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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전투이자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한 노량해전, 이 노량해전을 다른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서울의 봄'에 이어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로 흥행을 지속하고 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 12 군사반란이라는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배경으로 이를 기점으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과 이를 막으로 마지막까지 분투했던 이들의 대결을 스토리로 하고 있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조선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전쟁,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쟁은 조선에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국가 운영 시스템도 붕괴됐다. 조선 왕조의 존립 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었다. 조선 왕조는 유지됐지만, 공고했던 신분 질서에 균열이 발생했고 사회 각 분야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그렇게 조선은 전기를 지나 후기로 접어들었다. 

그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이 노량해전이었다. 전투는 1598년 12월 16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있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함께 한 조. 명 연합 함대는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과 하동군 사이에 자리한 노량해협과 남해 관음포 일대에서 일본 수군과 격돌했다.

해전에 임하는 일본 수군의 목표는 당시 순천 왜성에 고립되어 있던 왜장 고니시를 구출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사천 왜성을 수비하는 시마즈를 포함해 남해에 주둔해있던 고니시의 사위 요시토시 외에 경남 해안 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대거 포함됐다. 가용 함대를 모두 동원한 일본 수군의 규모는 500여 척에 이르렀다. 여러 기록들이 있지만, 조. 명 연합 함대 역시 그에 상응하는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당시  그 바다에는 천여 척의 함대가 뒤엉켜 격돌했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 기간 이순신의 수군이 수많은 전투를 했지만, 그중 최대 규모의 해전이라 할 수 있었다. 

 

 

사로 병진책 - 위키백과




임진왜란의 끝자락, 노량해전 


이런 대규모 해전은 당시 임진왜란의 전개와 관련이 있다. 1592년 토요토미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으로 시작한 임진왜란은 초반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 분위기였지만, 육지에서는 의병들이, 바다에서 이순신이, 명나라 참전 등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호남을 제외한 조선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해 가던 일본군은 보급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겨울 추위, 조. 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남쪽으로 밀려갔다. 그 사이 조선을 배제한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이 시작됐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간 주둔했다. 그 사이 강화협상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협상을 주도한 일본의 장수 고니시와 명나라 관리 심유경이 양국 조정을 속이고 협상을 타결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했다. 강화 협상의 실패와 함께 1597년 8월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이 다시 일어났다. 임진왜란의 연장이었지만,  역사는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조선에는 큰 위기였지만, 이 시기 이순신은 전장에 없었다. 일본의 교묘한 이간책에 말려든 조선 임금 선조와 임금은 큰 전쟁을 앞두고 이순신은 파직하고 원균을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표면상 이유는 이순신이 임금의 거듭된 출전 명령을 거부한 항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상은 거듭된 승전으로 높아진 이순신의 위상, 지역 백성들의 지지 등으로 위협을 느낀 선조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는 큰 전쟁을 앞둔 시점에 큰 패착이 됐다.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대규모 함대를 지휘한 경험이 없었고 군사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일설에는 밤마다 여흥을 즐기는 등 역할에 소홀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전장을 보는 눈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균 역시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조정의 무리한 출전 명령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듭된 조정의 출전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부산으로 먼 원정길에 나섰다. 조선 수군은 원 거리 이동에 지쳤고 일본군의 거듭된 기습에 시달렸다. 조선 수군은 본영인 한산도로 철군을 결정했지만,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며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순신이 긴 세월 만들었던 무패의 조선 수군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적인  패배였다. 만약, 이 패전이 없었다면 정유재란 전개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노량해전도 - 구글지도 참조




임진왜란의 영웅에서 역적으로 그리고 다시 복권된 이순신 


조선 임금 선조와 조정은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한 원균을 대신해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새롭게 부임한 수군에서 함선은 12척에 불과했다. 숙련한 수군 병사들도 대부분 전사했다. 이순신은 새롭게 수군을 재건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칠천량 전투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했고 해상 보급이 한층 수월해졌다. 또한, 장악하지 못했던 호남 지역 공략에 적극 나섰고 수월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육상 보급 또한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본군은 영남과 호남을 장악했고 약탈과 노략질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수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거나 약탈됐다. 또한, 많은 조선인들이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거나 일본과 교역하던 서양의 노예상들에게 팔려갔다. 일 년여의 정유재란이었지만, 일본군의 잔혹한 전쟁 범죄로 인해 그 피해는 이전보다 훨씬 더 컸고 깊었다. 

이 상황 속에서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시행하려 했지만, 이순신에 막혀 하지 못했던 육군과 수군의 병진 작전까지 시행된다면 전쟁 양상은 조선에 걷잡을 수 없이 불리해질 수 있었다. 만약, 조선 수군이 남해안을 돌아 서해바다를 통해 수도 한양을 공격해 온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런 일본군의 전략을 알고 있었고 조선 조정의 수군 포기 권유에도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군 재건에 온 힘을 다했다. 

1597년 10월 26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한지 2 달여 만에 조선 수군은 일본의 대규모 함대와 맞서야 했다. 이제 수군을 훈련시키고 함선은 한 척 더 추가했을 뿐이었지만, 이순신은 해남과 진도 사이를 흐르는 해협은 울돌목에서 수백 척의 일본 함대와 정면으로 맞섰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지역의 해류 흐름과 지형 등을 적절히 활용한 전략과 전술로 일본 수군에 대승을 거뒀다.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함대에 승리한 명량해전이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을 다시 좌절시켰고 남해안, 최소 호남 일대의 바다 재해권을 다시 장악했다. 이는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일본군의 기세도 꺾이게 했다. 일본군은 지금의 천안인 직산까지 북진했지만, 직산 전투에서 패한 이후 진격에 주춤했고 명량해전의 패전 소식으로 이전처럼 해상 보급의 차질 우려로 진격에 제한을 받았다. 이에 일본군은 왜성을 쌓았던 남해안 일대로 후퇴했고 전쟁은 조. 명 연합군이 왜성에 은거한 일본군에 공세를 취하는 양상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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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승리로 반전된 정유재란의 전세 


일본군은 순천 왜성과 사천 왜성, 울산 왜성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전개했다. 이에 조. 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남쪽으로 밀어내는 한편, 사로 병진책을 육군과 수군이 함께 일본군을 압박해 순천, 사천, 울산 등지의 일본군을 포위 섬멸하고자 했다. 그 사이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조선에서의 철군이 결정됐다. 하지만 조. 명 연합군의 거센 공세 속에 일본군의 철군도 원활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거듭된 공성전에서 승리하며 버티기는 했지만, 철군이 늦어지면 고사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토요토미 사후 일본 내 권력 투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전쟁에 참전했던 영주들은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는 도쿠가와의 모습에 초조함이 더해졌다. 이 중 순천에 은거하고 있었던 고니시는 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규슈 구마모토 일대의 패권을 나눠 가지고 있었던 정적 가토가 먼저 철군한 상황이었다. 가토는 1, 2차 울산성 전투에서 조. 명 연합군의 거센 공세를 거듭 막아내는 전공도 있었다. 1차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의 일본군은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말을 죽여 그 피로 식수나 식량을 대신했다는 기록도 있다. 가토 역시 암울한 상황 속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 일본군의 구원 등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밖에 사천성의 시마즈도 조. 명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를 버텨냈고 경남 일대의 일본군은 왜성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전개 중이었다. 하지만 고니시는 육지에서는 조. 명 연합군에서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수군에 막혀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경남 해안 일대에 있던 일본군이 철군을 하는 와중에도 고니시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철군을 위해 바다로 나가야 했지만, 이순신의 수군을 뚫을 수 없었다. 

이순신 역시 고니시를 곱게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다. 고니시는 임진왜란 전 전쟁을 막으려 노력하기도 했고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나서 가토와 함께 더 많은 전공을 쌓기 위해 경쟁했다. 당대 조선 최고 명장인 신립도 고니시의 일본군에 대패했다. 고니시의 일본군은 수도 한양과 평양을 잇따라 점령하게 개전 초기 큰 존재감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으로서는 악명 높았던 가토와 함께 고니시는 가장 큰 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를 잡아 징벌할 수 있다면 전쟁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이순신으로서도 7년 전쟁 기간 조선의 영토를 유린했던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섬멸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는 당시 많은 조선인들의 정서이기도 했다. 일본군에 의해 자신의 가족들이 희생과 삶의 터전이 무너진 조선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당연한 일이었다.

 

 

국립중앙박물과 소장 - 명라나 작품 사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조선 백성과 이순신의 침략자에 대한 원한이 함축된 노량해전 


이순신 역시 자시의 막대 아들을 일본군의 보복 공격에 잃은 아픔이 있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고문을 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는 상황 속에서 아들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순신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백의종군 길에 오르는 과정에 그 소식을 들었다. 전쟁 중에 이순신은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이는 이순신에게는 평생의 한이었다. 그가 임진왜란 기간 작성한 난중일기에도 슬픔의 감정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렇게 전쟁 과정에서 이순신은 가족의 비극이 함께 했고 개인적으로도 일본군에 대한 원한이 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백성들의 민심을 현장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그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량해전의 준비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우선, 연합 작전을 펼쳐야 할 명나라군이 미온적이었다. 명나라군은 사로병진 작전을 주도하긴 했지만, 일본군의 철군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남의 나라 전투에 더 이상의 희생을 치르는 게 부담이기도 했다. 명나라군의 목적은 엄연히 조선 땅에 침범한 일본군을 밀어내는 것이지 섬멸은 아니었다. 이는 조선과는 전쟁에 대한 큰 인식 차였다.

노량해전 전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육전에서 고니시를 압박하던 명나라 장군 유정은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공격에 적극 나서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조명 연합 함대를 지휘하던 명나라 장군 진린 역시 전투에 미온적이었다. 심지어 뇌물을 받고 고니시와 경남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는 일본과의 소통을 위한 연락선 통과를 묵인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동. 서 양면에서 조. 명 연합 함대를 함께 공격하는 포위 작전을 계획할 수 있었다. 

훗날 진린이 이순신을 크게 존경하고 따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가 명나라 장수라는 점은 다르지 않았다. 조명 연합군 구성 초기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공을 진린에서 양보하고 후하게 그를 대접하는 등의 유화책으로 그의 마음을 얻었다고 했지만, 진린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전공을 자신에서 넘길 것을 강요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은 조정에 보내는 장계를 통해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고 전투에 소극적인 진린의 태도에 불만을 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과 진린의 인간적인 우애와 관련한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후세 사람들에 의해 전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명나라 군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꾸는 등 큰 역할을 했지만, 일본군 못지않게 조선 내에서 노략질을 자행하고 사대를 받는 나라의 원군이라는 점을 이용해 일종의 갑질을 일삼았다. 조선이 원하지 않는 강화협상을 한 것이 좋은 예다. 

 

 

영화포스터

 




이순신과 조. 명 연합함대 그리고 진린


이순신으로서는 이런 명나라군을 설득해 전투에 함께 하도록 하는 것부터 큰 난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진린은 전투에 함께 했고 명나라 수군 역시 치열하게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당시 전쟁 상황이 수많은 배들이 뒤엉킨 혼전이었다 해도 명나라 군의 적극 참전은 이순신과 진린 등 명나라 군과의 유대관계가 일정 형성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진린은 탐욕스러운 면모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지만, 그의 부대는 명나라에서는 정예 부대였다. 진린은 이순신으로부터 전공을 양보 받기도 했고 전투 중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순신과 함께 하며 그의 참 군인의 면모를 지켜봤을 것이고 군인 이전에 백성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달리 함께 군대를 통솔했던 그로서는 이순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 노량해전에 참전한 건 인간적인 유대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이순신은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한 일본군이 노량해협을 통해 진출할 것을 예견하고 그 길목에서 선제 타격을 하기로 했다. 일본 수군에 포위될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는 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군에 대한 기만책으로 조선 수군이 순천의 고니시를 선제공격하는 위장 작전을 하기도 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니시는 산을 불태우며 일본군에게 다급하게 구조 메시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급해진 일본 수군은 노량해협으로 급하게 진출했고 조. 명 연합군의 공세에 쉽게 요격당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고니시를 구출해 철군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맞섰고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일본군은 정체된 노량해협을 돌파하긴 했지만, 조. 명 연합 함대 주력군을 만나게 됐고 거듭 격파당했다. 결국, 일본 수군은 후퇴를 하려 했지만, 관음포에 고립되는 처지가 됐다. 이후 조. 명 연합군은 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이순신은 이전과 달라 함선의 파괴와 병사들의 위험보다는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섬멸하는 총력전을 선택했고 자제했던 근접전과 육박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조선과 명나라 장수들과 병사들도 희생도 있었다. 그 안에 이순신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진 전투 과정에서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전투의 승리만을 생각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함선 대부분을 격침하고 나포하는 대승을 거뒀다. 온전히 돌아간 일본 함선의 수는 50여 척에 불과했다. 이 전투 와중에 순천 왜성의 고니시는 전장을 우회해 탈출에 성공했다. 이는 애초 그들의 작전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고 고니시는 비겁자로 일본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고니시 초상화

 




임진왜란 후 엇갈린 운명 맞이한 침략의 선봉장, 고니시와 가토


이후 고니시는 토요토미의 가신들과 그에 반대하는 도쿠가와 세력들과의 내전에서 패하며 처형되고 가문이 멸문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영지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한 가토가 차지했다. 가토는 지금도 일본의 중요한 역사 유적인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고 규슈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로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씁쓸한 현실이다. 가토는 구마모토 성 축조에 있어 과거 울산성 전투의 경험을 더해 성내 다수의 우물을 파고 공성전이 장기간 이어질 때를 대비해 다다미를 비상식량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만큼 가토에게 울산성 전투는 평생에 남는 기억이었다.

이렇게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이 마지막 전투이기도 했고 그 여파가 일본 역사에서 파급력을 가지는 전투이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 중 가장 큰 승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영웅적인 최후로 인해 그 승전의 역사가 다소 가려진 측면도 있다. 향후 노량해전의 성과에 대해 보다 세밀한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으로 이순신의 끝없는 나라 사랑이 집약된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그는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고 대역죄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정신적으로 유체적으로 피로가 극한에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일본군에 대한 원한과 함께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불합리한 정치 상황과 전쟁 중에도 권력 투쟁을 일삼는 조정의 난맥상,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 입지를 우선하는 임금 선조에 대한 개인적 원망과 원한도 함께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전쟁 후 자신의 입지에 대한 걱정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그로서는 전쟁 후 토사구팽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물론이고 가족들 자신과 함께 한 장수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량해전에 임하기 전 그는 여러 복잡한 마음이 생길 수 있었다.

 

 

영화 포스터

 




승전의 역사로 함께 기억돼야 할 노량해전


이순신은 명나라 군을 핑계로 무리한 전투를 피할 수도 있었다. 진린과의 호의적 관계를 이용해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조선 조정에 대항해 군사 행동에 나서는 것도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전투에만 집중했다. 그는 천상 군인이었고 정치질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마음 한편으로 접어넣었다.

노량해전과 관련해 이순신의 자살설, 암살설, 은둔설 등의 주장도 있지만,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고 치열한 전투에서 가장 앞서 싸웠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역시 탈출을 위한 절실함으로 전투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이순신은 장렬히 전사했다. 여러 설들은 이순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이순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영웅으로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의 이야기가 드라마나 영화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건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과 그의 진심이 지금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 점에서 노량해전은 그의 장렬한 최후를 대표하는 전투이기도 하지만, 빛나는 승전의 기록으로 함께 기억돼야 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 역시 죽음이라는 키워드에 승전이 가려져서는 안된다. 



사진 : 위키백과 / 영화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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