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서 중앙아시아와 몽골 지역에 자리한 유목을 주로 하는 북방 민족들은 항상 큰 위협이었다. 중국에서 북방민족은 잔혹한 침략자였고 야만인들이었다. 실제 고대 중국 역사에서부터 북방 민족들은 끊임없이 중국을 침략해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해 만리 장성의 대 역사를 시작했고 왕조가 수차례 바뀌는 상황에서 그 사업은 지속됐다. 지금 만리 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이다. 자신들은 세상의 중심이라 할 정도로 자존감이 강했던 중국이었지만, 북방민족은 늘 두려운 상대였다. 북방민족을 야만인을 뜻하는 오랑캐로 칭한 건 그들에 대한 비하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북방 민족들은 중요한 대결 상대였다.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성장 과정에서 북방민족과 치열한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그 대결의 역사는 고구려를 계승해 건국된 발해로 이어졌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강국으로 부상한 거란과 대결해야 했고 3차례 큰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했던 몽골민족과 수 십 년의 전쟁을 치렀다.
조선도 건국 초기 북방 영토를 확장하고 개척하는 과정에서 여진족과의 무력 충돌이 불가피했다. 조선 후기에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 후금, 청나라와 전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서 북방 민족들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전쟁의 역사가 많았던 탓인지 우리 역사 기록에서도 북방 민족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중국과의 사대 관계가 중요한 외교 노선이었던 조선에서는 북방 민족은 오랑캐였던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중국사의 중요한 부분 차지하는 북방 민족
하지만 북방 민족들은 중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북방 민족들은 중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 내에서 나라를 건국하는 등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었던 위나라와 촉나라, 오나라가 대립하던 삼국시대를 지나 중국은 서진이 건국됐지만, 그 역사가 길지 못했다.
서진이 몰락한 이후 중국의 중심지역이었던 화북 지역에 다수의 북방 민족이 침략해 많은 나라들이 건국되어 대결하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다. 그 시대 화북지역은 북방 민족과 한족들이 세운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한족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한족들은 중국 남부 지역으로 밀려나 왕조를 이어갔다.
이 시기를 중국 역사에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라 한다. 220년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 중 한 명인 조조가 기초한 위나라의 건국 때부터 589년 수나라에 의해 중국의 통일될 때까지를 지칭하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단명하는 나라가 속출했다.
그리고 이런 분열기 속에서 북방 민족들은 중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혼란기를 통일한 수나라의 창업 군주 양견은 북방 민족인 선비족 출신이었고 단명한 수나라 이후 등장한 당나라의 시조 이연 역시 선비족 출신이었다. 북방 민족 상당수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동화되는 현상도 있었지만, 북방 민족의 전통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북방 민족을 따라 떼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중국은 한족이 세운 나라 송나라가 있었지만, 몽골 제국이 세운 원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명나라가 원나라를 밀어낸 이후에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북방민족의 역사는 계속됐다. 청나라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고 지금의 중국 영토를 확정한 나라이기도 하다. 즉, 북방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북방민족의 역사에서 주목할 민족이 있다. 최근 대하드라마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거란이다. 거란은 5세기부터 1125년까지 존재했던 유목 민족이다. 거란의 어원은 지금은 사라진 거란어인 키탄에서 근거한다. 이 말은 칼날, 칼이라는 의미가 있다. 거란족은 우리 말로 풀이하면 칼의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거란이라는 말은 이후 북중국을 뜻하는 키타이로 서양에 알려졌고 그 말이 변형된 캐세이는 중국을 가리키는 고어로 존재한다. 이 이름을 있는 홍콩의 항공사도 있다.
삼국시대 부터 우리 민족 역사에 등장하는 거란
이는 거란의 존재감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거란은 고구려 역사에서부터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에 거란이 고구려를 침략해 여러 부락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가 거란을 공격해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와 거란이 지속적으로 군사적 대립을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강성한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거란은 발해 건국과도 관련이 있다. 668년 고구려가 나. 당 연합군에 멸망한 이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인 당나라에 의해 강제로 중국 영토로 이주해 살았다. 그 지역에는 다수의 거란족과 말갈족도 있었다.
696년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당나라 관리의 폭정에 반발해 거란족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혼란한 틈을 타 고구려 유민과 그들과 뜻을 함께 하는 말갈족들이 당나라 영토를 벗어나 만주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당나라는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 세력에 대한 토벌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지만, 대조영이 중심이 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연합 세력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에 승리하며 건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마침 그 전투에서 당나라 군의 사령관은 거란족 출신의 이해고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 인근에 새 나라를 세웠다. 발해 역사의 시작이다.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동 지역의 패권을 놓고 대결했고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다. 발해는 건국 초기 당나라 영토를 수군을 통해 기습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강하게 대립했지만, 당나라가 발해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화책을 펼치면서 관계가 개선됐고 활발한 교류를 했다. 그 속에서 발해는 동북아시의 강국으로 문화와 예술까지 융성하는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거란에 허무하게 멸망한 발해
하지만 발해는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며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멸망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란에 공세적이었던 발해의 허무한 몰락에 대해 여러 의문이 존재하기도 한다. 백두산 대폭발설이 중요한 원인으로 주장되기도 했지만, 그 시기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대체적인 시각은 당시 발해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고 그 틈에 거란이 기습 공격으로 발해 수도를 함락해 멸망에 이르렀다는 설이 우세하다. 이후 발해 유민들이 지속적으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점령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당시 거란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거란은 916년 야율야보기라는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각 부족의 통합을 이루고 국가 형태를 갖췄다. 유목 민족인 그들의 특성상 거란은 기마 병력이 매우 강했고 빠른 기동력이 있었다. 이는 전쟁 수행에 있어 큰 장점이었다. 이후 거란은 요동지역을 놓고 대립하던 발해를 멸망시킨 데 이어 당나라 멸망 후 지속된 5대 10국의 혼란기를 통일한 송나라를 압박했다.
이미 거란은 5대 10국의 혼란기 속에 만리장성 넘어 중국 영토인 연운 16주를 장악한 상황이었다. 송나라는 건국 후 이 지역의 탈환을 지도했고 거란과의 영토 분쟁은 불가피했다.
이런 송나라의 대결 한편에서 거란은 그들 배후에 있는 고려를 주목했다. 거란은 건국 후 고려와의 국교 정상화를 시도했다. 마침 거란의 건국과 고려의 건국은 그 시기가 대체로 일치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부 안정이 중요한 양국의 이해는 평화관계로 연결될 여지도 있었지만, 고려는 생각이 달랐다.
고려 건국부터 적대관계에 있었던 거란
936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942년 거란은 사신단을 파견했고 낙타 50마리를 고려 태조 왕건에서 예물로 선물했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 사진을 유배 보내고 낙타들을 사람들과 왕래가 많은 만부교 아래 묶어 놓고 굶어죽도록 했다. 만부교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고려와 거란의 적대 관계를 더 심화시켰다.
고려는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어 북쪽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려 북방 영토 개척을 위해 소중한 인적 자원이었고 아울러 고려 왕실의 중요한 우호세력이었다. 아직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한 상황에서 고려는 발해 유민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에 대한 강경책은 정치적 고려가 있는 일이었다.
이런 고려에 대해 거란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대결이 더 시급했다. 거란은 송나라와 전면전에 들어갔고 대승을 거뒀다. 1004년 거란은 송나라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전연의 맹'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거란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내용이었다. 송나라는 거란에 사대를 하고 막대한 조공물을 매년 거란에 보내야 했다. 이는 거란의 국력을 한층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이를 통해 거란은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 됐다.
하지만 거란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거란은 만리 장성을 넘어 중국 본토 공략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거란은 고려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했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우호적 관계에 있는 고려와 송의 군사 동맹을 우려했고 그 관계를 단절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고려를 굴복시키는 게 필요했다. 이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이어진 고려 거란 전쟁으로 이어졌다.
송나라를 굴복 시킨 거란의 고려 침공
거란의 위협의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고려는 초창기 그 대비가 미흡했다. 대 거란 강경노선은 건국부터 지속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군사적 대비가 부족했다. 30만의 광군을 조직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지만, 광군은 정규군이 아닌 예비군의 성격으로 전투력이 강하지 않았다. 또한, 고려는 당시 거란의 위상과 군사력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을 당시 고려는 대응에 있어 큰 혼선이 있었다.
첫 전투 패전 이후 고려에서는 항복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거란 원하는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할지론이 강하게 논의됐고 당시 고려 왕 성종도 이에 동의했다. 고려는 건국 후 대규모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었고 이는 거란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했다. 중국의 송나라마저 거란에 사대를 하는 상황에서 고려가 그들과 맞서는 건 무모한 일로 보였다.
하지만 고려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항전파 대신 서희는 거란의 침공 의도를 읽었고 협상을 통해 강동 6주의 지배권을 얻었다. 대신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거란은 이를 통해 고려의 위협을 제거하는 성과가 있었고 고려는 숙원이었던 북방의 영토를 개척할 수 있게 됐다.
이후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인 강동 6주 일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곳곳에 축성을 하는 등 요새화 작업을 지속했다. 고려는 거란의 위협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들과 일선에서 맞설 강동 6주를 포함한 서북면 일대의 군사력을 확충했다. 그 한편으로 송나라와의 비공식 관계를 지속하며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전개했다.
이는 거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완벽하게 굴복하지 않는 고려에 대한 완전한 정벌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는 그들의 제후국이었고 그들의 책봉을 받은 왕이 있는 나라를 침략한다는 건 명분이 없었다.
이런 거란에 고려에서 발생한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는 침략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 1010년 왕이 직접 친정하는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이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최근 등장하는 장면들은 2차 고려 거란 전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고려 거란 전쟁의 승자, 고려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는 서북면의 강동 6주 성들이 분전했지만, 거란의 기동전에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고 고려 왕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하는 수난을 겪었지만, 거란은 끝내 고려의 항복을 받지 못했다. 거란은 고려 왕의 향후 친조라는 기약 없는 약속에 따라 철군을 단행했다. 거란은 고려 영토 깊숙이 들어와 보급에 큰 문제가 발생했고 유목 민족의 특성상 장기간 원정을 하기 어려웠다.
고려는 비록 수도 개경이 파괴되는 아픔이 있었지만, 철군하는 거란군에 반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이 과정에서 양규는 최후까지 거란군의 섬멸과 고려인 포로들을 구출하는 데 온 힘을 다하며 장렬히 전사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후에도 거란은 고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 역시 이에 철저히 대비했다. 고려는 강감찬을 중심으로 북방의 군사력을 증가하고 방비를 강화했다. 또한, 내부의 결속력을 다졌다. 하지만 거란은 여전히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다. 고려가 상대하기에는 분명 힘겨운 상대였다.
1019년 거란은 소배압이 이끄는 정예 군대로 고려를 침공했다. 이에 대비한 고려는 거란이 침공 직후부터 그들을 공격하며 대응했다. 거란군은 빠른 기동전으로 고려 수도 개경을 직접 공략했다. 그들의 목표는 고려 현종이었다. 하지만 거란의 전략은 고려의 철저한 대비와 그들의 예상과 다른 개경의 항전으로 벽에 부딪혔고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게 됐다.
결국, 거란은 철군을 단행했고 고려는 그들을 추격에 궤멸 상태로 몰아갔다. 우리 역사 3대 대첩인 귀주대첩도 이때 일이다. 이후 거란은 고려에 대한 힘의 정벌을 포기하고 화친 관계를 맺었다. 고려는 거란에 사대를 하긴 했지만,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송나라의 교류도 지속했다. 이로써 동북아시아는 고려, 거란, 송나라라 상호 견제와 교류를 함께 하는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건 고려가 거란의 3차례 걸친 침략을 막아낸 결과였다. 이후에도 고려는 거란과 북방영토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지속했다. 3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 고려가 번영기를 누렸다고 하지만, 고려는 거란과 영토 분쟁을 지속해 왔다. 그러면서 효과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고려의 현명한 외교의 바탕에는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반대로 고려 정벌에 실패한 거란은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원정의 지속 실패로 인한 국력 소모도 있었고 송나라도 점점 국방력을 강화하며 반격에 나섰다. 다른 북방민족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과 경쟁했다. 어느새 거란은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에 낀 처지가 됐고 결국, 금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거란의 역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고도의 문화가 함께 했던 거란
거란은 자신들의 문자가 있었고 불교문화가 발전하는 등 문명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있었다. 그들의 유적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들의 문자 역시 몽골어를 통해 그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금나라에 멸망한 이후 잔존 세력들이 다시 나라를 만들지 못하고 타 민족에 동화되어 소멸한 것도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거란인들 중 일부는 고려와의 전쟁 중 포로가 되어 지금의 서울은 남경 일대에 거주했다는 기록도 있고 일부는 귀순해 고려군에 소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거란을 통해 들어온 불교 기록이 고려 불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려와 거란은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상호 교류의 역사도 함께 하고 있다. 이는 거란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더 넓힐 필요가 있다.
거란이 고려와 큰 전쟁을 치르고 지속적인 침략을 했다고 하지만, 중국을 사대하게 하는 강국을 건설했다는 건 단순히 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고 그에 맞는 인적 자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그들은 야만족, 오랑캐로만 봐서는 안되는 이유다.
즉, 고려 거란 전쟁에서 악당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거란이 그 모습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드라마를 본다면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진 : 드라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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