거나  사망자를 투표자로 등재하는 등의 선거인 명부 조작, 사실상 공개 투표나 다름없는 3인 또는 5인 1조 투표, 여기에 정치 깡패 등을 동원한 유권자들에 대한 협박 등의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60년 3월 15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이것만으로도 안심이 안됐던 자유당 정권은 개표 과정에서도 투표함을 바꿔치거나 야당의 투표용지를 일부러 훼손해 무효표로 만드는 일도 했다. 야당 후보의 표를 여당 후보의 표로 둔갑시키는 일도 있었다. 선거와 개표와 관련해 이에 항의하는 야당 선거관리위원을 강제로 끌어내기도 했다. 이미 결과가 정해진 선거였다. 이런 부정 선거는 개표 과정에서 개표된 표가 투표자 보다 더 많아지거나 여당 지지표가 투표자 수보다 많아지는 등의 어이없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런 부정선거는 선거가 당일 전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특히, 마산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3.15 의거, 마산의거 등으로 불리는 3.15 민주화운동은 당시 경찰의 시민들에 대한 발포로 수많은 이들이 사망하고 다치는 유혈 참사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입학 예정이었던 김주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주열의 시신은 경찰에 의해 유기되어 마산 앞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 그의 가족들이 김주열을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접한 마산 시민들이 모두 나서 그를 찾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머리를 관통한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이는 무력 진압으로 잠시 주춤했던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를 다시 불타오르게 했다. 김주열의 시신과 그와 관련한 기사가 용기있는 지역 언론사의 보도를 기점으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여론은 불의한 정권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시민혁명으로 발전했다. 4.19 혁명의 시작이었다.

 

 

3.15 부정선거 보도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린 4.19 혁명


4.19 혁명은 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이후 대학생을 포함해 시민들의 참여가 이어졌고 당시 최고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교수들도 이에 동참했다. 이런 시위에 자유당 정권은 경찰 등 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대에 발포를 하는 등 유혈 진압으로 국민적 공분을 일어나게 했다. 심지어 정치 깡패들을 동원해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정의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을 무력으로 꺾을 수는 없었다.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했지만, 군마저 사실상 정권에 등을 돌렸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국마저 시민혁명을 지지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대통력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오른 이후 수차례 헌법을 개정하는 등 종신집권을 꿈꿨던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타국에서 말련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4.19 혁명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최초로 시민들의 힘으로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도 있었지만, 그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결국, 4.19 혁명은 일제의 국권 강탈과 무단 통치에 항거한 3.1 운동의 정신을 광복 후 계승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4.19 혁명과 관련해 그 기점을 3.15 부정선거보다 앞서 보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의 중심에는 2.28 민주운동이 있다. 2.28 민주운동은 대구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15 대통령, 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자유당 정권의 관권 선거에 저항한 시민운동이었다. 

 

 

반응형

 




1960년 2월 28일, 광복 이후 최초의 민주의거 


2.28 민주운동은 당시 여당과 야당의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대구가 중요 장소였다. 당시 2월 28일, 대구에서는 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선거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만 남게 됐다. 그전 1956년, 신익희에 이어 또다시 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 운동 기간 사망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당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동시 선거를 통해 각각 선출했다. 지금 미국의 러닝메이트 개념이 아니었다.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 장면이 선출됐다. 1960년 선거에도 장면은 다시 야당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이미 민심이 자유당 정권을 떠난 상황에서 장면 후보에 대한 지지도 뜨거웠다. 

자유당 정권은 이미 80세가 넘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재임 기간 유고 사태 발생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상황에서 자유당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에 부통령 선거전은 한층 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정권 차원의 금권, 관권 동원도 극심했다. 이는 야당 선거운동에 대한 노골적 방해로 이어졌다. 

2월 28일, 야당의 대구 유세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고등학생들의 유세 참여를 막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모의시험과 각장 학교 행사 등을 이유로 학생들을 등교토록 했다. 야당의 유세에 많은 군중이 몰리고 이슈화되는 일을 사전에 막으려는 조치였다.

이에 대구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인 이런 처사에 강력히 반발했고 등교를 거부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그 전날 각 학교의 학생부 임원들에 의해 사전 계획됐다. 그들의 주도로 대구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을 강력히 규탄했고 교문을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그 수는 12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은 비록 투표권을 없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고 그들의 시위는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컸다. 이에 경찰들은 폭력적으로 학생들은 진압하고 시위 가담자 중 120여명을 체포 구금했다. 이런 경찰의 대처에 시민들은 학생들은 구타하는 경찰을 뜯어말리고 학생들에 큰 성원을 보냈다. 자유당 정권은 이에 더해 학생들이 북한의 이용당하고 있다는 식의 종복몰이까지 하는 등 비상식적 행태를 보였다. 이는 지역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시위 가담자 대부분을 석방해야 했다. 

 

 

4.19혁명 당시 집회 사진

 



4.19 혁명의 시작점,  2.29 민주의거 


2.28 민주운동은 각 언론사들을 통해 전국으로 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광복 후 불의한 정권에 조직적으로 항거한 첫 시위였기 때문이었다. 2.28 민주운동은 이후 비슷한 일로 대전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정권에 항거하며 시위를 벌인 3.8 민주의거로 이어졌다.

이런 국민들의 항거는 점점 큰 혁명의 에너지를 축적하게 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은 그들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의지를 힘으로 억누르기만 했고 관련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분노는 응축됐고 정권을 붕괴시키는 거대한 폭풍을 만들었다.

4.19 혁명은 그 점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닌, 국민들의 민주주의 대한 의지가 모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3.1 운동이 국. 내외 독립운동과 환경 변화, 변하지 않았던 독립의지 등이 결합된 결과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2.28 민주운동을 스쳐가는 사건이라 할 수 없는 이유다. 이에 2.28 민주운동은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이처럼 정의를 위한 선한 의지는 그 시점에서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 해도 훗날 큰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나비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비효과는 시대를 넘어 계속될 수 있다. 1919년 3월 1일의 국민적 에너지가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